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고] 조선족 동포 생활공간의 형성과 변화

    문현택(「한중포커스신문」 대표) | 소준철(『걷고싶은도시』 편집위원)

    2017 12 4 10, 『걷고싶은도시』 편집위원 소준철이 「한중포커스신문」 문현택 대표를 만났습니다. 문현택 대표는 흑룡강출신으로 연길에 살다가 1994, 한국에 왔습니다. 1997년에서 2001년까지 산자교회의 김해성목사와 함께 이주노동자운동에 참여했습니다. 현재는 조선족 동포 사회의 언론인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문현택 대표를 만나 시기별 조선족 동포의 생활공간 형성과 궤적을 추적했고, 재구성하여이야기체로 옮겼습니다. 무엇보다 1980년대의친척초청을 통한 방문 이야기와 1990년대초의성남에 대한 이야기는 찬찬히 톺아가며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Q. 1980년대, ‘모국’(母國) 방문 시기에도 밀집지역이 있었나요?

    A. 1980년대에도 조선족 동포들은 남한에서 일을 했습니다. 흔히 서울올림픽 이후로 알려져 있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 이전, 1984년부터 동포들은 한국에 올 수 있었습니다. 친척 방문을 빌미로 한국에 입국해 3개월(혹은 7개월)을 일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부분 가족이 중국에 있었기 때문이고, 돈을 벌어 다시 돌아간 사람들입니다. 이때, 사실상 체류 기간이 정해져 있는 건 아닙니다. ‘체류 기간이 언제까지니 그때까지만 있으라’는 규정은 따로 없었습니다. 즉, 추방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정주(定住)를 한 건 아닙니다. 가족이 중국에 있는데, 들어가서 쉬었다가 다시 나오는 게 낫지, 지금처럼 굳이 10년, 20년씩 정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한국에서 번 돈은 중국에서 제법 큰 돈이니, 중국에 돌아가면 더 편히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도가 쭉 이어졌다면, 불법체류 문제도 ‘반한감정’도 없지 않을까요? ‘모국’(母國)이라 들어왔는데, 왜 쫓아내냐는 말입니다.

    당시에 밀집지역은 따로 없었습니다. 일례로, 내 큰 형님과 큰 누나가 서울올림픽 이전에 한국에 왔었어요, 그때 들은 이야기로는 거의 일하는 데서 먹고 잤다 합니다. 식당, 이런 데서 먹고 자고 일했단 말이지요. 이런 방식의 ‘기숙’은 1990년대 초까지도 이어집니다. 아니면 지하철역에서 ‘약장수’를 한 사람도 있어요. 제 누나가 1980년대에 ‘우황청심환’, ‘호랑이 연고’를 가져다 팔았어요. 물론 그때 문제가 있긴 있었어요. 지하철에서 담배를 피우고, 지저분하긴 했지, 그래도 지하철역 밖으로 나가서 장사하게 했지,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만들어 추방하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약장수를 하다 돌아온 사람들이, “약을 놓고 팔면, 내국인이 지나가다 동포라고, ‘안되어 보여서’, 측은하게 생각해서 약도 사주고, 돈도 많이 벌어라, 이런 덕담도 해주고, 감동된 말도 해주고 갔다”며, “우리를 동포라고 아껴준다”는 말들이 돌았어요. 그래서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한국 친척들이 중국에 오면, 떡도 맞추고, 소도 잡고, 돼지도 잡고 잔치를 했어요. 우리 집에 친척이 왔다며, 소 한 마리 잡아서 잔치하는 거죠. 그런 세월이 있었습니다. 그게 계속 이어졌으면 정말 좋은 세상이 왔을 거예요.

    Q. 불법체류자 신분이 생기면서 어떤 변화가 이어졌나요?

    A. 올림픽이 끝나고, “남조선에 가면 어떨까, 한국에 가면 어떨까” 이런 생각으로 왔단 말이에요. 다녀온 사람마다 “엄청 발달하고, 영어를 많이 쓰고, 예의도 바르더라, 동포라고 50년 동안 헤어져 있었다고 많이 돌봐주더라”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옷도 신발도 얻어 신었다면서. 가끔 오는 한국 사람들이 카메라를 하나씩 메고 오면 동네 애들이 서서 구경하고 그런 시절이었단 말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김영삼 정부 들어 다 쫓아내더라고요. 불법체류 신분으로 만들어 추방했어요. 동포들은 언어가 통하니까 불법체류를 한다며, 입국 규제를 엄청나게 강화했어요. 당시에 조선족한테는 비자를 안 주는 겁니다. 친척 초청으로 들어온 경우, 불법체류를 하면 친척에게 벌금을 때렸습니다. 거기다 친척이 없는 사람들도 왔었단 말이에요. 그래서 친척 초청은 힘들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위명여권(僞名旅券)으로 들어왔어요. 한족(漢族)인 위명여권을 받아 들어오다가, 이것도 안 되니까 위장 결혼이 생긴 거예요. 그리고 위장 결혼도 안되니까 밀입국이 생긴 거예요. 거기다 체류 기간이 언제까지라 정해져있으니 그때까지만 있고, 불법체류 신분이면 쫓아내 버리는 상황이 발생했어요. 그렇게 추방당하면, 다시 한국으로 못 나오게 되니까 불법체류라는 게 생겼어요.

    Q. 1990년대 초반, 조선족 동포들은 어디에 어떻게 모여 살았나요?

    ‘분당신도시 개발사업’

    A. 1990년대, 이때도 내 생각에 동포 중 80% 이상은 일하는 식당이나 공장에서 먹고 자고 했어요. 그때 동포들이 하는 일은 역시 3D 업종이에요. 아니면 짐 나르는 일을 하고, 건설현장에 많이 갔는데 특히 분당신도시 개발 시기니 성남으로 많이 갔지요. 동포들은 모란동, 남한산성 아래 상대원동, 신흥동, 이런 곳에 모여 살면서 공사장에 가서 일했지요. 저만 하더라도 1994년도에 한국에 들어왔는데, 들어오니 “숙식 제공하는 데를 가” 이러더라고. 그런데 내 경우는 먼저 들어 온 누나가 옥탑방을 잡았더라고. 그래서 성남으로 갔습니다. 명절이 되면, 일하는 곳에서 나가라고 해요. 어디 있을 데가 없으니까 누나 집으로 왔는데, 집이 엄청 좁죠. 어디 가 있을 데가 없으니 누나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좁으니, 밤이 되면 남자들은 실내낚시터에 가서 날을 새고, 새벽에 메기 몇 마리 들고 오고 그랬어요. 이런 상황이지만, 성남에서 아무나 집을 살 수도 없었죠. 거래가 아예 안 됐어요. 아는 사람을 통해서만 할 수 있었죠. 한국국적을 가진 지인이 계약서를 써줬어요. 예를 들어, 한국에 와서 3~4년 있으면서 가까워진 사람이 계약서를 써줬어요. 어떤 부동산은 사실상 불법체류인 걸 알면서도 여권에 적힌 이름으로 계약도 해주고 그러긴 했어요. 지금 성남의 동포사회는 많이 줄었습니다. 생활이 조금 좋아지면서, 서울로 들어오고, 많이 빠져나왔지요.

    마지막 언덕, ‘산자교회’

    A. 무엇보다 성남에는 ‘성남 산자교회’ 김해성 목사가 터를 잡고 있었어요. 동포를 위해 싸우는 종교단체가 있다 보니까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거예요. 그때는 거의 90% 이상이 불법체류 신분이니까요. 나는 1997년에 산자교회를 갔어요. 거기서 한 4년을 같이 지냈죠. 교회에서 장례식을 많이 치렀어요. 동포들이 일하다가, 교통사고로, 맞아서 죽는 경우에 장례식은 대개 산자교회에서 했어요. 지하에 30~40구 정도의 유골함이 있었어요. 가족이나 친구가 중국에 돌아갈 때 가져가고, 어떤 사람은 날려버리고 그랬죠. 유골 보관함이 따로 있었죠. 어느 때는 가족을 못 찾아서 7개월간 가매장을 했다가, 가족을 찾아 다시 꺼내 화장했어요. 사고 기사를 보고 연락이 오거나, 가족이 없는 경우는 온갖 경로로 수소문을 했습니다. 거기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다친 사람들이 갈 데가 없어서, 교회에 와서 먹고 자고 그랬어요. 그래선지 아직까지 동포사회는 김해성 목사를 존경해요. 개인적인 과오가 있다 해도, 목사님의 공이 컸지요.

    Q. 1990년대 중반, 서울에서는 어디로 이주했습니까?

    빈 동네, 독산동과 가리봉동으로 온 동포들

    A. 1990년대 중반, 친구가 살던 가리봉에 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다 벌집촌이더라고요. 처음에는 가리봉동보다 독산동에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독산동에 왔다가 가리봉동으로 갔고, 그다음 가리봉동에서 대림동으로 왔어요. 가리봉동에서 대림동으로 온 거는 사실상 두 번에 나뉘어서 많이 건너왔어요. 독산동이나 가리봉동이나, 동포가 오면서 동포 상권이 생겼지요. 제일 먼저 중고가게가 섰어요. 테레비, 세탁기, 냉장고, 필수품인데 새 거는 살 수 없으니까 중고가게에서 사는 사람이 많았죠. 그때는 없어서 못 팔았어요. 그러고 중식품(中食品) 가게였죠. 고향 음식이 생각나니까, 사다 먹고. 그러다 식당도 생겼죠.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불법체류자 단속하면은 ‘가리봉 쳐들어간다’ 그래요. 독산동이랑 가리봉에 중국음식점이 들어섰어요. 그런데 단속이 되면 파리 한 마리도 안 날아다니고요. 살던 동포들은 불안한 거예요. 어느 날,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길거리에서 단속을 하는데, 내국인 상인들이 나와서, 단속차 밑에 들어갔습니다. “못 간다. 이 사람들이 여기 와서 겨우 상권을 형성했는데, 다 잡아가면 우리는 무얼 먹고 사냐”면서요. 상인들이 너무 반발해 가지고, 동네 안으로는 안 들어 온 일도 있어요.

    출신 지역에 따라 다른 동네에 산다

    A. 처음에 누가 자리를 잡고, 친구나 가족을 오라 해요. 다 가까운 데서 살아요. 이러다 보니 밀집지역이 형성됐어요. 1990년대 초 한국에 온 사람들은 흑룡강성 출신이에요. 왜냐면 한국에 연고가 있단 말이에요. 경상도 출신 사람들이 많았고, 한국에 친척들이 있었거든. 연변은 이북 쪽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내 경우도 아버지 고향이 밀양이에요. 이렇게 흑룡강부터 한국행이 시작됐고, 독산동에 처음 자리를 잡고 살았지요. 그래서 독산동은 목단강, 해림 그쪽 사람들이 모여 살았어요. 그리고 연변 사람들은 가리봉동에 많이 갔어요. 그래서, 독산동은 흑룡강, 가리봉동은 연변, 이렇게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어요. 그러다 대림동은 동북3성 짬뽕, ‘신흥도시’예요. 우리 입장에서 신흥도시죠, 막 집결하다 보니까, 하얼빈, 목단강, 연변, 심양, 대림동에 다 있습니다. 지역별로 모여 사는 건, 독산동이나 가리봉동에는 여전합니다. 당시 거주 환경은 열악했어요. 제일 싼 집에 가면 요만큼 작았어요. 혼자 누우면 그냥 땡입니다. 주방이라고는 그냥, 신발을 벗고 들어가, 쪼마난 전기밥솥 한 개를 넣으면 끝이었어요. 아주 좁은, 전체 공간이 요따만 한 ‘벌집’이었어요, 오래된 집이었고요.

    ‘신흥도시’, 대림동

    A. 원래 대림동은 다 비어있었어요. 상가들도 없고, 가져갈 사람들도 없었어요. 당시만 해도, 권리금이 커야 500만 원, 권리금이 없던 곳도 있었지요. 처음에 연변냉면이 하나 섰고, 그 후에 식품가게가 섰고, 그렇게 하다가 양꼬치 가게 한 두 개가 서면서, 상권이 시작하더라고요. 흥행한 건 2006년, 2007년쯤입니다. 여기는 벌집촌은 아니에요. 연립주택처럼 돼 있죠. 독산동이나 가리봉동하고 차원이 틀려졌어요. 저쪽 편, 가리봉동에서 왔다 하면 “시골에서 왔다”고 그럴 정도로. 지금은 보증금, 특히 주택 가격이 엄청 올라갔어요. 동포들이 와서 가격을 올려놨어요.

    단속과 신고를 빌미로 한 ‘내국인들’의 사기

    A. 대림역 8번 출구 아니면 11번 출구는 늘상 단속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신풍이나 신대방 근처로 이사갔죠. 출퇴근할 때 검문하는데, 중국사람처럼 생긴 사람을 골라 ‘신분증 내놔’라며 불법체류자를 잡아갔어요. 길에다 차를 딱 대놓고. 그때 심장약을 먹은 사람들도 많아요. 아무 관련 없는 순경만 지나가도 심장이 뛰는 거예요. 다른 문제도 있었어요. 가짜 경찰인지 가짜 출입국사무소 직원인지가 있었습니다. 경찰처럼 해가지고 딱 잡아서 골목에 들어가는 거예요. 없다 하면, 돈 200만 원을 내놔라, 안 그러면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잡아가겠다고 말하고. 어떤 때는 한밤에 갑자기 집 문을 두들기고, 신분증 내놔라, 없으면 돈 내놔라, 이런 가짜들이 막 생겨났었어요. 동포들은 언어를 들으면 딱 아는데, 그건 내국인들이 했어. 게다가 내국인들이랑 가끔 계를 ‘띄운’ 사람도 있어요. 100만 원, 200만 원, 뭐 1,000만 원을 줬는데 신고를 당해서 돈 받기 전에 추방당한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동포들은 불법이라 신고도 못 합니다. 위장 결혼도 그래요. 일 년에 한 번씩 체류 연장을 해야 하는데, 위장 결혼한 신랑이 안 가는 거예요. 돈 이야기를 하면 100만 원, 200만 원을 주고 데려가서 연장하고 그랬어요. 이혼하면 집에 돌아가야 하니까, 못 하지 그냥 꾹 참는 거예요.

    한국에서 동포들이 소식을 전달하는/받는 방법

    A. 처음에는 동포사회에 불법체류자가 많았어요. 고향 소식을 못 접하고, 한국의 형세가 돌아가는 양상을 모르니, 그걸 알리자며 언론사를 시작했습니다, 1999년에. 그때도 지금도 별다른 지원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독자는 꾸준히 많습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식당에 신문을 가져다 놓으면 금방 없어집니다. 요즘 한국사회는 ‘인터넷이 발달해서 신문을 안 볼 텐데’라겠지만, 동포사회는 인터넷이 집집마다 있는 형편도 아니고, 틈틈이 핸드폰으로 소식을 찾아볼 여유도 없습니다. 그러니 앉아서 잠깐 틈내 종이신문을 읽는 게 여전하지요. 젊은 층들은 조금 다르겠지만요. 주로 중국의 현재 상황과 출입국 상황을 다룹니다. 자진신고 기간이나 갑자기 어떤 정책이 변하는지, 무비자 입국 소식 등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게다가 동포들이 빨리 소식을 듣게 해야 해서, 동포 언론사 대표들은 신문사 사랑방에서 소식을 공유합니다. 그래서 금방 퍼집니다. 경쟁 관계가 아니라 공유하는 사이이고, 동포들 사이의 소식지입니다. 기자들은 많이 있는데, 상근으로 둘 수는 없어서 프리랜서 기자들로부터 글을 받습니다. 뭐 광고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광고로만 유지하기가 어려워, 다른 사업을 하며 이익을 내며 운영합니다. 비행기 티켓도 팔고, 체류 연장도 하고 같이 해나가는 중입니다. 그래도 한 10년은 문제가 없어요.

    Q. 2000년대, 이후 생활공간은 확장됐나요?

    A. 건대입구, 자양동은 나중에 형성됐어요. 처음 자양동에는 상업지역이 없었습니다. 대개 동포들은 2호선, 7호선이 모인 곳입니다. (4호선도 중요합니다.) 일하는 라인이 2호선, 4호선, 7호선입니다. 자가용도 없고, 지하철을 타고 다녀야 하니까 건대입구에 형성된 거죠. 주거가 들어가고 상권이 들어온 곳입니다. 그런데 대림동에서 건대입구로 넘어간 사람들은 별로 없어요. 새롭게 형성된 거지요. 게다가 동대문과 청량리 이쪽에도 형성이 됐지만, 광진구청에서 자양동을 중시한 것 같아요. 미식(美食) 거리를 선포한 걸 보면요. 이쪽엔 또 연변 출신 사람들이 많아요. 그리고 안산에 가면 한족들이 있고요. 공단이 있는데 오리지날 중국 사람들, 한족이 많이 살아요. 또 홍대 부근 어디에 유학생들이 게스트하우스를 잡고 밀집돼 있다는데, 유학생 중심으로 만들어진 거로는 유일한 것 같아요. 하여튼 없는 데가 없어요.

    잘은 모르겠지만요. 이렇게 여러 곳에 밀집지역이 생겼지만, 밀집 규모로는 대림동이 최고로 크지요. 그런데 대림동이나 자양동 같은 곳 말고, 거주지를 부천이나 노원으로 나가는 경우도 있어요. 비교적 저렴한 편인 아파트를 산 사람도 있고요. 이 사람들은 순수 거주지만 옮긴 사람들이죠. 저만 해도 신풍역 살다가 이수역으로 왔는데, 주거지로 조용한 곳을 찾아다녔어요.

    Q. 중국에도 조선족 동포가 밀집한 장소가 있나요?

    A. 중국 내부에도 조선족 동포가 모여 삽니다. 대부분 동북3성 출신이죠. 연길, 흑룡강처럼 예전 독립운동 하던 지역 출신들이, 베이징이나 상해나 심천에 가서 모여 삽니다. 4년 전 심천에 갔는데, 거기에 ‘조선민족연합회’가 있어요. 여기보다 더 잘 형성돼있어요. 심천은 1980년대 개혁개방이 되며 생긴 곳인데, 그때 한국사람들하고 일본사람들 투자가 시작됐죠. 조선족은 거기 통역사로 처음 들어갔어요. 조선족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웠는데, 일본기업이 들어오면서 조선족만 통역을 할 수 있었던 거지. 대학 졸업생들이 그렇게 심천의 외자기업에 취직을 했지. 그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성공했습니다. 몇천 명의 직원을 둔 회장님이 된 경우도 있어요.

    단합력이 좋습니다. 게다가 지금 18살, 19살 되는 자녀들이 심천에서 태어났거나 5~6세에 태어나 학교를 다니는 바람에 한국어를 모르는 거예요, 북경 표준말보다도 광동어를 사용하고. 부모와 대화가 되지 않으니, 주말학교를 만들었어요. 우리도 운영하는 ‘어울림주말학교’를 그쪽에서 만든 거예요. 기업가들이 돈을 모아, 한국에서 교재를 가져다가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어요. 그리고 1년에 한 번씩 운동대회를 하는데, 4천 명이 모여요. 그것도 3일을 하는데 조선족 동포 회사에서 후원을 해요. 회사 크기에 따라 (중국 돈) 십만 원, 만 원, 오천 원, 삼천 원, 이렇게 레벨이 딱 있고, 각자 사정에 따라 쫙 내요. 그렇게 한 번 운동대회를 하는데, 한국 돈으로 거의 2억 가까이 모이죠. 그걸 보니 한국에서 나름대로 돈 벌었다는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었나 생각도 해봤어요. 심천에 있는 동포들은 대개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어 강사로 있다가, 성공한 경우지요. 여기와 어떤 다른 게 있는지 궁금하더라고요.

    Q. 현재, 조선족 동포의 삶은 어떤가요?

    정주한 동포들의 노후 걱정과 ‘정주’

    A. 동포사회에서도 한 4년 전부터 노후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요. 예전에는 돈 벌어서 집에 보내고 자식들한테 보내고. 그런데 이제 늙고 병이 드니까 남은 게 없는 거예요. 집에 가면 당장 먹고 살 게 없는 거지요. 그래서 요즘 장기체류하려는 사람들은 연금보험, 보험을 많이 들어놔요. 보험 많이 들어놓는 사람이 많아요. 그다음에 일부는 저축도 많이 하고, 집도 사놓고 그러고 있죠. 자기네도 심각하게 느끼는 거예요. 10년 동안 불법체류 하면서 돈 벌어서 집에 다 보냈고, 합법이 되어 이제는 정당하게 중국에 갔다 오려고 들어가니까, 집에 있는 사람들만 호화생활했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잘 살았지, 그 사람들은. 가보니까 황당한 거지요. 앞에 간 사람들이 경고를 해요. “돈 보내지 마라, 와 보니까 허망하더라.” 이런 경험담들이 돌아요. 옛날에 사우디 갔다 온 사람들이 겪은 걸 똑같이 겪고 있다니까요.

    조선족 동포 이주사에 대한 나름의 정리와 앞으로의 문제

    A. 1세대들, 말하자면 88올림픽 전후로 90년대까지 온 사람들의 생활은 어려웠어요. 생활이 어려워서 자식들 공부시키고, 빚지고 한 걸 갚으려고 왔어요. 그래서 억척스러웠어야 했고요. 그때 온 사람들은 이제 골병든 사람이 많아요. “집에만 가면 실실 앓다가 죽는다”는 소리가 있었는데, 괜히 있는 게 아니에요. 2000년부터 들어온 사람들은 사실상 행복한 것 같아요. 들어오면 먹고 잘 때 있고, 오면 먼저 들어 온 부모가 용돈을 줬고, 일을 골라서 한 편이고요, 사실상. 앞에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했고 후에 사람들은 골라서 했고. 제일 문제인 건, 현재의 4세들이에요. 우리 세대가 지나가고 지금 자라나는 세대들이 그 일을 안 하려고 해요, 옛날 한국 사람들이 3D업종 일을 안 한다고 한 것과 똑같이 나온단 말이에요. 내국인은 국적이라도 있지, 얘들은 아무것도 없어요. 중국에 가도 기반이 없단 말이에요. 한국사회에서도 동포 4세대에 대해서 신경을 써야 합니다. 방치해두면 누가 올지도 몰라요. 심각하게 하는 이야기에요. 한국사회에서도 공감을 가져야 해요. 우리의 자식들을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지 고민을 해야 해요. 한국인 학교를 가면 왕따 당하는데 대책도 없고 말입니다. 다문화에 신경을 쓰는데, 한민족인 동포에 대해 신경을 안 쓸 이유가 없잖아요? 이 사회에 대해서 같이 살아나가는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앞으로는 ‘정주’해 나갈 거예요. 사실상 대개는 안 가요. 언론들에서는 “중국사람들 돈 벌어 간다”는 식의 말은 그건 책상머리에 앉은 자기네 판단이고. 요새는 안 가고 정주를 고려합니다. 한국사회 일원으로써 살 방법을 찾아요. 동포들이 정주하게 된 만큼, 내국인들도 서로 받아주고, 저놈 중국놈 이런 선입견을 깨야 해요.


    인터뷰 말미에, ‘조선족’과 ‘중국동포’ 등의 ‘호칭’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문현택 대표는 ‘중국동포’나 ‘재한중국동포’라 부르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중국 정부에서 호명하는 ‘조선족’이란 단어를 쓰려면, ‘조선족 동포’로 불러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귀화’한 동포는 ‘한국인’이라 강조합니다.

    글은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의계간기관지인「걷고싶은도시」 93호에실렸습니다. 포스트는주석을삭제한판본입니다. 가급적도시연대에게재된 PDF 판본을읽어주세요.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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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준철 혹은 날아. 연구자이며 작가.

단행본으로 <가난의 문법>(2020)을 썼고, 학술논문으로 “정부의 ‘자활정책’과 형제복지원 내 사업의 변화”(2020) “청계천에서 난지도로 – 공간정보의 생산과 도시하층민 이동의 관계에 대하여>(2023)”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