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구들을 위한 세운상가 관련 서울기록원 공개 문건의 의미와 ‘위치’ 설명 혹은 추정

    서울기록원이 공개한 이 자료는 세운상가 등의 청계천-을지로 개발사의 초기문서로 너비 50m 도로 계획을 상업지/주거지로 전환시킨 계기를 제공한 행정문서로 추정된다. 이 구상은 (문제가 되는 무허가주택 철거방법과 주거지/상업지 개발이라는) 행정적 방향을 제공했고, 이러한 행정 위에서 서울시와 민간건설사가 얽혀 만들어진 건축물이 세운상가다.

    1) 손정목의 설명을 이해해야 한다. 해당 문서가 생산되기 전인 1952년 서울시는 소개공지를 도로로 만들겠다는 공표를 했다. 그러나 재무부가 이땅을 국유지를 팔았음. 당시 우리가 소개공지로 아는 곳 중 일부가 사유지가 된 상황이다. 어쨌거나 서울시는 다시 도로 공사를 재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서울시의 입장에서는 도로부지이니 도로로 만들어야겠는데, 사유지가 곳곳에 있으니 도로 건설을 위해 (이전에 재무부 등으로부터 국유지를 사들인) 지주들과 함께 도로를 건설해야 했다. 이 문서는 기존 도로계획 옆에 건물을 건설하는 방식을 제기한 목적을 지닌다. 지주 조합을 유도하고, 이들의 재산권을 보호하며 도로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 생산된 문건으로, 즉, 서울시의 도로 건설과 지주의 재산권을 보장하며, 철거민들에 대한 대책을 담기 위한 목적의 문건이라고 봐야 한다.

    2) 본래의 계획은 너비 50미터 길이 1,180미터의 소개공지를 도로로 만드는 것에 한했다. 그러다 중구청에서 주변 재개발의 의도를 담은 계획을 내놓은 결과물이 이 “행정연구서”다. 이 “행정연구서”를 누가 작성해 중구청에 제출했는지 중요하다. (이을삼은 보고자라는 점만 확인이 가능하지, 이을삼이라는 관료의 당시 역할과 얽힌 행위자들이 누구인지 등에 대한 정보는 아직 없다.)

    3) 이후의 연구결과물과 (현재 국가기록원에 있는 1960년대 생산된) “세운상가 관계철(이의신청) 1&2”를 볼 때, 서울시는 다른 계획으로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추가적으로 Negler에 제안한 후 새 설계를 받기는 했으나 예산 상의 문제를 들며 고사했고, 1966년 7월 박수근에게 설계를 맡겼다는 설은 유명하다. 10월이 되면 기공식이 열린다. (관련 사진: https://archives.seoul.go.kr/item/1387375 ) 그렇지만 김수근의 안 역시 최종적으로 선택되지 않았다. 8개 기업이 각각 맡아 시공을 한 탓에 전체의 그림은 사라졌고, 각기 다른 8개의 연쇄동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상징놀음은 차치하고, 진짜 필요한 건 모두의 설계안보다 각 8개 시공사의 각동 설계도면이다.)

    4) 어쨌거나 이 문건에 실린 계획은 실현되지 않은 안이다. (손정목에 따르면) 건설부가 이 안을 두고 “계획 변경”에 대해 문제를 삼았다. (여기에서 본래 서울시가 건설부에 제출한 안이 있어야 한다. 그건 아직 못 찾은 상황인데.) 이 행정문서는 사실 재개발의 방식에 대한 중구의 입장을 보여준다. 중구청은 당시 4층의 너비 10미터 가량의 주상복합 건물을 상상했을 뿐이다. 현재의 세운상가에 비교하면 작은 규모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 안은 철거민들에 대해 “우선입주”할 권리를 준다는 재개발의 논리를 만든 데 의의가 있다. (이건 현재까지도 기능하지만, 이제와보니 입주권은 대개 지주에게로 간다.)

    5) 결과적으로 세운상가가 개발되었다. 기공이 된 시점에는 ( 4)에서 문제를 제기한) 건설부도 동의한 것일텐데, 그 명분이란 “불량주택 개량사업”이었다. 따져보면 당시 세운상가의 개발에 있어 중구청, 서울시청, 건설부가 모두가 다른 방식으로 재개발 후에 대한 상상을 했다. 중구청은 지주를 위한 저밀도 주상복합지구로, 서울시는 중밀도와 고밀도가 뒤섞인 주상복합지구로, 건설부는 도로 확보로 모두 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당연하게도). 그렇다면 세운상가의 개발에서 가장 고민되는 지점은 당시 서울시청의 판단과 움직임이다. 아직 이러한 상황을 알 수 있게 하는 문건은 발견하지 못 했다. (손정목은 이런데서 너무 말을 아꼈다.)

    6) [정리] 시기적으로 이 문건을 비롯해 세운상가의 개발은 1958년 청계천 복개의 실시와 (나 혼자서 1차 대-재개발의 시점이라 부르는 ) 1965년 도심재개발과 1967년 청계고가복원사업으로 이루어지는 대규모 도심-계획 사이에 있다. 을지로-청계천의 운명은 실상 1966년 10월 이전 언젠가에 결정됐다. 여기에는 유통 혁신 등의 당시 사회개발 논리 역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이러한 개발/재개발은 기존의 무허가주택의 처리에 있고, 이걸 첫 실험한 사건이 바로 세운상가의 건설로 보인다. 이런 구도 안에서 이 문건은 당시 “재개발”의 정당화와 대책에 있어 지주의 재산권 확보와 무허가주택 거주자들에 대한 개발 후 입주권이라는 방식을 도입한 사례이기에 중요하다고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에 1966년 10월의 재개발지구로의 고시와 1966년 11월 불량주택 개량사업지구 관련 문건, 8개 업체로의 분할 시공 등의 문건이 더 찾아지면 (앞으로의)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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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백
    알고 보면 이 보충도 문건을 보지 않은 상황에서 손정목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상상하는 과정에서 나온 생산물이라는 큰 한계가 있다.

    ** 출처
    서울기록원 페이스북 페이지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176412889214741&id=442795935909777&ref=bookma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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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준철 혹은 날아. 연구자이며 작가.

단행본으로 <가난의 문법>(2020)을 썼고, 학술논문으로 “정부의 ‘자활정책’과 형제복지원 내 사업의 변화”(2020) “청계천에서 난지도로 – 공간정보의 생산과 도시하층민 이동의 관계에 대하여>(2023)”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