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동힙스터의 골목 관찰기다.
내 마음의 안식처, 호시절의 장소들인 홍대 앞.
그러나 이 모든 추억을 싸악- 잊게 만든 골목의 거치른 풍경들: 쓰레기차, 투기, 할머니, 박스, 이리, 택시.
공덕연구실에서 합정역까지 걷기로 했다. 합정역에서 603번을 타고 읽으려 장강명이 쓴 <한국이 싫어서> 한 권을 달랑달랑 들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걷기 시작했다. 공덕역에서 홍대역까지 경의선길을 따랐고, 홍대공항철도역에서 홍대 정문 쪽으로 옮겨갔다.
홍대공항철도역에 도착한 시간은 열 시 반쯤이었다. 철길 옆 골목으로 들어섰다. 마포구의 쓰레기 수거 위탁업체 차량이 골목 골목을 빠르게 쏘다녔다. 커다란 트럭 뒤에 매달린 사람들은 30대쯤의 세 남성이었고, 차가 잠깐 멈추자마자 두 명이 뛰어가 일반쓰레기가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뛰어와 트럭 안에 던졌다. 바로 트럭 뒤 발판에 올라서자마자 내리지 않았던 한 명이 “어이”라는 탄식같은 신호를 냈고, 차는 재빠르게 출발했다. 한 곳에 머무르는 시간은 30초도 안될 정도로,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더 걸었다. 호시절에 자주 드나드던 길을 오랜만에 걸으니 곳곳에서 만난 이들이니, 연인이 생각났다. 추억일뿐이다. 골목과 길에 남길 사적인 경험이라는게 드문 시절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차가웠다. 골목에 함께 있는 인간군상을 통해 마음이 동요될 일이 더는 없다. 아련한 노스탈지아, 사라진 그녀와의 행복한 시간처럼 촉촉하게 젖어들 일을 만든 일이 없을 것이다. 먹물되기를 연습하는 탓일텐데. 무엇-어떻게-왜라는 별볼일 없는 논리적 연쇄의 촉발대상으로나 세상을 보기 때문이겠다, 피곤하다. 더 큰 이유란 골목에서 생활한 일이 기억에 없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어린 시절 골목이 나오는 기억이 거의 없다. 모두 아파트, 복도, 혹은 아파트 옆 큰 길이 나의 공간이다. 골목을 찾게 된 건 열여덟, 도망가듯이 들어가 숨돌리던 광화문 근처에서였다. 어쨌거나 십년여 간의 골목-노스탈지아 감상이 사라졌고, 골목을 관찰대상으로 여기게 된 내 처지에 대한 변명이었다.
정문을 지나는 길에, 늘 그렇듯이 클럽 nb앞에서 긴 줄을 보았다. 20대로 보이는 남녀가 쭈욱 길게 늘어섰는데, 기다리는게 지겨웠는지 다들 지쳐보였다. 사람들은 “다른데 갈까”나 “오늘 물 별론데”같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한 40대 중반 쯤 되는 두 사람은 붉어진 볼로 퇴락한 클럽 중 하나인 스카에 들어가더라. 그곳은 한가한지 평일이라 그런지 일층 입구를 지키는 게이트 가드도 없었다. 땀이 적당히 났다. 홍대정문에서 상수역으로 가는 길은 평일이나 주말이나 양의 차이 정도는 있을 뿐, 밤의 풍경은 일관되다, 상업의 장소. 더군다나 술과 춤과 만남으로 특정하는 장소다. 나쁜가? 얼마나 나쁜가? 왜 나쁜가?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하니 나쁘고 슬픈가? 이런 장소를 두고 공공을 운운하던 나를 돌아보자, 사라져가는 문화공간과 집단을 안쓰러하던 나 역시 이 장소를 놀이의 장소로 오가는 이중적 인간 중 하나였지. 문화작업자들은 미끼였다. 실은 홍대앞은 상업과 문화가 결탁한 동네였으나, 그건 꿈이었다. 상업은 결계를 깼고 자본의 테마파크로 만들었다, 유행에 더욱 민감한 밤의 테마파크를. 투자-개발의 얄팍한 공모와 그 광-속도로부터 탈출한 자들은, 또 다시 개척자가 되어야 하는 운명에 놓인다는게 씁쓸하다. 애초에 문화작업자는 국가 혹은 자본이라는 패트론없이는 버티기도 힘든 자들이 아니었나. 애초에 결계라 믿었던 건, 배신해도 된다는 허락이었다. 골목에 들어서 사람 끌어다니는 미끼로 쓰다 던져진 팔자소관이다. 특히 테마파크 설계자는 내가 사는 동네의 돈많은 작자들이다. 그들은 거리의 인파를 돈이 흐르는 선으로 이해한다. 무대책인 지방정부를 슬슬 달래며 건물을 짓고 세금을 줄일 방도를 찾는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사람들을 돈이 흐르는 선이 아니라 사정이 있는 점으로 봐주기나 바라는 윤리적 인간됨을 주문할 수 밖에 없다. 욕심일까? 안다, 그래서 더 씁쓸하다.
양군의 한신포차를 지나 나오는 골목에서, (내게는) 익숙한 풍경을 보았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180킬로가 족히 넘는 박스와 가재도구를 담은 리어카 한 대가 멈춰서있고, 그 바로 앞에 80정도 되어보이는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주변 상점에서 나온 박스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인파에서 빠져나온 이 할매는 포장되지 않아 놓여진 박스를 정리하여 리어카에 싣고 있었가. 이 박스들은 청소부 아저씨들이 일반쓰레기만 챙겨가니 그냥 두고 갔거나, 워낙 좁은 골목이라 청소차가 들어오지 않은 골목 한구석에 모인 박스를 줍고 있다.대개는 음식의 재료 박스들인걸 보면 근방 상점들에서 나온 모양이다.
- 리어카 뒤에 할머니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저 박스더미를 보라. 얼마간 주운 양일지 묻고 싶었지만, 경계하는 할머니의 표정을 보고 그럴 수가 없었다.
문득 박스에 대해 상상해보았다. 박스포장이라는 건, 어떤 잇점이 있는걸까. 음, 제조업체와 운수업체 입장에서 표준화된 공정을 원활케 하는 운송도구 중 하나일테다. 일단 정량의 물품을 들어가는 박스는 세기에 쉽고, 저장이 간편하며, 옮기는데(노동시에 보다 안전하게) 동일한 행동으로 시간을 줄이고, 상품의 손실을 줄일 수 있다. 만약 박스가 없다면? 비닐봉지에 넣어 운반한다고 쳐보자. 예를 들면, 냉동감자가 있다 쳐보자. 비닐에 넣어진 감자는 빼죽빼죽 뭉쳐있어, 옮기다 파손될 수도 있다. 게다가 트럭에 싣기에 그 공간활용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빼기에도 쉽지 않을테고. 그런데 말이다, 이런 사고방식이라는게 철저히 ‘상품’ 중심적이다. 애초에 만드는 자나 배달하는 자는 먹지도 않을, 자신의 것도 아닌 것을 만드는 제조노동자나 운반하는 “서비스 노동자”를 고려하는 건 아니다. 효율의 극대화는 항상 상품이 주인이다. 그로부터 벌어들이는 돈은 자본가에게로 향하고. 투박한 상상이지만, 박스는 효율의 아이콘이다.
다시 노인과 박스 이야기로 돌아오자. 노인들이 박스를 주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박스의 어마어마한 양이 널려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회에서 박스를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문제가 달려있다. 크기가 큰 박스는 종이-재활용품에 나가는게 보통이지만, 매일 박스가 들어오는 상점이나 좁은 집의 거주자들이 “보관”했다가 정해진 배출일에 내놓는게 쉽지많은 않다. 그래서인지 집 안에 재활용품 보관소를 두게끔하는 제한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골목에서 굴러다니지 않게 보관함을 곳곳에 설치하거나 말이다. 대형마트에서 박스를 보관하는 방식이 하나의 예일지도 모르겠다.
에고, 생각이 많았다. 다시 걸었다. 호시절에 즐겨가던 카페 이리로 향했다. 이리 옆의 피아노 학원은 바, 아니 클럽이 된 모양이다. 동네에 아이들이 더 이상 살지 않는 모양인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만 해도 골목에서 아이들을 곧잘 볼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리가 이리로 이사해 온게 문제의 발단인지 모르겠다. 한번쯤은 들어 봤을 상수동 카페니 하는 곳도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도망쳐왔지만, 워낙 상징적인 공간이 이사를 해오니, 금새 소문이 났고 몇 차례 방송과 언론에 나갔으며, 이후 이 동네는 건물의 모양새가 바뀌고 방에 들어찬 도구와 사람들이 바뀌었다. 이리에 앉아있는데 옆 가게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고, 산책하는 이들보다 술에 취한 사람들이 가득이다.
재빨리 자스민 차를 한 잔 마시고, 합정역을 향했다. 몸이 불편하니 걸음이 느리다. 택시를 골라잡아 탈까하다 애초에 계획한대로 합정역까지 걷기로 했다. 술집과 사람들이 지겨워 조용한 다세대주택가의 골목길을 걸었다. 열두시가 다되어 가는데, 마주한 세탁소 두 집에 불이 켜져있다. 안을 들여다보니 두 집의 주인장인 아저씨들이 의자에 누워있다시피 앉아있다. 아마 뭔가를 기다리나 보다. 세탁소를 지나 계속 걸었다.
- 사람하나 없는 한적한 골목, 이 끝에서 또 다른 할머니를 보았다.
커다란 리어카를 세워두고 박스를 골라 담는 다른 할머니를 보았다. 이곳은 상업지구는 아니다. 주로 택배박스인데, 다세대주택 지구라 그런지 그 양도 상당하다. 문득 오래된 인문과학의 질문, 아니 더 오래된 철학의 줄기 하나가 떠올랐다. 아마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합리의 물음일텐데, 자연에 대한 인간의 대립, 혹은 넘어섬. 이게 가능할지의 여부는 차치하고, 우선 저 박스와 주워파는 일을 생각해봤다. 어느샌가 자연물을 재료로 삼지 않아도 되는 기술적 발전이 가능해졌고, ‘재활용’이라는 실천이 가능해졌다. 더 이상 나무를 베지 않아도, 종이를 만들 수 있게 된거다. 한때는 옷가지로, 이제는 쓸모가 사라진 종이들로. 여기에서 노인들이 종이를 줍게된 계기를 설명할 수 있다. 재활용품의 수거가 원활치 않아, (과거에는 넝마주이들이, 이제는) 노인들이 그 역할을 하게 된거라고. 재활용을 해야하니 더 이상 일반쓰레기가 아니라 이름붙였지만,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온갖 방식으로 내다’버리니’) 마땅한 수거체계를 갖추지 못 한 상태가 이 상황의 시발이다. 따지고 보면, 자연을 이겼다 싶지만, 죽음과 태어남이라는 완벽한 순환구조를 따라하지 못 하는 한 인간은 항상 빈틈을 만들 수 밖에 없는지 모른다. (선무당 같은 소리라 미안하다.)
에고, 이런 쓸모없는 상상을 하며, 연구자(지망생)이라는 쓸모없고 빌어먹을 처지라 자책하며 골목을 빠져나왔다. 걷다 한 편의점 유리창에 쌀쌀한 날에 반팔티를 하나 걸치고 나온 이십대 초반 여성의 침울한 저녁식사를 보았다. 컵라면과 삼각김밥, 누구라도 침울하다고 표현할 그 표정이 보였다. 혼밥의 즐거움, 잘 모르겠다. 부르디외 말마따나 무어가 취향이 아닌지 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대개 혼자 먹는 일은 아비투스를 형성하기는 커녕, 고저 꿈없는 자들의 비루한 장면이기 쉽다.
관찰자 놀이를 하다보니 합정역이 보인다. 빨간 책방 앞 횡단보도에는 택시를 잡으려는 대여섯 무리가 보이고, 여성 둘이 택시를 타자 일행인 남자가 곧장 택시 뒤로 달려가 번호판을 찍는다. 이 풍경은, 지금 여기의 현실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며 생존해야 하는 현실. 살해와 인신매매, 성폭력의 긴 역사가, 혹은 다음의 사건들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가능성과 함께 살고 있다. 세월호가, 인천의 호프집이, 삼풍백화점이, 성수대교가, 거슬러 올라가면 와우아파트가.
- 택시와 택시잡는 사람들이 보인다.
어처구니 없게 장황하고 난삽한 관찰의 시간이 끝났고, 이래저래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왔다. 12시 20분. 사정 따위 봐주지않는 프로젝계약을 위해 일찍 잠을 청해야 하는데, 서투른 내 말들을 잊기 싫은 마음에 한참을 적는다. 사념이 많고 난삽하다며 비아냥댈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나 내가 싸우는 대상은 더 심하면 심할 책과 도시인걸. 가능한한 많이 쏟아내고, 내가 내 사유를 대상으로 삼는게 갈 길이니 싶다. 무뎌지지 않으리, 적어도 호기심만은 잃지 않으리. 어쨌거나 내 하는 짓의 본령은 관찰과 읽기다. 그런데 <한국이 싫어서>는 한 쪽도 못 읽었다. 왜냐면, 이런 한국이 더 싫어져서, 이곳에서의 미래가 너무 두려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