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사회에서의 재난 상황 노인과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7/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직접

소준철
전남대학교 역사문화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

일상화된 재난

재난은 위험하다. 그러나 재난이 어째서 위험한지를 명확히 말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 예컨대 UN에 보고된 통계에서 대한민국의 재난 피해자 수를 보자. 5년 단위로 검토하면 2005년 14,652명, 2010년 93,032명, 2015년 540명, 2020년 131,737명, 2022년 77,313명으로 늘어나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2006년과 2009년 사이, 2012년부터 2019년 사이를 함께 고려하면 재난이 딱히 ‘심해졌다’고 잘라 말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재난의 양상이 이전과 다르다는 인식을 갖는다. 그 인식은 통계로 오지 않는다. 이건 차라리 재난이 더는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품고 살아야 하는 ‘상태’로 옮겨가고 있다는 감각에서 온다. 폭염과 한파, 호우와 산불, 지진, 감염병, 화재 등 저마다 특정한 시기에 닥치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겹쳐지는 일이 잦아지기 때문이다.

재난은 제도적으로 유형의 구분이 명확하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은 재난을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으로 나누고 있는데, 전자는 태풍, 호우, 홍수, 대설, 강풍, 한파, 폭염, 가뭄, 지진 같은 자연현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후자는 화재, 붕괴, 폭발, 사고에서부터 전기망, 통신망, 교통망 같은 사회기반시설의 마비, 감염병과 가축전염병의 확산에 이르기까지 사회적이며 기술적인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구분은 제도적으로 명료하게 구분되는 듯 보이지만, 실제 재난 상황에서는 모호할 때가 많다. 2017년 포항지진은 초기에는 자연재난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상 사회재난이었으며, 2022년 다수의 피해자가 발생한 수도권 폭우 역시 자연재난과 사회재난이 복합적이었다. 또한 폭염은 높은 기온이 문제지만, 냉방이라는 비용과 기술의 문제, 외로움과 단절이라는 관계의 문제가 피해자를 만든다. 요컨대 순수하게 자연적인 재난도, 순수하게 사회적인 재난도 없다. 재난은 자연의 힘과 사회적 조건이 얽혀 발생하며, 그래서 재난을 묻는 일은 우리 사회의 현재를 묻는 일이다.

정보로서의 ‘재난’을 넘어서기

우리는 재난을 보통 속보, 뉴스, 재난문자로 접한다. 우리는 재난을 흔하게 과거형의 정보로 듣는다. 전통적인 텔레비전이나 온라인 언론은 사고 당시에는 속보를, 사고가 끝난 후에는 뉴스를 제공한다. 또 아주 가끔 미래형의 예보도 있지만, 재난은 주로 경고의 목소리로, 혹은 참담하고 비참한 사태로 드러나는 셈이다. 문제는 재난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재난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전해지는 정보’로 접하는 것과 ‘재난 속에서 살(아남)기’는 다르다. 재난은 그것을 경험한 누군가에게 일상이다. 그들에게 재난은 겪음으로써 무언가를 잃는 일이다. 타인의 재난과 달리 재난을 경험하는 일은 그 감정의 파고를 쉽게 예상하기 어렵다.

2025년 8월 경남 산청의 상능마을은 3월의 산불과 7월의 폭우와 산사태 등, 두 차례의 연이은 재난으로 마을이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어 800미터 떨어진 곳에 이주단지를 지어 주민 전체가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열세 가구 열여섯 사람이 살던 마을은 새로운 단지가 들어서는 2028년까지 인근 모텔에서 함께 지내기로 했다. 재난은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이는 한 마을에서의 시간과 터전을, 또 사람들의 일상을 통째로 파괴했다. 그래서 재난을 묻고 고민하는 일은 재난이 얼마나 위험한지가 아니라 재난이 닥쳤을 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우리가 정말 아는지, 무얼 잃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안전을 말할 수 있을지 묻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재난은 언론과 행정에 의해 ‘피해’의 언어로만 다뤄질 때가 있는데, 문제는 ‘피해’의 크고 작음보다 재난 이후의 일상이 ‘돈’으로만 이야기될 때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재난을 살아내는 사람의 삶과 그 어려움을 놓친다. 포항지진 이후 지원금은 여러 사태를 낳았다. 지원금을 받았던 피해자의 주택이 알고보니 ‘불법건축물’이었다는 게 밝혀져 지원금을 반납하고, 체납료를 문 경우도 있었다. 또 복구융자금은 ‘저리’로 제공되었지만 수익이 없는 노인들은 이용할 수 없는 돈이었다. 재난은 제도에 의해 피해가 ‘등급화’되고, 고통은 ‘금액’이 되며, 재난보상금과 복구융자 등은 재난의 종결처럼 여겨진다. 그럼에도 재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다. 특히, 노인들은 가장 문제적이다. 대도시가 아니라 중소도시와 농어촌 지역에서, 또 부유한 사람들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재난은 그 영향을 깊게 드리웠다. 여기서 취약한 사람들은 위태로움을 느끼며 생존했고, 겨우 살아남았다. 사람들의 트라우마는 깊고, 충격이 심한 몇몇은 일상이 뒤바뀌었다. 한 여성은 아파트와 일터 모두 실내가 파손되었는데, 갈라진 벽을 보고 있기가 너무 흉해 페인트와 석고를 바르다가 허리를 다쳤다. 그가 유일하게 바라는 것은 잠을 충분히 자는 일이다. 이 사람에게 재난은 2017년에 끝난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갈라진 벽과 설친 잠으로 지금도 계속되는 상태다.

재난은 인프라가 고장나는 순간이다

2023년 5월 31일 오전 6시 41분, 서울시는 시민들에게 대피를 준비하라는 위급재난문자를 발신했다. 내용은 이랬다.

“오늘 6시 32분 서울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대피할 준비를 하시고,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짝꿍과 아이를 끌어안고 막막해했다. 어디로 대피해야 할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더욱이 네이버, 행정안전부 재난안전 누리집, 모두 먹통이었다. 재난주관방송사라는 KBS를 부랴부랴 켰다. 별 내용이 없었다. 그러다 7시 3분 행정안전부로부터 “서울특별시에서 발령한 경계경보는 오발령 사항임을 알려드림”이란 위급재난문자가 왔고, 7시 25분에서야 서울특별시는 경계경보가 해제되었다는 안전안내문자를 발송했다.

이 사건을 두고 경계경보 발령 시간이 늦었고, 문자 발송 시간이 늦었다는 비판이 컸다. 시간만이 문제는 아니다. 만약 실존하는 재난 상황이었다면, 문제는 극심하다. 대피소의 위치는 물론이며, “우선 대피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무언지 따위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이 아이를 끌어안은 듯, 돌볼 사람이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라면 “위급재난문자”건 “안전안내문자”건 별 쓸모 없는 문자에 불과하다. 형식적으로는 경고를 전했을지언정, 이를 통해 피신할 방법이 단 하나도 제시되지 않았다.

재난문자는 마땅한 ‘재난전달체계’이지만, 대피전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2025년 3월 28일 동아일보는 “고령층이 3G폰을 사용하여 재난문자를 수신하지 못하거나 받아도 휴대폰 사용법을 몰라 재난문자를 확인하기 어려움”을 겪는다고 보도했다. 여기에 행정안전부는 “이동통신망 장애가 발생하더라도 … TV자막과 라디오를 통해 재난방송을 송출”하며, “자동음성통보(마을방송), 재해문자전광판 등 재난 예보시설, 경보시설을 활용해 마을에 재난정보를 안내”한다고 대응했다. 이 대응은 ‘전달체계’만을 말한다. 정보를 어떤 경로로 흘려보낼지 촘촘하게 늘어놓지만, 정작 그 정보를 받은 사람이 어떻게 몸을 피해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은 비어 있다. 그 빈 자리를 메우도록 떠넘겨진 건 가장 작은 단위인 ‘마을’ 혹은 ‘동’이다. 자동음성통보든 마을방송이든 재해문자 전광판이든, 방송을 전달받은 누군가가 노인을 찾아 함께 대피해야 하는 마을 사람들의 몫이다.

문제는 그 마을이 어디에나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마을방송이 집집마다 닿고 이웃이 서로의 사정을 아는 곳이라면 이 방식은 그런대로 작동한다. 그러나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며, 홀로 사는 노인이 늘어나는 도시와 멀찍이 떨어져 홀로 사는 노인이 늘어나는 시골에서 노인의 피신이 ‘동 행정’과 ‘마을’의 몫이라는 건 늘 불안하다. 재난전달체계는 있지만, 사람을 함께 이동시키는 관계망이 끊어진 사회만을 확인할 뿐이다.

또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전달체계의 확산 역시 걱정된다. 웹사이트는 종종 먹통이 된다. 앞선 예처럼 트래픽이 폭증할 때, 혹은 인터넷망, 데이터센터 등 관련된 시설에 사고가 날 때도 종종 멈춘다. 이런 사정은 재난 상황에서 관련 정보를 ‘직접 찾으라’는 국가의 재난예방교육을 의심하게 한다. 국가는 정보를 흩뿌린 뒤 대처의 책임을 넘겼고, 그렇게 위험은 사사화된다. 즉, 재난 상황에서 모든 것은 고장 나 있기 쉽다. 여기서 우리가 재난을 바라볼 때 흔히 범하는 잘못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재난에 대처하는 방법을 문제없이 작동할 때를 기준으로 삼아 상상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어떻게 ‘복구’하느냐는 질문이다. 웹사이트의 트래픽을 늘리는 문제를 넘어서, 정부의 홈페이지나 재난주관방송사가 아닌 민간포털사이트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된다는 주장도 있었다. 물론 이런 보강이 불필요한 건 아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한 가지를 전제한다. 화면을 들여다보고, 검색창에 무언가를 입력하고, 스스로 길을 찾아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다. 민간포털을 더 끌어다 쓰든 서버를 늘리든, 그 정보를 받아 해독하고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을 표준으로 두는 한, 3G폰을 쥔 노인과 거동이 불편한 사람은 그 표준 바깥에 그대로 남는다. 전달체계가 더 튼튼해지는 것과 더 많은 사람이 실제로 대피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초고령사회는 다종적이다

인간은 단순한가. 도나 해러웨이는 ‘응답’을 말한다. 이 세계는 온전히 설명되지도 않고 예측도 불가능한 다종 간의 뒤얽힘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인정하자고 말한다. 그는 인간만의 사회가 비인간과 조우하고 있음에 주목하며, 그들을 이해하기 위한 개방성을 길러야 한다고 보았다. 정작 ‘인간사회’는 단일할까? ‘인간사회’도 꽤나 다종적이다. 갓 태어난 영아와 걸음이 느린 노인, 매일 달리기를 하는 청년, 아이를 품은 여성처럼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몸으로 산다. 또 성취에 익숙한 사람, 가까운 사람을 잃었던 사람, 몸과 마음을 다쳤던 사람 등 또 다른 마음으로도 산다. 우리는 사회에서 ‘단일한’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다양한 종이 서로 관계를 맺는 것만큼이나 한 종 안에서도 ‘다종성’을 알아차리고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하나가 아니며, 함께 살아감으로써 존재한다. 누가 있으며 누가 생겨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의무다(도나 해러웨이, 2019, 108쪽).”라는 말을 새길 필요가 있다.

재난의 상황에서 다종성을 말하는 이유란, 기존에 흔히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회복’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제시하기 위해서기도 하다. 회복이 본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일이라면, 우리는 재난 이후 ‘회복’을 말하는 것에 거리를 두고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재난은 멀쩡한 사회가 바깥에서 부수어진 경험이 아니라, 평상시에 이미 불균등하게 짜여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웹사이트가 멈췄다는 보도에 앞서 그 웹사이트에 닿지조차 못한 사람이 있었고, 재난문자가 늦었다는 지적에 앞서 그 문자를 확인조차 못한 이도 있었다. 또 스스로 정보를 찾고 스스로 걸어서 대피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전달된 ‘정보’는 무용했다. 이러한 사정은 노인에게 특히 뼈아프다. 돌봄과 정보와 이동에서 위태위태한 이들에게 ‘회복’은 취약했던 원상태로의 복귀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를 표준으로 삼고, 누구를 바깥에 두었는지 다시 묻고, 가장 늦게 정보가 전달되거나 전달되더라도 피신할 수 없는 이들을 기준으로 새 판을 짜야 한다.

국가는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서 ‘안전취약계층’을 호명하며, 이들을 보호하고 지원하기 위한 보편적인 제도와 정책을 제시한다. 그러나 ‘안전취약계층’이라는 하나의 이름은, 그 안의 다종성을 도리어 지운다. 앞서 말했듯이 같은 노인이라도 도시와 농촌이, 남성과 여성이, 홀로 사는 이와 곁에 가족이 있는 이가, 몸이 성한 이와 거동이 불편한 이가 재난을 겪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재난 상황에서 노인과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노인을 비롯한 다종의 취약한 자들을 불러 각각의 처지를 살피는 질문이어야 한다.

즉, 취약성을 근거로 각자가 안전하게 이어지는 조건을 만들자는 제안이다. 재난을 두고 누가 먼저 무너지는가를 말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일 수 있는지를, 먼저 무너지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말해야 한다. 노인을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마주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태도는 어린이, 장애인, 외국인 등 다양한 존재에 대한 보호로 나아가야 한다. 

1) 도나 해러웨이, 황희선 옮김, 『해러웨이 선언문』, 책세상, 2019.

2) 김준홍, “아직도 계속되는 삶의 여진: 포항지진 후 1년”, 다양성+ASIA. (URL: https://diverseasia.snu.ac.kr/?p=2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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