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시단신] 욜로와 도시

    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 뉴스레터 도시연서 2017/7에 게재한 “도시단신”입니다.

    #0 욜로와 도시

    한창 유행인 단어의 도시적 의미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털어내겠다. 요사이 ‘욜로’라는 말이 유행이다. 일종의 자기-해석틀로 사람들이 믿고, 한편 언론은 대중을 상대하는 해석틀로 자주 애용하고 있다. 무한도전에 나오고 나서 정점에서 하향곡선이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욜로는 꽤 중한 ‘생활신조(生活信條)’로 여겨진다. 25년 전, 신해철은 도시인이란 ‘함께 있지만 외로운 사람들(도시인/1992)’로 불렀지만, 사람들은 어느새 ‘함께 있기라도 해야 한다는’ 망한 세상으로부터 도망쳤고, 차라리 ‘혼자’있길 택했다. 도시인은 ‘망한 사회에서 망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함께 있기라도 해야 한다는’ 망한 세상으로부터 도망쳤고, 차라리 ‘혼자’있길 택했다. 이제 사람들은 ‘망한 사회로부터 도망쳐야 덜 망하는 사람들’이 됐다. 욜로에 대해 고민하는 이유란, 이 도시인만이 가진 특유의 감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1 욜로와 번역

    욜로는 “You Only Live Once”라는 문장을 줄인 말이다. 직역하면 “니 인생 딱 한 번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욜로’를 번역하지 않고, 영어표현을 사용할까? 역시 욜로는 영어단어로 말해야 매력적인 걸까? 우선은 ‘욜로’라는 두 글자의 단어는 경제적이다. 짧기에 편하다. 반면 (자주는 아니겠으나) 알아먹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설명해야하니 불편하지 않을까? 그러나 여기에 ‘매력’이 있을지 모른다. 가령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욜로라는 말은 미간이 찌푸려질 오타라거나, (‘여기로’, ‘이리로’, ‘요리로’, ‘욜로’ 정도로 변화했을 법한) 한국어 파괴의 사례 정도로나 여겨질 가능성이 높은 글자조합이다. 그런데 이제 이 낯선 문자조합이 의미를 가진 단어가 됐다. 이 자리가 중요하다, 개인이 각자의 의미를 부여할 여지가 높아진다. “You Only Live Once, YOLO”라는 경구는 한국어로 번역하지/번역되지 않을 때에야 (각자의) 의미해석의 범위가 넓게 느껴질 수도 있다. 즉, 이 어색한 두조합문자는 ‘번역되지 않았기에’ 내멋대로의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고 볼 수도 있다.

    #2 욜로의 의미들

    사람들은 욜로를 몇 가지 공통된 의미로 본다. ‘도전’하는 자세, 더 나아가 ‘자기포상’의 행위, 혹은 별 볼일 없는 상술에 휘말린 자기기만(과 자기합리화)으로 나눌 수 있겠다. 우선, ‘도전’의 의미를 살펴보자. 한번 사는 인생, 후회 없이 살겠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때, “Carpe Diem”이랄지 “Seize the day”와 같은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이 ‘교훈’은 (좌충우돌이며 한계투성이인 생활세계에서) 그저 신조에 머물기 쉽다. 그렇기에 욜로는 대개 시장에서 ‘상품을 사는’ 행위에서 많이 사용된다. 특히, “욜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상품을 사는 소비양식을 가리키고, 더욱이 그간 수고한 자신에게 주는 (사회는 주지 않는) ‘자기포상’인 경우가 많다. “어릴 적부터 채찍질 당하며, 이제는 스스로 채찍질하며 살아온 생활에 포상이 필요하다. 이 잔혹한 세계에서 ‘뒷일 생각하지 말고’,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까짓거. 해보지 뭐.’”라는 마음 말이다. 반면, 이 “욜로”에 경기(驚起)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있다. 예컨대 ‘홧김에 지르는’ 행태로 보는 경우다. 이들은 욜로를 남들이 ‘홧김에 저지르는 (대책없는) 일에 대한 자기합리화’로 본다. 실질적인 문제는 도시에서의 소비 문제다. 자본을 축적하지 않는데 대한 한심함이며, 상품으로 달려드는 부나비 한 마리로 전락을 시킨다.

    #3 욜로와 대도시

    대도시가 주조한 독특한 생활양식은 (시골 혹은 다른 도시와도 다른데) 늘상 ‘합리적’이고 ‘계산적’으로 주어진데서 온다. 왜냐면, 도시에서의 삶이란 대개 측정가능한 수준의 결과물을 성취해야 하며, 이를 위해 시간표가 주어지고, 이에 맞춰 개인의 시간이 획정(劃定)돼 있기 때문이다. 이 탓에 도시인의 소외와 불안, 신경질증은 늘상 문제시 됐다. 어느새 이 양상은 ‘소비’의 특성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건 끊임없이 확인된 바 있다. 더 설명하자면, 학령기에는 암묵적으로 좋은 대학을 기준으로 개인 생애의 성공/실패가 달렸다고 믿는다. 따지고 보면 학령기에 가장 많이 내뱉은 말 중 하나는 “망했어”다. 수행평가가 끝나고, 시험이 끝나고, 입시가 끝나고 내뱉는 “망했다”는 표현이란, 겸양의 표현이자 실패를 재확인한 탄식이다.학령기가 끝나면, 너도나도 남의 회사에 취업을 해야 한다, 믿는다. 힘든 건, 남이 세운 회사에 들어가기란 너무나 어렵다. 필기시험과 면접시험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망했다”가 상당한 사회다. 취업이 어려워 공무원시험으로 갈아탄다. 역시 시험이다. 게다가 30여명인 같은 반 아이들 가운데서, 혹은 500여명 내외의 전교생 가운데서 등수를 매기는 일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다. 경쟁률을 달리 말하자면 내가 합격할 확률인데, 1:20, 1:100, 1500:1 같은 확률적 표현이 익숙해진 체제 내에 있다. 끊임없이 낮은 성공 가능성과 높은 실패 가능성을 마음에 품고, 실패의 경험을 쌓으며, 그렇게 대도시에서의 생활을 근근 버티고 있다. 특히나 대도시에서의 이러한 생존기는 딱히 낯선 일이 아니다. 그리고 대도시에서나 가능한 “욜로”의 이면이다.

    . . .

소준철 혹은 날아. 연구자이며 작가.

단행본으로 <가난의 문법>(2020)을 썼고, 학술논문으로 “정부의 ‘자활정책’과 형제복지원 내 사업의 변화”(2020) “청계천에서 난지도로 – 공간정보의 생산과 도시하층민 이동의 관계에 대하여>(2023)”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