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과 반성: 청계천-을지로 상가를 생각하며

    이 자료는 (북성로) 글자풍경 전시의 연계 워크숍인
    “‘북디자인 열린 책상 워크숍’ 1회 – 북성로 ‘두껍게’ 바라보기”에서
    발표한 내용 중 일부입니다.

    제조업

    제조업이란 무엇인가? 제조업 상가란 무엇인가? 청계천(과 북성로)의 제일의 역할은 제조업이다. 이 제조업의 사전적 정의란 “물품을 대량으로 만드는 사업”이다. 그 역할을 다시 적으면, 청계천은 (어떤) 물품을 대량으로 만드는 사업을 하는 사업가와 사업체가 모인 장소이며, 이를 ‘상가’라 부른다. 나는 이 “청계천-을지로 상가”를 기술자가 물품을 “만드는” 일을 하며, 기술자/상인이 그 물품을 사고 파는 “사업”을 하는 장소로 여긴다. 여기서는 (1) 제작, (2) 홍보, (3) 판매, (4) 수리, (5) 폐기물의 처리, (6) 계약, (7) 알선 등의 사업이 이뤄진다.

    청계천-을지로 상가의 변화를 살펴 보자

    • 제도의 효과, 청계천-을지로 상가

    “청계천변의 상권이 가장 활성화된 시기는 1970년대로 볼 수 있다. 1970년대 말이 되면 청계천변을 비롯한 중구의 상권은 전국에서 가장 큰 수준이다. 당시 전국 도매거래액이 2조4천4백87억원으로, 중구는 7천8백83억원으로 32.2%를 차지했고, 도산매거래액의 크기가 인천과 울산, 충북 전체의 크기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다. 여기에서 의약 및 화학제품이 전국의 19.1%, 서울의 41.7%, 기계류는 전국의 69.1%, 서울의 78.7%, 건축자재와 금속류, 전기기기 등의 부문에서 모두 전국의 20-54%, 서울의 35-78%에 달했다. 사실상 중구의 산업은 서울을 비롯해 전국을 지배한 수준이었다.” <경향신문> 1978. 1. 23.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 주택건설 붐으로 이 지역의 상권이 확장됐는데, 청계천-을지로 상가가 많게는 전국 건축자재 도매상권 비중의 90%를 차지했고, 1976년에는 기세가 꺾였더하더라도 70%의 비중을 보였다. “을지로 2가 일대의 왼편에는 커튼, 싱크대, 융단 등 내장품목이 주를 이루고 있고, 3가 일대의 왼편은 합판, 타일이 주종거래 품목이다. 이 2/3가 일대의 오른편은 고급가구에서 시작되어 캐비넷, 철제의자 등 가구점이 줄을 잇는다. 한편 4가 일대는 철판, 못, 알루미늄, 샤시, 비철금속류가 집중된 금속자재 전문상가를 이룬다.”

    1960년대, 동대문시장에서 의류제조업이 지역의 주된 산업으로 성장한다. 널리 알려진 대로 피난민들이 청계천변에 무허가건물을 짓고, 이 건물을 공장과 점포로 사용했고, 설비라고는 박완서 등의 소설에 나오는 대로 미싱기 한 두 대에 불과했다(신수정, 2016: 275쪽). 더구나 청계천의 복개와 경공업 중심의 시장의 성장에 따라 인근 공장이 재편됐다. 예를 들어, 의류제조업 공장의 설비와 도구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에 의해 고쳐졌을까? 게다가 1960년대 후반, 동대문종합시장과 같은 커다란 상업지가 등장했고, 포목장수 등의 상업자본이 직물공장과 날염공장의 상업자본으로 변모했다(신수정, 2016: 291쪽). 관련 설비의 수요가 늘어나자 설비와 도구를 판매하고, 유지보수 기술을 제공하는 공장과 기술자가 자연스레 늘어났다. 즉, 동대문시장과 의류제조업의 성장에 따라 을지로-청계천 사이의 상업화가 급속화됐다고 가정할 수 있다.

    “서울 을지로3가에서 청계천과 종로 3가를 거쳐 돈화문 앞까지 이르는 상가지대는 분업화된 자동차병원가라 할 수 있다. …… 을지로 입정동 쪽은 타이어, 그 맞은 쪽은 8톤 이상 트럭 등 중장비부속상, 청계천 쪽은 엔진의 연소장치, 배관부문이다. 청계천을 건너가 관수동 쪽은 컴프레서, 모터 등 기계류, 장사동 편 중간은 배터리, 스타트 모터 등을 취급한다.” <매일경제> 1968. 11. 11.

    지금의 관수동 인근에 중고자동차 매매상자동차 부품상이 밀집해 있었지만, 교통 체증을 유발하는 등 문제가 발생했다. 1979년, 중고자동차 매매업체가 협력해 장안평에 새 자동차 시장 부지를 매입했다. 이후 기존 업체들이 차례차례 장안평으로 이전했다.

    전자 관련 시장의 시초 역시 종로와 을지로 지역 내부였다. 최초의 제품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해당 산업이 밀집하고, 상인/기술자와 이용자가 상권을 형성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이 지역은 전자식 시계나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제작/판매/수리가 이루어지는 기술산업의 초기 형성지로 볼 수 있다(여기에 대해서는 아래 조동원의 작업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조동원(2017), “청계천 전자상가, 복제의 기술문화, 디지털문화의 형성”, <IDI 도시연구> 11.
    ______(2019), “디지털문화 초기사 연구: 동아시아 지역횡단의 전자오락기·개인용 컴퓨터 복제를 중심으로”, <한국언론정보학보> 98.

    청계천-을지로 상가의 기술자와 상인들은, 1987년부터 차례차례 시작된 ‘용산전자상가’, ‘영등포 당산동 기계부품유통상가’, ‘구로 기계부품유통상가’, ‘고척동 산업용품 상가’, ‘시흥산업용재 유통상가’, ‘중앙철재종합상가’등으로 분산/이전하기를 요구받았고, 꽤 많은 이들이 이전했다. 그리고 IMF 외환위기를 지나며 산업구조의 변화가 발생했고, 이 변화는 청계천변의 상권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 제조업의 집중도가 낮아졌고, 서울시의 산업 역시 3차 산업 중심으로 재편됐다. 기술자들, 그들은 이곳을 떠나지 못했고, 경제위기로 인해 사업의 기반이 취약해졌으며, 산업변화로 인해 낡은 존재가 되었다.

    2018년 11월에서 2019년 11월까지의 변화, 그리고 다가올 미래

    나는 순진한 아키비스트가 되어 가고 있는 건 아닌가?

    우리는 청계천-을지로 상가에서 만나는 것을 ‘레디메이드’로 오해한다. 즉, 오브제로 이해한다. 아카이브를 구축하면 후대에 나아지리라는 오만에 집착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플랫폼 – 오브제의 조합을 상상한다. 이건 늘 문제다. 왜냐면, 이는 우리가 나서서 기술자와 그들의 현장, 그리고 도구를 대상화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위의 역사 서술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은 산업이란 변하는 것이고, 낙후한 산업은 사라져도 된다는 소리에 동원되기 십상이지 않을까?) 이건 끔찍한 시인인 고모가 남긴 <만인보>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우리는 무엇을 수집하는가
    (1) 낡은 세계의 규범들(과 은어), (2) 장소와 쓸모를 다한 도구들, (3) “죽은 자들의 백과전서”, (4) 오래된 (작은 그리고 덮개없는) 파사쥬, (5) 연결되었다 끊어진 것들, (6) 그나마 쓸모있거나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

    수집한 것들을 이어붙여 우리는 무얼하고 있는가.
    (1) 연결의 흔적(을 통한 회생으로의 희망), (2) 사회적 의미의 전유(낡은 것 -> 쓸모있는 것), (3) 과거로의 (일시적) 회귀, (4) (말 할 수 없는 이들 혹은 말하지 않았던 이들의) “주체 만들기”

    나는(우리는) 망헐 만인보를 쓰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이 세상에 와서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노래의 집결”이다. 과연 그럴까? “25년, 30권, 4001편, 5600여명이라는 숫자”, 그리고 (한때 서울시청에 있었던) “만인의 방”. 그것이 우리에게 알려주는게 있었나? 차라리 특정한 전제 위에 선 역사서를 보거나 누군가의 일기를 읽는게 낫지 않나? 더구나 이 현장은 온갖 욕망이 뒤엉킨 자리다. (우리의 아카이빙에 대한 순진한 관심이 개발을 정당화하는 욕망에 이용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괜한 호기심으로 쓸데없는 ‘만인의 방’을 만들지는 말자. (다른 많은 대상들이 있음에도 굳이 청계천-을지로 상가가 전부인 양 이러고 있는걸까,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되물어야 한다. 이곳이 무엇의 중심이라기보다, 내가 여길 왜 중심으로 여기는지에 대한 답을 궁리해야 한다.)

    나는 순진한 아키비스트보다 차라리 탐정이 되겠다. 왜 망했는지를, 왜 이 처지가 됐는지를 밝히겠다. 나와 동료들의 연대가 가진 지식과 관찰력을 끌어 모아, 왜 지금 이 모양 이꼴이 되었는지 추리하겠다. 그리고 망한 풍경이 아니라, 망하게 된 과정을 기록하겠다.

    ‘장인’이란 굉장히 편의적인 호명이 아닌가?

    나는 기술자들의 삶을 드러내는 일은 조심스러워야 생각한다. 이 낡은 기술자들의 지위가 가장 높았던 시절은 1970-1980년대(에서 일부 1990년대까지로 여겨진)다. 이때 청계천-을지로 상가에서 기술자들이 어떻게 지냈을지 상상해보자. 소수의 성공한 기술자/상인은 상가 바깥에 공장을 차려 확장했을 것이다. 남은 이들은 (지금에 비해 작은 내수 위주의) 원청을 받쳐주는 하청업체 기술자이며 나까마가 기획한 ‘판’에 참여하는 기술자로 지냈지 않았을까?

    기술자들의 위치를 설명하는 일은 무척 모호하다. 정책적으로는 ‘기술공’에 가깝고(그렇지만, 기술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술공이라 부르기는 애매하며), 이들에 대한 보호를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장인’(혹은 브리꼴뢰르)이라 말한다. 더 나아가 이 주장에는 그들에 대한 “문화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목표를 가지만, 이들을 대상화한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더구나 그들의 처지와 경제적이며 산업적인 상황을 두고 볼 때, 사실 이들을 무어라 부를지 주장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이 현상은 한국사회에서 서울의 몇 지역(청계천·을지로, 문래동 등)이나 다른 대도시에 위치한 제조업 상가군의 기술자가 처한 복잡한 처지를 잘 대변한다. 우선 이들은 (어쩔 수 없는 정부정책의 공백 사이에서 성장한) 장인 노동자시스템에서 육성되었고, 이후 기술인력양성의 구조와 그로 인한 산업 발전에서 만들어진 테일러리즘적 (교육과) 노동분화의 방식에 적응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더구나 이들은 더 이상 도제식 교육을 실시하기 어려운 처지로, 대개는 외딴 방에 앉아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더 이상 전수될 수 없는) 기술을 실현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할 때, 우리가 위기상황에서 그들의 역할과 쓸모를 보호하기 위해 이용하는 ‘장인’이란 호명에는 약점이 있다. 우선, 이 ‘호명’은 이전의 ‘기술전수’를 복원하자는데 있다. 이 주장은 현실적인 대안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호명이 몰대안적인 상황을 낳는 건 아닌지 의심해 본다. 우리만의 자기충족적 대안은 아닐까? 누가 이 주장을 하는지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호명하는 이들의 ‘장인화'(Janginization?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가 산업의 흐름에 있어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이 ‘현업’으로 지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선으로 두고 다시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이 호명 문제란 ‘현업’일 수 있는 가능성을 담보하는 영역에서만 편의적으로 불릴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조심스럽다. (나 역시 별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생산(구조)가 어그러진 배경

    어디를 가더라도 제조업장의 배치나 그 도구는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기술자의 자본, 즉, 계급적 차이만 존재할 뿐은 아닐까?)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 유래가 (미군의 유출된 물품이건 일본으로부터의 밀수품이건, 한국회사가 복사를 한 제품이건, 암시장에서 샀건 간에) 타국, 더 자세히 말하자면 선진 산업국가의 도구들이다. 기술자는 큰 돈을 들여 힘들게 도구를 사들이고, 오랜 시간 다뤄왔다. 기술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화한다.

    여기서 우리는 ‘암묵지’를 떠올리지만, 그건 적합한 사유는 아니라 본다. 제일 먼저 사유해야 하는 건, 기술자-도구의 실제 쓸모이며, 기술자-도구의 연합이 무얼 했으며, 무엇을 어느만큼의 생산을 했느냐다. (대량생산된 도구를 각 사업장의 목표에 맞춰 개조하는 일은 작은 작업장에 국한된 건 아니다.) 청계천 상가가 호황이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 제조업 상가는 공장식의 대량생산은 아니어도, 상가 내부의 조직이 연합하여 어느만큼의 생산량까지는 이들이 대신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수출까지 염두에 두고 이전과 다른 규모로 대량생산을 하는 공장 위주의 현 사회구조 하에서 이들의 기술과 생산량은 적합하지 않게 된 셈이다. (질문을 늘어놓고,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를 못한다는 약점은 인정한다. 앞으로 더욱 더 고민하겠다.)

    암묵지와 평판? 이 공간에서의 암묵지란 평판이 아닐까 싶다. 자기 자신과 도구를 연결하는 때 어떤 도구가 적절한지를 아는 것, 누구에게 (전·후단계의 일을 맡길지 판단하는데) 필요한 것 역시 평판이다. 우리가 암묵지를 가시화하는 것은 그들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손기술’의 조명과 그 한계

    우리는 미국 스타일의 테일러리즘을 통해 그 작업장과 그 작동방식을 확산하고 적응하는 방식을 보았고, 포디즘을 통해 대량생산 방식의 확산 역시 알고 있다. 애초에 우리가 아는 기술의 현장은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앞의 작동방식 하 어딘가에 있으며, 이때 기술자들의 등장(성장)과 (국가적) 육성을 통해 이뤄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중요한 방식은 우수한 방식을 (국가라는 자장 아래서) 산업이 주도하여 기술자를 육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목도한 청계천-을지로 상가에서 이렇게 육성된 이들은 전기·전자의 일부 영역에 국한된다. 청계천-을지로 상가의 기술자는 이렇게 육성되지 않았다. 모범사례를 도입하는 방식보다, 이곳에서는 역설계(reverse-engineering)를 통한 개인적 습득이 주요한 기술 형성의 경로로 여겨진다. (우리가 흔히 아는 산업의 ‘역군’이라는 표현이란 국가가 주창한 생산이데올로기에 기댄 언어일 뿐이다.) 그들에게 설계(engineering)하는 몸을 익히라는 말을 하는 대신, 어떤 대안을 건넬 수 있을까? 사실상 젊은이들의 유입과 필요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여겨진다. 이때, 기술자들이 산업의 변화에 발맞추기 보다, 과거의 상태 그대로 지내면서 대상이 바뀌는 상황에 불과한 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다. (쉽게 말하자면 원청만 바뀐 건 아닌가?) 젊은이들의 ‘설계’를 위한 손기술과 기술자들의 ‘역설계’를 해온 손기술 사이의 거리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곰씹을 말과 나의 바람

    “청계천·을지로에 대규모 아파트 건설을 허용하고 남은 비좁은 땅에 아파트식 공장을 짓는다면 과연 산업생태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 우리는 대체부지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현 골목의 구조를 최대한 유지하는 리모델링형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산업생태계를 살리고자 했다. 한발 물러나 재개발을 인정하고 대체부지를 받아들인다고 한들, 산업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없는 한 우리에게 대체부지는 의미 없다.” <경향신문> 2020. 3. 29, “청계천을지로 산업생태계 살리려면”.

    “쫓겨난 자들은 공간·사회·경제의 구조적 변화로 인해 이런 변화에서 소외되고, 이들은 오직 ‘정치’의 영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공간은 지대와 임대료의 경제모델링이 만들고, 사회는 임노동관계에서 벗어난 젊은 자영업자와 개별 소비자들의 세상이 되고, 경제는 대기업 등 거대 경제주체의 혁신의 장이 되었다. 반면 정치는 지방자치로 언로가 넓어졌으나 주거지 중심의 투표공간은 상업과 공업지역을 공백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빨라진 리듬의 넓어진 개발지역은 ‘주거권 및 생존권 보장’이라는 기존의 정치적 메시지로는 대항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며, 변화를 만드는 경제·사회·정치를 아우르는 거버넌스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오마이뉴스> 2019. 12. 29, “을지로의 소위 ‘힙지로’화, 이의를 제기합니다”.

    늘 그렇듯이 기술자들을 ‘장인화’하고, 기술의 쓸모를 매번 이야기한다 해서 달라지는 건 별로 없다. 해야 하는 일이란 산업의 규모를 적정하게 계획하고, 기술자들이 살아갈 길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구자로서의 나는 여기서 무엇과 연결되어 있고, 무엇과 끊어졌나(혹은 멀어졌나)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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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준철 혹은 날아. 연구자이며 작가.

단행본으로 <가난의 문법>(2020)을 썼고, 학술논문으로 “정부의 ‘자활정책’과 형제복지원 내 사업의 변화”(2020) “청계천에서 난지도로 – 공간정보의 생산과 도시하층민 이동의 관계에 대하여>(2023)”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