• 아리스토텔레스의 여가

    “행복은 여가 안에 들어있는 것 같다. 우리는 여가를 갖기 위해 여가 없이 바쁘게 움직이며, 평화를 얻기 위해 전쟁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천적 탁월성의 활동은 정치나 전쟁에서 성립하는 것이며, 이것들에 관련한 행위는 여가 만은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인다. 전쟁과 관련한 행위들은 전적으로 그런 것 같다. 정치가들에 행위 또한 여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 그래서 만약 탁월성을 따른 행위들 중 정치적인 행위들과 전쟁과 관련한 행위들이 그 고귀함이나 위대함에 있어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이 행위들은 여가와 거리가 먼 것이며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고 그 자체 때문에 선택 될 만한 것이 아니라면, 반면에 지성이 활동은 관조적인 것으로서 그 진지함에 있어 열한 것이며 활동 자체의 입에는 어떤 다른 목적도 추구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즐거움을 (이 즐거움이 그 활동을 증진시킨다) 가지는 것이라면, [마지막으로] 또 만약 인간에게 가능한 한 자족성과 여가적인 성격, 싫증 나지 않는 성질, 그리고 지극히 복된 사람에게 귀속하는 모든 성질들이 바로 이 활동에 따르는 것임이 분명하다면, 이 활동이 삶의 완전한 길이를 다 받아들이는 한, 이 활동이야말로 인간의 완전한 행복일 것이다. 행복에 속하는 것들 중 불안전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 <니코마코스 윤리학>제 10권 가운데 제7장 “관조적 활동으로서의 행복” 중에서

     

     

    *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여가”에 대한 아이디어가 꽤 적혀있다. 그러고보면 맑스 뿐 아니라 세상사에 대해 주절거리는 연구자들 대개가 고대 서양철학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전히 또 다른 주석 달기, 혹은 비틀기 정도에 불과하달까. (더 문제가 하나 있다. 애초에 이슬람권의 고대 그리스 철학 번역을 어떻게 염두에 두고 이해해야 하는지가 관건이다. 그런데 그 사태를 파악할 능력 조차 없는 상황이다. 딱한 처지의 3세계 연구자 지망생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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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준철 혹은 날아. 연구자이며 작가.

단행본으로 <가난의 문법>(2020)을 썼고, 학술논문으로 “정부의 ‘자활정책’과 형제복지원 내 사업의 변화”(2020) “청계천에서 난지도로 – 공간정보의 생산과 도시하층민 이동의 관계에 대하여>(2023)”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