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폐지줍는 일을 하는 노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기고] 폐지줍는 일을 하는 노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천만상상오아시스 오아시스레터, 2016/12/14)

연구자의 마음.

나는 어쩌다보니 노인의 일상생활을 탐색하고 있다. 2015년에는 『폐지수집 여성노인의 일과 삶』(서울연구원, 2015)을, 2016년에는 『빈곤한 도시노인과 지역 내 자원의 흐름』(서울연구원, 2016: 발간예정)이란 나름의 조사연구를 사회에 제출했다. 두 연구에서 빈곤을 다시 질문하고 싶었다. 예컨대 주민센터에 어떤 ‘신청서’ 용지를 들고 앉아있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녀들이 자신의 경제적 가난을 증명해내고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지위를 ‘타낸다.’ 그러나 소득으로 대변되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빈곤이 아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경제적 소득으로 빈곤을 구획화하는 행정의 소산을 목격했을 따름이다.

북아현동에서 다른 빈곤을 보았다. 서울의 다른 지역도 비슷하지만, 어르신들이 뭔가를 생산할 도리가 없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경쟁적인 신청률을 자랑하는) 동사무소의 노인일자리 사업이거나 박스나 종이를 줍는 일이다. 간혹 ‘장사끼’가 있는 어르신들은 동네에 찾아오는 야채트럭 앞에 앉아 호객을 하거나 배달을 해주면서 야채장수로부터 가끔 돈을 받기도 했다. 최근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게 빈곤의 한 얼굴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북아현동의 경우에 동네의 상당한 지역이 재개발되었고, 나머지 지역도 재개발이 된다 안된다는 말이 많다. 재개발이 이뤄진 지역에서 살다, 건너편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돈을 많이 벌었으리라 떠들지만, 자녀들에게 물려주거나 그간 살며 가진 빚을 갚는 등의 이런 저런 이유로 가진 돈은 정작 얼마 없다. 어느만큼 보전하고 있다해도, 이주한 지역이 재개발의 광풍에 휩싸이게 된다면 그/녀들은 갈 곳이 없다. 애초에 큰 액수의 보상금을 받지도 못했거니와, 이주해와 전세나 월세를 전전하는게 일쑤니 말이다. 청년들의 불안정한 주거만큼이나 노년의 주거 역시 불안정하다. 불안정한 주거란 빈곤의 다른 얼굴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들은 폐지를 줍는다. 폐지수집 노인에 대해 일반적인 정의는 따로 없다.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자면 폐지를 줍는 노인일테다. 하지만, 그/녀들이 왜 이 일을 하는지를 반영한다면 “몸과(/혹은) 마음이 불안정한 처지로 인해 골목에서 재활용품을 주워 파는 노인”이 정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빈곤이란 몸이나 마음이 불안정한 처지를 가리켜야 한다. 연구자로 나는 이런 빈곤을 어떻게 상대할지가 고민이었다.

왜 여성노인이었냐고? 힘이 달라서!

우선, 골목을 돌아다니며 폐지수집을 하는 노인을 만나보기로 했다. 그 중에서도 여성 노인을 지켜보기로 작심했다. 신체적 성차란 늙어가는 노인들 사이에서 극명하다. 고물상 근처에 죽치고 앉아 있던 며칠 동안 알게된게 있다. 첫째, 노인 남성들과 노인 여성들은 모아오는 수집량이 달랐다. 남성들 사이에서 가장 못 모은 양이라 해도, 여성들 사이에서는 가장 많은 양을 모으는 수준이었다. 이건 수집에 사용하는 도구가 달라서이며, 근력의 차이 때문이더라. 수집도구가 극명하게 차이난다. 남성노인 대개는 리어카를 끄는데, 간혹 리어카에다 오토바이를 연결하는 경우도 있고, 혹자는 오래된 자동차를 끌고 다니며 시트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온갖 고물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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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인의 경우는 등에 가방을 짊어지는 사람, 노인용 보행기나 카트에 고물을 넣는 사람들이 많고, 리어카를 직접 끄는 사람은 남성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노인 남성 가운데 노인여성처럼 노인용 보행기나 카트를 가지고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비해, 여성노인들은 카트를 끌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흔히 가지고 다니는 알루미늄으로 된 카트 말이다. 리어카를 끄는 사람들은 대개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양을 주워다가 단시일 내에 파는 사람이다. 생계를 위하는 경우가 많다고 여겨지는데, 카트의 경우는 어딘가에 모아다가 어느만큼의 양이 될 때, 고물상에 가져가거나 나카마라 불리는 사람들을 불러다 판다. 알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왜냐하면 활동하는 시간대가 너무 다양하고, 공간에 있어 노동의 시작지점과 끝지점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동네에 점조직으로 된 어떤 거대한 그룹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새로운 얼굴들을 마주했다. 나로서는 미칠 일이었다. 특히 어르신들의 야밤 행렬이 이어지는 지경을 목도하는 건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새벽에 거리로 나선 노인들은 생활의 곤궁함 때문에 잠을 포기하고 골목에 나선다. 새벽이란, 이때엔 나와야 목표한 양을 채워 하루살이를 위한 생계비를 벌 수 있다는 노인들과 아직도 목표한 양을 채우지 못해 집에 들어가지 못한 노인들의 시간이다.

골목의 풍경: 박스와 노인.

여성 노인들이 줍는 건 주로 박스와 신문지였다. (간혹 옷가지나 신발을 줍기도 하는데, 팔 요량으로 줍는 건 아니다. 대개는 “이 좋은 걸 왜버려”라 혼잣말을 하며, 세탁하여 사용하거나 근방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젊은이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노인들이 박스를 줍는 이유는 단순하다. 골목에 박스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더 생각해보자, 우선 박스의 행방부터. 사람들 대개는 박스를 유용하게 생각한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뭔가를 주문했을 때 박스 포장이 되어야 파손없이 안전하게 배송된다고 생각하며, 제조업체나 운수업체 입장에서는 세기에 쉽고 저장이 간편하며 옮길 때에는 동일한 행동으로 시간을 줄일 수 있고, 운반과정에서는 상품의 손실을 줄이고 하나라도 실을 수 있다. 박스를 이용해서 포장하고 배송하는 건 분명 효율적이다. 이렇기에 박스 사용량은 끊임없이 늘고 있다. 제 쓸모를 다한 박스는 어떻게 될까? 바깥에 내다 버려진다. 더군다나 좁은 집에 사는 사람들이나 매일같이 박스가 들어오는 상점은 실내에 박스를 보관했다 정해진 배출일에 내놓는 일이 거의 없다. 이렇게 노인들이 주울꺼리가 골목에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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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재활용을 안하고 마구 내다버리는게 폐지수집 노인을 양산하는 주된 원인이라 할 수는 없다. 재활용품의 수거체계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질문을 던져보자. 예컨대 아파트 단지와 같은 공동주택에는 노인들이 가질 않는다. 왜냐면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에는 경비원이 관리하는 재활용품 분리수거함이 있다. 노인들이 그 수거함의 고물에 손을 댔다가는 볼썽사나운 꼴을 당한다. 골목의 경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치단체의 조례에 따라, 단독주택이 밀집한 지역에는 집의 문 앞에 박스와 같은 고물을 내놓는다. 수거하는 시간이 되기 전까지 박스와 고물들은 골목에 놓여있다. 노인들은 이때를 노려 운반도구를 끌고, 폐지나 돈이 될법한 고물을 줍는다. 이렇게 여성노인들은 골목을 헤맨다.

최근 몇 지역에서는 시범사업으로 ‘재활용 정거장’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아파트처럼 보관과 정기적인 수거를 할 수 있게끔 준비한 사업으로, 정해진 날이 되면 환경미화원이나 대행업체가 가져간다. 얼핏 그럴 듯 보인다. 게다가 재활용 정거장의 경우에 정거장관리사가 있는데, 관리사들은 한 달에 이십여만을 받고, 일주일에 수거일이나 정해진 날에 나와 분류를 할 뿐이지 관리를 매일같이 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관리사가 없는 때를 골라, 어떤 노인들은 재활용정거장을 ‘털기도 한다.’ 이렇게 폐지수집 노인들은 ‘자원순환 정책’이라 불리는 재활용품 산업의 끄트머리에 위치한다.

한 아저씨는 “할머니들이 있기 때문에 동네가 깨끗해져요. 사실 할머니들이 힘들게 일하는 건 맞지만 널브러진 쓰레기가 없는 건 그분들 덕”이라 내게 말했다. 그러나 하나의 책임전가다. 게다가 행정의 빈틈을 그/녀들이 대신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이에 대해 제안을 하라면, 집 안에 재활용품 보관소를 두는 제한이 필요하지 않겠는지, 혹은 고물들이 골목에서 굴러다니지 않게 보관함을 곳곳에 더 늘여야 하고, 공동의 관리가 필요하다. 집어가는 공간보다, 공동의 작업장으로 만들 궁리가 필요하다.

노인들에 대한 말들

누구도 노인의 삶을 선택해서 경험할 수 없는데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노인의 생애를 살펴볼 수 없기에 지금 여기의 노인을 잘 알지 못 한다. 그럼에도 노인의 폐지(고물) 수집에 대해 두 가지 유형의 반응을 보인다.

어떤 사람은 “딱히 불쌍하거나 안됐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오히려 아침 ,저녁 출퇴근 시간에 안그래도 좁은 도로 길 막히게 차선하나 떡하니 차지하며 리어카 끌고 가는 거 보면 참 몰염치한 이기적인 노인들이란 생각이 든다. 본인 한명 때문에 바쁜 시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 손해를 봐야 되는 거냐?” 아마도 여기에서는 길을 막는 일에 대한 불만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지 폐지수집노인에 대해서만 이렇게 생각할까? 횡단보도가 아닌 무단횡단을 하는 노인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는 사람들이 많다. “역시 노인들이란”같은 류의 반응의 뻔한 형태가 아닐까? 이 구도는 꽤나 전형적이다. “열심히 살지 않은 젊은 날의 결과”라며 가타부타 원인을 설정한다거나, “자녀와의 어떤 문제”가 있다며 가정의 결과로 돌리고 만다. 즉, 개인의 잘못으로 잘 못된 노후를 보내는 개인이라고 문제화하는 방식일 따름이다.

또 다른, 인도주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2016년 4월, 폐지수집하는 노인들을 다룬 한 신문기사 아래에는 여러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이 중 상당수는 기사가 보고하는 노인의 삶을 잔인하고 비참하게 여기며, 연민을 느끼고 심지어는 정부에 책임을 묻는 댓글들이 여럿 달렸다. “이분들도 그 누군가의 부모님이실 테고 또 어느 누군가의 우리의 미래 모습이 아닐까요? 그럼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우리 모두가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텐데.” 물론 가슴이 아프고 눈물 나는 일이다. OECD 가입국가가 될 정도로 성장했으나 “위험에 노출되고, 저임금에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는 세상이다. “폐지 한 장, 빈 병 하나라도 쥐어드리는 따뜻한 세상이” 오길 바라기도 한다. 더 나아가 “정부”의 책임을 묻는다. “노인 부양문제는 그간 사회를 위해 공헌한 분들에 대해 정부로서 그에 합당한 노년생활을 보장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는 복지문제와 차원을 달리하는 정부의 의무가 아닌가?”라 묻는 것처럼 말이다.

빈곤의 쓸모를 되짚어보자.

이런 말들 앞에 서면, 지그문트 바우먼이라는 작가가 제기한 “빈곤의 쓸모”라는 주장이 떠오른다. 특히, 인도주의적 반응에 대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다음 부분을 같이 읽어보자. “빈곤층을 인도주의적 관심의 대상으로 제시할 경우, 이들이 처한 운명의 잔인함과 냉혹함에 분노하게 되는데 이렇게 분출된 분노는 안전하게 자선활동으로 전환”된다. 그러나 나는 현재의 한국사회에서는 다르다고 파악한다. “안전하게 자선활동으로 전환”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경쟁으로 점철된 사회에서 자선활동은 ‘기부금 영수증’과 ‘착한 사람을 증명하는데’ 불과하다면 오만일까. 어쨌거나 여기에서 더더욱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빈곤의 쓸모”다. 사회에서 ‘빈곤’은 분명 쓸모가 있다. “세계의 빈곤층과 한 나라의 빈곤층은, 일자리가 있고 정기적으로 소득이 있는 이들의 자신감과 의지를 매일매일 조금씩 좀먹는다. 빈곤층의 처지를 보고, 빈곤하지 않은 계층이 체념하게 되는 현상은 이상할 것이 없다. 제대로 생각이 박힌 사람이라면 빈곤층의 처참한 삶을 보면서 여유로운 삶은 보장된 것이 아니고 오늘 성공했다고 내일 실패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게 타당하다.” 이, 인도주의적 말이란, 다소 냉소적으로 보자면,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자신의 상태를 상기하거나 (그 상태에서) 벗어나겠다(거나 진입하지 않겠다)는 일념을 가지는 쓸모 정도가 아닐까. 그래서 “조용히 지나쳐 버리고 덮어”버리는 “잘못”이나 할 뿐이지, 사태의 개선에 애쓰는 경우는 적다. 다시 말하지만, 사회체제의 불안정함과 미비함을 깨닫는 것처럼 보이지만, 되려 자신의 상대적 안정감과 불안정에 대한 두려움을 상기할 따름이다.

조사를 하며 만난 노인의 불안정한 삶과 그/녀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어설프지만 정리해보았다. 마지막으로, 나를 막막하게 만든 한 노인의 말을 같이 읽어보자 권한다. “자기가 조금만 노력하고 아침에도 잠 안오면 일찍 댕겨봐. 많이 내놔. 그러니까 지금은 부지런하면 얼마든지 살아.” 이 앞에서 우리의 안쓰러움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 그/녀들을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지를 다시 생각해보자. 그/녀들은 나름대로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연구도, 행정도, 혹은 남 몰래 가진 사소한 감정에서도 말이다.

Junchol Kim So

도시 연구자, 서울을 살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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