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한 친구가 물었다. “(석사 이후 박사과정을) 그 좋다는 관악산 학교로 옮기든 강북으로 가든 유학을 가든 하지, 왜 이 학교에 남았느냐. 더군다나 사회학 한다며, 하필 역사사회학은 또 뭐냐. 앞으로도 먹고 살기 진짜 힘들겠다.”고. 별고민 없이 “그같은 지도교수가 없으니까, 뭐 학비도 싸고. 사람들이 이름도 모르는 삼류 처지라 해도, 나야 뭐 어차피 삼류였는데, 굳이. 나같은 삼류한테도 괜찮은 연구자 해보라 권하는 여기가, 그리고 그가 있는 곳이 제일이지.”라 답했다. 겸사겸사 몇 줄의 변명을 더 적어볼까 싶다. 연구자(지망생으)로 나는 어떤 놈인가. 그와 나는 어떤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나. 뭐 이런 내용을 빙자한 용비어천가이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나는 그의 말을 참 안듣는 녀석이다. 투박해도 좋으니 “자료에 천착”하자는 이야기를 “글 써서 생계 꾸리기 실험 좀 해볼게요”라 답하다 “엉뚱한 정책연구”나 하고 말이지. 내게 “세금 축내지 마라” 말해도 할말이 없기도 하다. 그가 보는대로 현재에 대한 연구는 시간과 관계에 쫓겨 꼬인 매듭을 만지다가 끝내기 마련이고, 실제로 그러했다. 수업 시간이면 뜬금없는 고민이나 털어놓아 난감하게 만드는데다, 밥을 먹다가는 애먼 문학사나 픙속사나 끄집어 내서 삼천포로 빠진다. 엉망진창인 “석사 논문 마무리 좀 하자”는 지도는 듣지도 않고, “넝마주이로 연구 발표할게요”라 통고나 하니, 지도하기 참 힘든 놈이겠다 싶다. 게다가 툭하면 아프니, “공부 잘 하고 있냐”보다 “건강은 어떻고”라는 물음이나 갖게 하는 걱정덩어리이기도 허다. (이건 친구들에게도 미안하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올해엔 건강해지자는 계획을 차근히 성사해가니 걱정 마시라.) 무엇보다 조선후기와 식민지기의 인구통치를 전공하는 그에게 (쓸모 없을) 잡다한 정보나 모아와 출판이니 잡지니 선교사니 재조일본인이니 하는 번외의 것들을 어설프게 묻기 십상인데다, 이전 시기 전공자에게 해방 후 어쩌고 저쩌고를 떠드니 얼마나 난감할까 싶다. 그래도 참고, 같이 뒤지고 고민을 하시니, 나로서는 (이 시대 이 땅에서, 누구보다 내게는) 제일인 지도교수란 생각은 입학 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그가 쓴 글의 몇몇은 (그에게 주-작업은 아니지만) 내 작업의 전범이다. 예컨대 <대지를 보라>와 시마 선생님의 연구노트 각각의 번역과 두 학술지의 역사 정리, 최인훈 작품에 대한 비평, 국제결혼-중개장치에 대한 추적, 그리고 오물 처리 체계에 대한 분석. 그는 글을 많이 생산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서로 다른 주제로 글을 써와서, 일견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지 않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근대(성)’를 놓고, 근대적 합리성’과 ‘실재적 실증성’을, 그리고 연구자의 ‘방법’을 두고 끈질기게 묻는다. 예컨대 한 글에서 그는 등록과 문서를 두고 ‘구성적 상상력'(네이션)과 ‘메마른 실증성'(국민)이 언뜻 겹치는 외연을 가진 듯 보이나, 이 당위의 상상이 현실의 제약과 충돌할 때 존재하는 간극을 캐묻는다. 이런 기조는 다른 글에서도 끊임없이 유지된다. 게다가 “대도시는 두 개의 상반된 얼굴을 갖는다 … 도시의 문명은 도시의 빈곤과 비참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란 사유는 내가 그에게 기댄 지점이기도 하다. 게다가 ‘행정’과 ‘통치성’의 문제는 그에게서 전해받았다. 가령, 앞의 문단은 그의 질문과 해석이며, 뒤의 문단은 내가 그를 좇아 만든 질문과 답이다.
[그] “똥오줌은 누가 쳐야 하는 것일까? 오늘날과 같은 분업사회에서는 누군가 그것으로 생계를 삼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똥오줌 수거를 시장에만 맡긴다면, 물리적 경제적으로 수거가 어려운 곳에는 당장 똥 오줌이 쌓일 것이다. 게다가 똥오줌이 쌓임으로써 생기는 보건위생상의 문제는 그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결국 쓰레기와 똥오줌의 수거 처분은 시 당국이 개입할 ‘행정’의 문제가 된다. 민간업자에게 일을 맡기더라도 전체 과정에 대한 지속적 감시와 통제, 시장적 개입이 필요하다. 요컨대 그것은 도로와 상하수도, 전기 같은 도시 기반시설의 일부다. 특히 쓰레기와 재래식 변소의 똥오줌 수거를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집집을 방문해야 한다. 늘 많은 노동력을 동원 관리해야 하고, 또 어느 골목 어느 한 집도 빠뜨리지 않도록 전체 체계를 면밀하게 계획 운용 해야 한다. 그것은 근대 도시행정의 가장 중요한 과업 중 하나이며, 근대적 ‘통치성(governmentality)’의 일부다.”
[나] “서울시는 자원순환 정책과 환경부의 “폐기물관리법”과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촉진에 관한 법률” 등을 통하여 재활용품 산업에 끊임없이 매개하고 있다. 아파트와 공동주택, 사업장이 밀집 한 공간은 정책이 원활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단독주택이나 다세대/다가구주택이 밀집한 공간은 다르다.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데다 정돈되거나 계획된 공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단독주택이나 다세대/다가구주택이 밀집한 공간은 폐지수집 노인들의 작업 공간이자 일터다. 정책과 제도의 빈틈이 만들어 낸 변종의 직업이라고 보아야 한다. … 폐지를 수집하는 ‘노인’의 공간은 한정되어 있다. 바로 공동의 쓰레기통이 없는 공간이다. (게다가) 폐지수집 행위는 힘든 일이지만, 분명 그/녀들에게 직업이다. 재활용품 산업의 첨병을 자처하고, 법과 제도의 빈틈을 메꾸며 노동하며, 돈을 벌고 있다. 그러나 제도와 산업 그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한다. 그렇기에 위험한 직업이다.”
그러나 현재로는 한계가 크기에, 이에 대한 역사를 훑을 요량이다. 이와중에 나는 그(와 그의 동료)가 넌지시 남긴 방편을 따른다.
[그] “다른 한 가지 결정적인 과제는 각자의 연구주제와 관련해서 과연 어디에 어떤 자료가 있고 그것을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 문제는 대개 지도교수, 선배와 동료 연구자, 선행연구 등을 통해서 해결해왔다. 나머지는 현장이 아니면 한 도서관에서 다른 도서관으로, 도서관 서가와 복사기 사이를 걷고 또 걷는 일이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거창하고 획일적인 ‘방법(론)’이 아니라, 마을 어른들께 인사를 어떻게 하는지, 같은 자료가 어느 도서관에서는 대출/복사가 되고 어디서는 안 되는지, 복사기와 카메라, 녹음기의 각 기능은 어떻게 쓰는지, 이미지 파일은 어떻게 이름을 붙여 분류/정리하는지 하는 그때그때의 깨알 같은 ‘노하우’다.”
여기에 그의 동료는 다음처럼 이어나간다.
[그의 동료] “연구자료의 수집과 정리과정에서 뿐 아니라 이론의 구성과 착안, 어떤 개념을 연구에 적용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과정, 해석이나 분석과정, 글쓰기와 제시, 그리고 발견술(heuristicss)의 모든 미세적인 수준에서도 연구자들은 사실 (공식화된 방법이 아니라) 방편들을 활용한다. 방편의 원천에는 계급이나 젠더의 위치가 부여하는 시각, 연구자의 생애사적 특이성, 인간적 품성, 상처나 트라우마, 삶의 체험들, 다른 분과 학문에서 빌려온 지식이나 관점 등 복합적 자원들이 존재한다. 이런 것들은 연구의 공식 방법으로 제시되거나 서술되지는 않지만, 실제로 서술되는 것들보다 훨씬 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와 그의 동료가 나누는 필담을 떠올리면서, 훗날 나는 그에게 어떤 동료가 될 수 있을지,를 자주 자문한다. 나는 그가 가진 고민의 핵심을 잇지는 못하겠고, 게다가 머리굵은 체 하며 논점의 몇몇은 (허망한) 반기를 들고 있으니 후계를 잇거나 그 다음이 될리는 만무하다. (유럽도 아닌 이 자격증 사회에서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그로부터 배운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그나마 그의 (역시 좌충우돌인) 방편을 들고 실패하며 놀아보면서, 그의 방편을 방법으로 이어나갈 궁리를 해본다. 이뿐이 내가 그에게 기여하고, 내가 내 방법을 찾는 길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본다. ㄱㅁㅅ 선생이 본 “재밌게 공부하는” 동력은 사실 (나보다 더 열심인) 그 덕이다.
혹자들은 그가 먹여살리지도 않는데,라 말한다. 사실 그렇다. 졸업한 선배/친구들을 봐도 그러하다. 그러나 그의 교수법과 존재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 (학생들) 사이에 (서로 말 못할 어둠의) 밀약이 있는 건 아니다. 그와 공부하는 시간은, (지나고보니) 온갖 고민들 사이를 오간 탐험이었다. 그 와중에 생긴 끈끈함이랄까. 버티는 건 내 몫이지 않겠냐는 좌절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몰래 쳐다보니, 그 역시 위태롭더라. 그래선지 우리는 당장은 어려워도, 어떻게든 버텨서 그의 동료가 되보자는 막연한 기대 하나나 잊지 말자고들 말한다. 가능하면 온힘을 다해 그를 넘어보자고. 그가 벼려놓은, (요사이에 보기 힘든 꽤 촌스러운) 집단 하나에 속해 있긴 허다.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불명하지만.
(이렇게 적어놔도 애틋하게 챙기는 사이는 아니다. 그저 답사 중, 군산에선가는 들국화 1집을 틀어놓고, 통영에서는 이선희 노래를 틀어놓고 말없이 맥주나 마시는 사이일 뿐. 다들 힘내자구요.)
#1
작업을 하다 끝없는 반복에 지치고, 막연한 미래 탓에 한껏 우울한데, 그래도 온힘을 다해 “연구자”로 버티는 그가 생각나 (게다가 친구/지인들이나 볼테니) 아무말이나 적어본다. 대학원 사회에서 (아주 드물게 복받은 기회를 잡은) 배부른 소리로 읽힐 수도 있을테지만.
#2
연구자(지망생)연 하는 놈 치고, 문장이 참 별로다. 아카데믹한 문장을 쓸 줄도 모르고.
#3
#4 에서의 ‘그’ 뿐 아니라, 내가 연구를 지속하는데 있어서 연구자로서 성장할 수 있길 바라는 가족의 힘이 도움이 된다. 언젠가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늘어놓겠다. 그리고 연구작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싸부들이 있다. ‘그’ 만큼이나 소중한 ‘그’가 또 있다. 지도학생은 아니나, 연구자로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고민하고 어떻게 버티며 살아갈지에 대해 전해주는 ‘그’ 역시 내 작업의 또 다른 큰 축이다. 여기에다 여러 분야 (연구자와 기획자) 동료들의 존재, 그들과의 수다와 판벌리기 역시 버티는데 중한 동력이다. 어떤 작업을 하는지 궁금해하며 이놈이 얼만큼이나 성장하는지 봐주는 친구들 역시 버티며 지속하게 하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