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가난을 선별하지 말라

진실의 힘 뉴스레터, 2021년 1월 19일.

얼마 전 사회에 제출한 『가난의 문법』은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한국사회에서 가난의 모습은 늘 변해왔다.” 반면에 가난이라는 현상에서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바로 국가의 자세다.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국가는 가난은 개인의 탓이며, 국가가 제공하는 ‘기회’를 통해 정상적인 국민으로 변신하라고 요구했다. 대개는 국가가 제시한 갱생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일한 만큼 돈을 받아 가게 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취로사업에 참여했다. 사정이 극심한 경우에야 최저의 생계비를 제공했다. 우리는 이런 프로그램을 두고 흔히 ‘선별적 복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물어야 한다. 가난은 ‘개인의 탓’이기만 한가? 국가가 제공하는 ‘기회’는 우리에게 능력을 줄까? 만약 정신과 신체가 질병의 경계에 놓여 있거나 노화로 일을 할 수 없는 사정이라면 어떻게 할까? 국가의 ‘선별’ 프로그램은 가난에도 ‘정상’적인 가난이 있다고 여기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든다.

한국사회에서 가난은 줄지 않았다. 여전히 모든 세대에서 불평등이 문제다. 노인을 두고 가난의 상징이라기보다 불평등의 정도가 가장 큰 대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노인의 가난은 지금껏 여러 책에서 다뤄졌다. 구술생애사작가 최현숙의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2013), 『막다른 골목이다 싶으면 다시 가느다란 길이 나왔어』(2014), 『할배의 탄생』(2016), 출판 후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켰던 조 모의 『임계장이야기』(2020), 기자 이문영의 『노랑의 미로』(2020), 필자의 『가난의 문법』(2020)까지. 여기서 소개한 책들은 국가의 미진한 책임과 개인의 억척스러운 노력, 끝나지 않는 노력을 드러냈다. 앞의 책을 읽다 보면, ‘선별적 복지’는 사회의 빠른 변화에 비해 대처의 속도가 느리다는 생각이 든다. 국가의 ‘선별적 복지’란, 국가가 책정한 기준에 의해 수혜자를 가누게 되는데, 이 과정에 소비되는 시간과 그 능력의 한계로 가난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각지대가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지금-여기 노인의 가난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노인들의 특징을 먼저 살펴보자. 지금의 노인들은 양극화가 가장 심한 세대다. 또 생활과 사유와 습관에 있어 전통과 근대를 동시에 살고 있으며, 일부는 지체된 채 살고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사회적 합의로 생산인구(만 15세-64세)에서 벗어나 경제활동을 면해야 한다고 여겨진 대상이다. 그리고 신체적 노화에 따라 소수자에 속하게 될 가능성도 높다. 특히, 가난한 노인들은 사회적 합의와 상관없이 일해야 하며, 노화와 질병으로 소수자로 지낼 수도 있고, 전통과 근대가 뒤엉킨 빠른 변화를 견뎌야 하는 존재들이다. 게다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거나 사회복지 자원을 이용할 때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처지로 살아간다. 이런 처지에서 벗어나려 국가에 도움을 요청할 때면, 노인들은 자신이 지닌 ‘가난의 자격’을 인정받아야 한다. 수입이 얼마 이하인지, 가족이 없는지, 건강이 얼마나 나쁜지 등과 같은 자격 조건 말이다. 그렇지만 ‘선별’된 이들만이 일을 하거나, 각종 급여를 받는다. 사각지대란 전달체계가 빈 지점이라기보다 경쟁에서 이탈한 이들이 머무는 각자도생의 영역으로 볼 필요가 있다.

왜냐면 국가는 ‘사회’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눠 관리하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국가는 복지에 있어, 정상적인 모델을 상정했고, 비공식적인 것을 정상화하려는 방식을 택했다. 이 비공식적인 것의 정상화란 국가의 역할을 세분화했고, 자원을 분배해 산업이 그 일을 위탁해 수행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난다. 오래된 문제 하나를 먼저 살펴보자.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1982년, 국가는 “직업보도훈련을 실시”해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하게 하는 목적을 지닌 부랑인 수용시설을 대폭 확대했다. 모두가 잘 아는 그 ‘형제복지원’이 이 정부가 제시했던 우수한 사례였다. 결과는 알려진 대로, 시설은 수용자를 감금해 사적 이익을 취득했고, 국가는 시설을 동원했고 이로 인한 문제에 대해서는 묵인했다. 현재는 모두 해결되었을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걸 모두 알고 있다. 국가의 선별적이며 개인을 개조하겠다는 방식이란, 그 경제적 ‘합리성’을 통해 정책과 산업을 유지시키는 걸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선례를 딛고 우리는 국가가 하층민을 보호하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끊임없이 되물어야 한다. 가난한 여성노인들은 대표적인 대상이다. 가난한 여성들의 처지는 대개 ‘비정상’적으로 여겨진다. 국가에서 제시하는 경제적 활동을 하지 않고, 현모양처인 가정주부로 남편과 자녀 그리고 손자녀에게 모성을 수행해야 한다는 정상-모델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최근 여성노인이 손자녀를 챙기는 ‘돌봄노동’은 중산층 이상에게서 이뤄지는 ‘정상적’ 모델로 여겨지는 경향 역시 존재한다.) 여기서 벗어난 이들, 즉, 젊어서 사정에 따라 일을 했거나 나이 들어 일하는 이들은 그 자체로 ‘비정상적’인 존재들이다. 여성의 정상적인 생애경로라 ‘여겨졌던’ ‘출생-(최소한의) 진학-졸업-결혼-자녀 독립-사망’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마당한 (일)자리가 없다. 자연스레 가난한 여성들에게 경력과 기술의 숙련이란 없을 가능성이 높다. 재활용품을 수집하는 일이란, 이 여성노인들이 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의 처지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복잡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다. 특히 국가와 사회가 (헌법에서 천명한대로) 개인을 어떻게 ‘보호’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때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특히 ‘선별’을 중심으로 ‘정상화’하겠다는 국가의 독점적인 노력은 그들의 목표와 결과를 다르게 만든다고 여겨진다. ‘비정상의 정상화’는 실상 ‘(또 다른) 정상의 비정상화’로 이어질 가능성 역시 있다. (형제복지원에서, 재활용품 수집 노인에서 우리는 그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우리는 “정부의 독점을 날마다 조금씩 탈취해야만 한다.”는 말을 고민해야 한다. 이 ‘탈취’란 국가를 무력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국가가 행정의 효율을 위해 사람을 선별하기보다, 인민이 ‘보통 사람’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최소의 조건을 갖추게끔 국가의 역할을 관리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여겨진다.

Junchol Kim So

도시 연구자, 서울을 살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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