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것을 누가 치우는가

<평화저널 플랜P>의 12호에 연재한 글입니다. 원문은 <평화저널 플랜P>를 확인해주세요. 책 읽으러 가기

도시개발이라는 ‘진보’와 그 ‘낙진 

근대가 남긴 것은 도시의 진보였을까? 도시개발이라는 ‘진보’가 개인의 생활 개선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도시개발은 시민들 대다수가 산업과 과학기술의 효과를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특히 시민들은 거대한 건물이 상징하는 도시발전을 믿으며, 쓰레기 처분장이나 오물처리장, 공공시설과 장비, 상수도와 하수도 등의 사회기반시설(mega infrastructure)을 확보해 ‘발전’을 이뤘다고 믿어왔다. 이런 사정에서 오늘 다룰 ‘쓰레기 처리’는 도시개발과 인구증가 사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새로운 사회문제였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쓰레기는 가정에서 배출하고, 업자가 운반해 간 후, 정부가 마련한 소규모 매립지에 묻으면 끝이었다. 지금의 표현으로 ‘재활용’에 대한 필요가 그리 높지 않았다. 상황이 변한 건, 서울의 인구가 증가하며 거대한 건축물이 늘어나면서부터다. 매립으로 대표되는 쓰레기 처리의 종결 과정에 변화가 필요했다. 변화의 시도는 난지도에 대규모 매립지를 설치하면서 시작됐다. 전문가들은 선진 국가들의 ‘재자원화’ 모델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도시 정부는 이에 관한 통계 지식 수립과 실제 모델을 수립했다. 이런 시도는 1993년 쓰레기종량제 시행과 분리수거제도로 실현됐고, 이로 인해 우리는 현재 재활용을 중심으로 하는 ‘자원순환’이라는 세계에 안착했다. 

아파트도시의 탄생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건설된 건 1970년대 여의도에서부터였다. 아파트 시대를 본격적으로 도래한 건, 1970년대 현재의 강남 일대가 개발된 이후부터였다. 강남의 개발은 현재 한국의 여타 도시가 따라 했고, 많은 이들이 개발을 통해 부를 획득하는 투기모델의 시작이었다(박배균 외, 2017). 이 강남지역에는 대개 고층 아파트 단지가 형성됐다. 개발의 순서는 1975년 8월 반포와 잠원을 시작으로, 9월 제3한강교(성수대교)에서 영동교 사이의 청담, 도곡, 서초 등이었다. 이듬해 건설부 장관인 김재규는 잠실(74만 4천 평), 반포(166만 7천 평), 압구정(36만 평), 청담(11만 1천 평), 도곡(22만 평)을 아파트지구로 확정했다. 대규모 아파트단지의 건설은 강남지역의 인구수 급증으로 이어졌다. 1975년 강남의 아파트가 총 903동이었던 데와 비교해 , 1990년에는 총 70,790동으로 늘어났다. 강남구로부터 분리한 강동구(1979년)와 서초구(1988년)와 송파구(1988년)까지 아파트 동 수를 모두 합치면 232,232동으로, 당시 서울 아파트의 44%에 달했다. 동시에 강남지역의 인구는 1975년 32만 명에서 1990년 205만 명으로 상승했고, 서울 전체인구 5명 중 1명이 강남4구(강남구·강동구·서초구·송파구) 지역에 거주했다.

그러나 개발의 시작은 서울의 쓰레기 처리로부터 시작됐다. 영동과 잠실 등의 ‘구획정리지구’ 개발사업은 공사 당시 서울 전역에서 발생한 쓰레기를 매립하며 시작됐다. 쓰레기를 성토재(盛土材)로 사용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시의 입장에서 배출된 쓰레기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고, 동시에 공사에 쓰이는 매립토 구입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69년, 영동1지구 개발의 장소인 서초와 양재의 택지 조성에도 쓰레기가 매립됐다. 손정목은 “1973년, 구의지구 개발사업에서 서울시가 연탄을 비롯한 쓰레기를 가져다 택지를 메웠고, 그 위를 지하철 1호선 공사(1971-1974)에서 나온 흙으로 덮었다”고 밝혔다. 잠실주공아파트 지반의 중층에도 쓰레기가 매립되었다. 실제로 1970년대 중반 잠실개발 초기에 입주한 주민들은 주변 건설 현장에 매립된 쓰레기로 인해 악취와 해충으로 고생했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1970년대의 개발사업, 더구나 (더 밝혀야겠지만) ‘강남’의 아파트들 역시 쓰레기의 매립지 그 위에 서 있다. 

버리는 도시와 치우는 도시

택지개발이 끝나가자, 공유지에 매립하는 방식은 한계에 다다랐다. 서울시는 이러한 상황에서 비료화와 소각을 택하는 선진국의 사례를 검토했지만, 문제는 서울시의 쓰레기 성분에는 연탄재가 많아 마땅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1971년 서울시는 “하루 600t 분량의 쓰레기를 처리할 수 있는 소각장과 2만 6천㎡ 규모의 쓰레기 매립처분장”을 마련하겠다는 발표를 내놓는다. 끝나지 않는 쓰레기의 문제는 사회를 동요하게 했다. 매년 시청의 청소과의 인력과 장비와 시설을 개선하고, 확보했지만, 결국 매립을 위주로 한 쓰레기 처리는 결국 더 큰 매립장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1977년 8월 3일, 갑작스레 난지도가 ‘쓰레기 매립지’로 고시됐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변 남북에 조성된 새로 도로는 쓰레기가 동쪽 도시로부터 서쪽 변두리인 난지도로 이동할 수 있게 했다. 한강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지었던 제방은, 순식간에 서울의 동쪽에서 발생한 쓰레기가 트럭에 실려 (재빠른 속도로) 서쪽의 난지도로 이동하는 길이 됐다. 이 쓰레기에게 난지도는 종착역이면서 동시에 환승역이었다.

쓰레기와 쓰레기를 줍는 사람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만들어진 대형 매립지는 도시에서 쓰레기를 처리하는 방법을 도시 바깥으로 떠넘겼고, 또한 처리하는 일 역시 도시에서 밀려난 이들에게 떠맡겼다. 다시 말하자면 난지도의 쓰레기는 중산층화되어가는 도시가 만든 쓰레기이며, ‘한강의 기적’이라 불린 경제적 성장에 가려진 것들이었다. 도시 사람들이 버린 걸 묻고 쳐낸 건 도시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몫이었다.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은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의 난쟁이 가족의 미래였다. 연이은 판자촌 철거는 도시 하층민의 불안정한 주거, 불안정한 일자리로 이어졌다. 판자촌 철거로 떠돌던 사람들, 그중에서도 트럭으로 쓰레기를 부어 땅을 다지는 현장에서 폐품을 줍던 넝마주이나, 혹은 거리의 넝마주이들이 난지도로 몰려들었다. 계절에 따라 일이 들고나는 날품팔이를 할 바에야 계절에 상관없는 쓰레기 줍기를 하겠단 심산이었다. 혹은 부랑인으로 몰려 자칫하면 수용될 위험을 감수할 바에야 도시의 버려진 곳으로 향하겠다는 이들도 있었다.

1980년대 초 난지도의 동쪽 산 위는 서울시의 구 수만큼의 구획이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난지도 넝마주이들은 ‘권리금’을 내면서 자신이 재활용 가능한 자원을 주울 수 있는 구역을 샀다. 특히 동쪽, 서울시청의 트럭이 드나드는 곳에서 가장 비싼 건 ’강남구‘였다. 강남의 고물상, 혹은 강남구청의 위탁업자들이 내보낸 쓰레기를 ’뒤지는‘ 값이 가장 비쌌다. 주민들이 ’강남구‘ 땅에서 가장 많이 노리는 건, 종이나 플라스틱으로 된 ’우유갑‘이다. 앞서 고소득층 가정에서 가장 많이 배출되는 쓰레기가 ’폐종이‘였는데, ‘우유갑’은 개중 하나였다. 

난지도라는 상징 

‘1993년 난지도의 매립이 종료될 때까지 15년 동안 98m짜리 산 두 개가 생겼고, 그 총량은 최소 9,200만 톤이었다. 이 쓰레기는 모두 서울 안에서 (그리고 난지도 바깥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중 상당수는 연탄재였고, 나머지는 새로운 시대의 유행과 필수품들이 차지했다. 난지도는 한국의 도시가 가진 중심과 변두리라는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중심부의 경제를 작동하기 위해 변두리에 중심부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양극화가 당연하다 여기는 현상이다. 신도시의 하층계급은 마치 더러워진 쓰레기통과 같은 신도시 내부를 비워 깨끗하게 해야 했고, 매립지의 하층계급은 신도시에서 건너온 쓰레기를 차곡차곡 쌓는 과정서 ‘돈이 될’ 재활용품을 주워다 ‘자원순환’의 구조로 돌려보내는 일을 했다. 

난지도를 렌즈 삼아 2022년의 지금을 다시 보자. 서울과 난지도의 관계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관계로 바뀌었다. 난지도 매립지는 인천의 수도권 매립지로 바뀌었고, 쓰레기 산 넝마주이들의 자리는 각 시·구의 재활용 선별처리장의 노동자와 비수도권의 쓰레기 중간처리업체로 바뀌었다. 여기서 벌어지는 일은 과거와 다를 바 없다. 여전히 서울은 쓰레기를 배출만 하지 처리하지 않는다. 인구 67만여 명 제주도 안에서 한 해 재활용 처리되는 폐기물의 양 25만 톤이 인구 961만여 명 서울이 처리한 16만 톤보다 많다. 서울의 쓰레기는 이제 인천과 경기도, 강원과 충청 어딘가에서 처리된다. 쓰레기를 배출한 서울 사람들은 어떤 불편도 감수하지 않으며 다른 이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즉, 1970년대에 강남의 형성 과정에서 생겨난 ‘난지도 체제’는 여전하다. 고급 주택 밀집지 바깥으로 쓰레기 처리장을 떠밀고, 그곳에서의 처리를 불안정한사람들에게 떠미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물론 쓰레기를 줄이는 것이 급선무인 시대다. 그러나 쓰레기의 처리를 다른 지역과 다른 이들에게 떠밀지 않을 고민 역시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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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준철 혹은 날아. 연구자이며 작가.

단행본으로 <가난의 문법>(2020)을 썼고, 학술논문으로 “정부의 ‘자활정책’과 형제복지원 내 사업의 변화”(2020) “청계천에서 난지도로 – 공간정보의 생산과 도시하층민 이동의 관계에 대하여>(2023)”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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