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오물의 처리: 비료화, 병인화, 하수처리화

  1. 들어가며

오물의 문제는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쓰레기와 똥오줌의 수거·처분이란 시 당국이 개입할 ‘행정’의 문제이다.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수거란 종이 몇 장으로 요약되는 ‘개요’와는 다르다. 당국이 고용한 청소부와 계약·관리하는 민간업자가 끊임없이 대로의 쓰레기를 수거·처분해야 한다. 모든 일을 다 알 수는 없을지라도, 당국은 수거·처리 과정을 계획하고, 감시하고 통제할 방안을 마련한다. 분명, 여기에는 도시 기반시설을 설치하는 비시장적 개입 역시 가용해야한다. 도로와 분뇨저장통과 쓰레기통, 운반도구, 쓰레기와 분뇨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장소, 각 단계 마다 정기적인 소독 등의 개입이 필요하다. 그리고 정부 당국의 뜻과 다른 사적인 개입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영역이기도 하다. 더구나 민간업자에게 위탁을 하는 경우에는 허가받은 자와 허가 받지 않은 자 사이의 알력이 생겨나고, 정부는 이러한 사안에 대한 통치력을 입증해야 한다. 이처럼 쓰레기와 똥오줌의 문제란 근대 도시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업 중 하나이다. 

서울특별시 중구 분뇨 수거 처리 (1962)
출처: 서울기록원

오물이란 누가 치워야 하는 것인가? 도시의 위생을 두고 처리 문제를 고민하는 빠리의 사례를 보자. 18세기 프랑스의 사회개혁자들은 프랑스 혁명 이전에 몇 가지 안을 내놓은 바 있다. 한 콩쿠르에서, 어떤 신부는 ‘거지들에게’ 맡기자 하고, 피에르 쇼베는 극빈자와 장애인과 노인을 동원해서 정부가 그들에게 쓰는 비용 일부를 대신하거나 벌충하게 하자 주장한다. 화학자로 잘 알려진 라부아지에는 그들에게 나귀나 말이 끄는 수레를 배당하고 도로 위의 오물을 수거하여 처리장으로 이동하게 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새로운 안들은 아니었다. 이미 벨기에 브뤼헤에서는 노인들이, 스위스 베른에서는 도형수들이 도시를 청소하고 있었다. 정부의 입장에서라면, 쓰레기 뿐만 아니라 “도시를 더럽히는 불결한 영혼”까지 처리할 수 있는 방안이었다. 빠리 당국은 도시의 진흙이 필요한 농부와 마차꾼이 있는 마차를 소유한 민간업자에게 오물을 수거케 했다. 이들은 정부가 고용한 ‘수거 담당 청소부’와 함께 대로의 쓰레기를 수거해 처리장으로 옮겼고, 일부 쓰레기는 경매로 팔기도 했다(드 실기, 2014: 41-43쪽 참조).

현재 작업의 수준은 해방 후 법령과 행정문서를 통해 (1) 법제도의 변화, (2) 행정의 변화를 파악하고, 통계를 통해 (4) (유기)비료 산업의 변화, (5) 하수도 설치, 신문기사를 통해 (6) 수거업자들의 변화, (7) 당시의 실제 시세 등을 정리하는데 그치고 있으며, 식민지기 오물 사업 근대화와의 현재와의 연결성을 검토하지 못한 상황이라는 점을 밝힌다. 다만 이 작업은 해방 후 역시 1914년 이후 부영화된 오물 수거사업의 연장선이며, 그렇기에 1936년에 설립된 조선오물소제령 전후의 청소규칙의 연장선에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 다만 이전 시기에 비해 (1) 미국 중심의 공중보건학의 도입과 (2) 연합국을 통한 원조과정에서의 돈과 시설, 그리고 자력생산화, (3) 도시의 거대화 등이 존재한다는 점을 볼 때, 식민지기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만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1) 보건 위생의 강조는 행정에서 청소국의 설립에서 환경국으로의 변화 과정, (2) 시설의 다양성과 지속적인 확충과 신진자동차 등의 장비 생산, (3) 강남개발 및 대규모 주택단지와 상업단지가 등장한다는 것에 기인한다. 

서울의 똥오줌 치우는 일의 유형을 분류다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비료화와 하수처리화 사이에는 명확한 분절점이 존재하는데 이 사이에는 오물의 ‘병인화’라는 과정의 영향이다. 

(1) 비료화 (식민지기-1975)
(2) 병인화 (1960-1992)
(3) 소각화 혹은 하수처리화 (1976-현재)


2. 비료화

‘비료화’ 유형에서 똥과 오줌을 치우는 일이란 수거와 수거 과정에서의 불법사항 단속, 그리고 비료의 판매 등에 대한 기준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1) 일종의 사무위임 형태(민간단체 혹은 개인이 도맡아 하는 방식으로 변화)로 진행되었고, (2) 인근 상업농업과 연관된 비료사업으로 전환되는 형태였으며, (3) 정부의 비료시장 통제하에 존재했고, 비료 관수공급 일원화 정책에 의해 그 오물수거체제도 변화했다. 그렇지만 민간업자들은 여전히 존재했기에 1960년대에 그들이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인분 수거용 우마차 (전북일보, 1952)
인분 수거용 우마차 (전북일보, 1952)

이권사업: 우마차조합과 대한청년단

해방 직후, 서울의 혼란한 틈에 쓰레기와 분뇨를 치우던 이들은 식민지기의 우마차 조합이었다. 1949년 4월, 서울시 사회국은 쓰레기와 분뇨 수거를 대행 할 위탁기관을 지정했다. (이승만이 총재로 있는)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이 중구와 종로구의 쓰레기를 처리하고, 피한춘(?)이라는 자가 오물을 처리했다. 알다시피 오물 수거 사업은 이권사업이었다. 그리고 1950년 4월이 되자 시외에서 서울시내로 들어와 분뇨를 거두는 우마차를 금했고, 분뇨처분수수료(오물청소세)를 거두기 시작했다.

불법 수거업자 방지를 위한 흉장 (1963)
출처: 동아일보

비료공장 설립의 시도와 실패

1962년 흡인식차를 사용한 분뇨수거 대행업체로 “농협중앙회, 대한농비조합연합회, 자주비료, 제일유기 화학공업회사, 문창산업, 영안물산, 풍국비료, 우일건설, 미화기업, 한경화공주식회사, 김여준”을 가계약했지만, (서울시에 건설하기로 한) 공장건립금 5백만원과 흡인식차 도입금 1백여만원과 공장설계도 및 사양서, 대지확보 증명서 등을 제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부 해약했다. 이처럼 민간자본을 끌어 와 비료공장을 만드는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서울시는 국고보조를 얻어 비료공장을 세울 계획을 세웠다. 당시 상황으로 보면 분뇨 1천석을 처리하는 공장 4개가 필요한 상황인데, 우선 1개소를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그렇지만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명확한 분석은 존재하지 않지만, 당시 정부에서 추진하던 비료의 관수공급 일원화 정책과 (정부 뿐만 아니라 연합군의) 화학비료 우선 정책의 영향으로 별다른 타당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보건/위생의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크기 때문에 하수처리장으로 정책의 방향을 옮겨가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서울특별시 분뇨수거 과징수수료 규칙 (1968)
출처: 국가기록원

3. 병인화

분뇨 수거차량 검사 (신설동, 1962)
출처: 서울기록원

‘병인화’유형의 가장 큰 변화란 (1) 법제도의 변화, 담당 행정조직의 신설과 재편(1960년대 서울시 본청의 청소국 신설과 각 구청의 청소과 신설, 1970년대 환경국에 편입), (2) 시설 확충(흡인식분뇨수거트럭의 확보), (3) 보건 정보 전파(기생충과 전염병과 같은 보건 지식의 확산), 실질적인 비료 이용 금지(인근 상업농업지에 분뇨비료 사용 금지와 화학비료 사용 권장), (4) 다만 이 당시 서울시 위탁업체가 어떠한 방식으로 수거했는지는 다소 알기 어려운 면이 있다. 분뇨 처리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 온 것은 “분뇨의 비료화”가 금지되는 분위기였다. 1961년 “조선오물소제령”을 대체하는 “오물청소법”이 발의되었다. 더구나 1962년 농협이 등장해 비료의 인수/공급을 독점하고, 특히 1965년 12월 10일 정헌조 의원이 발의한 “기생충질환예방법안”이 수정통과된 이후, 서울 인근의 상업농가에서 채소비료로 분뇨를 쓸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물론 이에 이탈하는 겨우도 존재한다.)

한국 기생충 박멸협회 서울지부 결성식 (1965)
출처: 서울기록원

4. 하수처리

1970년대 초, 분뇨의 문제가 여전했고, 이는 사회적 문제로 대두됐다. 1970년대는 인구가 500만명을 넘어 선 시기였고, 도시의 모습 역시 1960년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1970년 박정희는 2873불을 얻어 위생적 분뇨처리장의 건설이 시급하다는 제안에 사인을 했고, 당시 분뇨 종말처리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연구자, 공무원, 시민의 제안에 연이어 오물처리장(하수처리장) 건립에 착수했다. 

하수처리 과정에서의 특징은 (1) 분뇨의 비료로의 이용이 아니라 분뇨의 정화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2) 행정의 변화의 시설의 설치가 이루어지며, 동시에 이전의 청소과의 분뇨처리 업무가 점차 줄어들었다. 행정의 입장에서 ‘수거하는 것’에서 ‘흘러와 정화해야 하는 것’으로 변화한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수처리 확산의 과정은 (3) 메가이벤트와 서울의 급격한 주택단지 개발의 영향이 컸다. 

청계천 하수처리장 조감도  (1974, 1976)
출처: 서울기록원

행정의 변화

“근대의 하수도는 생활오수도의 배제를 통한 공중위생 향상을 목적으로” 한다. 1918년부터 1943년까지 225㎞에 달하는 합류식 하수관로가 건설됐다. 

1973년 6월 8일 건설국 내 하수과가 설치됐다. 곧 1976년 12월 30일 규정에 따라 하수국으로 확장됐다. 이전까지는 건설국의 하수과로 처리했지만, 독립국으로 신설되었고, 하수행정과, 하수시설과, 치수과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최초의 도시하수 종말처리장인 청계천하수처리장(중랑)이 건설됐다. 3년 후인 1979년에는 청계천(중랑) 제2하수처리장을 건설했다. 그러나 각각 15만㎥/일, 21만㎥/일로, 1984년이 되어도 하수 일일 총배출량 256㎥의 14%만 처리하는 수준이었다.

메가이벤트와 하수도

올림픽과 같은 메가이벤트를 앞두고 강변북로와 강변북로 등의 도로시설이 건설되고 그 지하에 하수도 공사가 이루어졌다. 1980년대 들어 주택단지의 개발로 인해 동서남북에 주거지와 상업지가 만들어진 상태였다. 

1987년까지 난지하수처리장, 탄천하수처리장, 서남하수처리장을 건설하고, 기존 하수처리장을 확장하고, 1988년이 되어서야 200만㎥의 하수를 처리할 수 있었다. 1992년 총 4개 하수처리시설 증설공사를 시작하고 총 581만㎥/일의 용량을 확보했다. 


5. 나오며

도시에서 똥·오줌의 문제는 위생의 문제로 여겨진다. 동시에 행정력의 문제, 즉, 인력과 설비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다 이제는 한해 똥·오줌의 발생량과 (도시의 어 떤 시설에 의한) 처리량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그 누구도 묻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똥·오줌은 1990년대 중반부터 문제화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분뇨를 (개인적이 거나 조직적으로) 비료화하거나, 분뇨통에 저장하고 저장용량에 따라 혹은 정해진 시기에 따라 수거하는 방식에서 하수도와 하수처리장이 연결된 하수처리 시스템이 확충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똥/오줌의 쓸모를 가르는 일이기도 했다. 분뇨의 비료화는 10%대에 불과한 분뇨 수거량과 비료사용량의 미달이 문제가 되었다기 보다는, ‘기생충’과 ‘전염병’의 문제로 사용하면 안되는 대상으로 변환된 셈이다. 

이제 문제는 달라졌다. 기존의 민간업자들은 소각/매립이라는 선택을 하게 끔 요구가 바뀌었다. 행정의 입장에서는 모아둔 것을 수거해서 자원화하는 방식에서 흘려보내 한데 모아 정화하는 방식을 고안했고, 도시의 확장과 메가이벤트, 그리고 위생과 정화에 대한 논의가 정점에 이른 1980년대 하수처리 시스템이 안착했다. 이렇게 분뇨는 수거해서 ‘매각 혹은 자원화’하는 것에서 정화하여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단지 ‘물’로 환원하는 시대로 이행했다. 좋은 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똥/오줌을 ‘더러운 것’, ‘병인’으로 보는 시야의 온전한 승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부탁드립니다.
이 글은 12/7 사이언스월든 인문사회팀 “똥, 오줌 순환의 역사와 신화” 자리에서 발표된 자료를 기초로 합니다. 앞으로 (1) 연구논문으로 확장할 계획이며, (2) 사이언스월든 인문사회팀에서 준비하는 단행본에도 참여 할 예정입니다. 이 자료는 이후 결과물을 위한 준비과정의 부족한 소산일 뿐입니다. 인용과 전재를 삼가해주시길 바랍니다.

댓글 남기기

소준철 혹은 날아. 연구자이며 작가.

단행본으로 <가난의 문법>(2020)을 썼고, 학술논문으로 “정부의 ‘자활정책’과 형제복지원 내 사업의 변화”(2020) “청계천에서 난지도로 – 공간정보의 생산과 도시하층민 이동의 관계에 대하여>(2023)”을 썼습니다.

Nothing to see here.

Designed with Word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