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성(Governmentality)에 관하여

통치성

통치와 통치술(통치기술)과 통치성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통치란 “권력의 한 유형”이며, 통치술은 이때 통치의 기술이다. 반면에 통치성이란 “전략과 테크놀로지와 프로그램”의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혹은 “개인이 행하는 것과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을 책임지는 지도의 권위에 개인을 종속시킴으로써, 개인 삶의 전면에 걸쳐 개인을 통솔하는 임무를 띈 활동”이라거나 “대략적인 의미로 인간행위를 통솔하는 테크닉과 절차들 – 아동의 관리, 정신과 양심의 관리, 가계의 관리, 국가의 관리, 자기 자신의 관리로 이해”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한 가지 특정한 멘탈리티로서 정치적 사유와 행동의 근대적인 형태의 공통적인 토대이기도 하다.

16세기 ‘통치’와 다양한 통치실천

16세기 중엽부터 18세기 말까지 군주에 대한 실천적인 조언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아직은 정치(과)학이라 부를 수도 없는 일련의 논설들이 불현듯 성행하였다. 이 논설들은 (조언도 정치학도 아닌) “통치술”을 제시하고 있다. 이 통치실천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어떻게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가”라는 자기 자신의 통치라는 문제, 로마가톨릭이나 개신교의 사목에 해당하는 영혼과 품행의 통치의 문제, 16세기에 출현하여 발전하는 교육학과 같은 아동의 통치라는 문제들이 있다. 이 문제들은 결국 군주에 의한 국가의 통치로 이어진다. 군주에 의한 국가의 통치란 “어떻게 (군주) 자신을 통치할 것인가? 어떻게 (국가를) 통치할 것인가? 어떻게 타인을 통치할 것인가? 누구에게 통치하는 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어떻게 (군주가) 최고의 통치할 것인가”라는 질문들로 구성될 것이다. 이 통치의 문제란 16세기 특유의 문제들이다. 더군다나 국가의 중앙집권화 운동과 종교의 분열과 대립의 운동, 이 두 운동이(혹은 두 절차가)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있는 것이다. 두 운동이 벌어지는 과정 속에서 “어떻게, 누구에게, 얼마나, 무슨 목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통치받을 것인가”라는 식으로, 통치가 하나의 보편적인 문제계로 제기되었다.

국가통치의 특수한 문제

‘통치’의 문제(문헌)들은 16세기 중엽에 출현하여 18세기 말까지 퍼져나왔다. 대단히 방대한 양이지만 단조롭기도 한, 이 무리들을 읽어내면 “통치의 정치적 형태”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한 정의를 제기할 수 있다. 이때의 방법이란 “어떤 하나의 텍스트를 기준으로 삼고, 수많은 문헌들을 비교하는 것”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의 『군주론』ll Principe, The Prince, 1532을 기준으로 삼기로 하자. 왜냐하면 통치관련 문헌들이  『군주론』과 (1)관련하여, (2)대립하는 형태로, (3)기각하는 형태로 [당대 혹은 이후에] 스스로의 위치를 확보하려 했기 때문이다.

우선 기준이 되는 『군주론』이 환영받는 시기를 살펴보겠다. 1532년, 출판되자마자부터 한 세대 후까지, 그리고 한참 지나 18세기 말 혹은 통치술 관련문헌이 모조리 사라지는 19세기 초에 『군주론』에 관한 칭송이 이어진다. 여기에는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이 영향을 미치며, 한편, 프랑스혁명의 맥락이 영향을 미친다. 당대에 있어 (마키아벨리에게 영향을 준) 프랑스 혁명이 만들어 낸 맥락이란 “주권자가 국가에 행사하는 주권이 어떻게, 어떤 조건에서 유지될 수 있을까”하는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가 아닐까 싶다. 또한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가 『전쟁론』Von Kriege, On War, 1832에서 설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와 전략의 관계”라는 문제가 대두된 맥락이 있다. 1825년의 빈 회의 이후, 정치적으로 세력관계를 계산하여 국제관계를 설정하는게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탈리아와 독일에 있어서는 “영토의 통일”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로도 여겨져 재발견·재평가된 측면이 있다.

반마키아벨리 문헌과 그 적, 『군주론』의 군주

그렇다면 그 사이의 시기, 즉 반마키아벨리적 문헌이 다수였던 때에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푸코는) 로마가톨릭 진영, 특히 예수회의 문헌에 반마키아벨리적 성격을 가진 문헌이 많았다고 밝힌다. 이 문헌들에 대해 마키아벨리의 글을 “검열·차단·기각하는” 부정적인 기능을 하였한 사례와 실제를 찾았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마키아벨리 문헌군을 하나의 실질적인 장르로 살피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반마키아벨리의 기치를 내건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상대하기 위해 전력戰力을 탐색하고, 나름의 무기를 마련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이 무리들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상대하기 위하여 나름의 대상과 개념과 전략을 갖추었다. 이 자리에서 (반마키아벨리주의자들이 만들어 낸) 마키아벨리의 사유에 대한 피상적인 표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가 가진 특징들을 살펴보자.

첫째, 어떤 하나의 원칙을 통해서, 군주는 자신의 공국과 단수성·외재성·초월성의 관계를 맺는다. 군주는 상속, 혹은 병합이나 정복을 통해 공국을 얻는다. 어떤 경우에도 군주는 공국의 일부가 아니라 외부에 놓인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와 공국 사이에는 근본적, 본질적, 자연적, 법률적인 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외재성과 군주의 초월성이라는 원칙을 갖는다.

둘째, (앞의 원칙으로 인한 필연적인 귀결로써) 군주는 자신의 공국으로부터 외재적이기에, “군주는 취약하고 끊임없이 위협에 처한다.” 바깥에 자리잡은 적으로부터 위협받고, 안에 있는 인민들에게 (자신의) 공국을 인정하게 해야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셋째, 앞의 원칙과 결과로 인하여, “권력행사의 목적이란 공국을 유지하고 강화하며 보호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정언명령이 연역될 수 밖에 없다. 군주는 직접적으로, 무매개적으로 근본적으로 혹은 우선적으로 영토나 신민을 보호하지 않는다. 군주는 영토와 신민과의 사이에서 맺은 관계로서의 공국을 보호할 뿐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가 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제시한 (통치술의) 대상이란 군주가 자신의 공국과 맺는 이 허약한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반마키아벨리적 문헌이 아닌 마키아벨리의 분석을 살펴보자. 앞에서 본, 군주와 공국 사이의 허약한 관계 탓에 마키아벨리의 분석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위험을 파악하는 것이다. 둘째는 군주가 (자신을 신민과 영토와 이어주는 연결고리로써) 공국을 보호할 수 있게 하는 힘의 관계를 조정하는 일이다. 이런 분석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자신의 공국을 보존하는 군주의 수완에 관한 논고로 파악하게 한다. 그렇다면 반마키아벨리는 무얼 위하여 마키아벨리와 그의 군주를 비판하고 기각하였을까? 군주의 수완과 처세술을 그것과 대조되는 무엇, 즉 통치술로 대체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새로운 통치술: 정치의 실천에 경제를 도입하다

통치술을 이루는 건 무얼까? 라 페리에르의 『정치의 거울』(1555)은 하나의 예다.

첫째, 통치의 형태란 복수적이며, 통치의 실천은 국가와 관련하여 내재적인 성격을 가진다. 통치하다gouverner와 통치자gouverneur의 정의 문제가 있다. 마키아벨리를 비롯하여 사람들이 부여하는 표상에서, 군주란 공국의 유일한 인물이며 공국과 관련해 외재적이며 초월적인 위치이다. 그러나 통치자와 통치의 실천은 다양하다: “통치자라 불릴 수 있는 것은 제왕, 왕, 군주, 영주, 행정관, 고위 성직자, 판사, 그 이외에 이들과 유사한 자들이다(라 페이에르, 1555: 푸코, 2014: 138에서 재인용).” 군주의 통치는 다수의 통치 중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통치는 사회 자체 혹은 국가에 내재적이다. 가장이 가족을 통치하고 수도원장이 수도원을 통치하는 건, “국가 안”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통치란 사회와 국가 내부에서 포착되고 교차하며 착종(錯綜)되는 복수의 것인데, 이 중에서도 국가 전체에 적용되는 통치형태를 살펴보아야 한다. 프랑수와 르 모트 르 바이에르(1653)는 통치의 유형을 제시한다. “자기통치는 도덕에 속하고, 가족을 적절히 통치하는 기술은 경제에 속하며, 마지막으로 국가를 ”올바르게 통치하는 것의 [과]학“은 정치에 속한다고 말이다. 여기에는 두 방향의 연속성이 존재한다. 즉 아래에서 위로 가는 연속성과 위에서 아래로 가는 연속성을 파악해야만 하였다. 이때, 아래에서 위로 가는 연속성이란 군주의 교육이다. 국가를 통치하려는 자는 자기 자신(도덕)을 통치할 수 있어야 하며, 또 다른 수준으로는 자기의 가족, 재산, 영지 등(경제)을 통치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지만 비로소 최종적으로는 국가(정치)를 통치하는데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보자. 국가가 적절하게 통치되는 상황에 이르면, 가장들이 가족·부·재화·토지·구성원들을 잘 통치할 수 있고, 개인들이 자기 자신을 잘 관리할 수 있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연속성을 내치內治, police라 하였다.

두 연속성(군주의 교육법과 내치)에 있어 중요한 핵심요소는 경제라고 불린 가족의 통치이다. 이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후 통치의 본질적인 목표를 정치의 실천에 경제를 도입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의 통치성의 확립 과정이 그러했다. 루소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가족 모두의 공동선을 위해 가정을 지혜롭게 통치하는 것”을 지칭했었으나, 이제[1755년]는 지혜로운 가정의 통치가 어떻게 국가의 관리 일반에 유입될 수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문제라고 할 정도로 말이다. 18세기 즈음에 이르러, 국가를 통치한다는 것은 국가의 수준에서 경제를 사용하며 국가 전반에 경제를 적용하는 것이다.

통치의 목적은 관리해야 할 ‘사물’에 있다. 

둘째, 라 페이에르의 책에 나온 아래의 문장을 살펴보자.

통치란 적절한 목적에 이르기 위한 사물의 올바른 배치이다. 

통치란 사물을 대상으로 한다. 사물choses부터 살펴보자. 마키아벨리에게 권력의 대상이자 표적은 영토이며 신민이다. 주권은 영토에 대해, 그리고 그곳의 거주자에게 행사되었다. 영토가 공국에서나 법률적 주권에서나 근본 요소인 셈이다. 그러나, 라 페이에르는 통치의 대상을 사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말 그대로 사물을 인간과 대립시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통치란 영토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인간으로 구성된 복합체와 관계맺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때 사물이란 인간이지만, (단일한 사람이 아니라) 부나 자원과 식량과 같은 사물과의 관계와 연결과 연루 속에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즉, 통치를 특징짓는 건 모든 총체적 관리이며, 인간과 사물의 뒤얽힘으로 이해되는 사물을 대상으로 한다. 소유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성하는 사물을 목표로, 닥칠 수 있는 사건과 치를 수 있는 일을 고려하는 방식이다.

다양한 전술의 우선시로 인한 법의 후퇴

셋째, 라 페이에르의 통치에 대한 정의에서 독특한 지향성이 보인다. 바로, 적절한 목적에 이르기 위한 사물의 배치라는 것인데, 이 지점에서 통치와 주권이 대립한다. 통치와 주권의 대립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가. 주권의 목표는 주권 내부에 있고, 그 도구를 법의 형태로 자기 자신에게서 끌어내린다. 법학자들과 신학자들은 훌륭한 군주(혹은 주권자)가 되려면 군주는 늘 “공동의 선과 만인의 구제”같은 목표를 제시하라 한다. 이때의 공동선이란 본질적으로 신민들 모두가 완벽히 법에 복종할 때, 신이 자연과 인간에게 부과한 법에 신민들이 잘 부합하는 한, 신민들이 기존 질서를 잘 준수할 때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군주란 신민에게 법을 부과하여야, 신민이 법에 복종하고, 그래야만 주권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통치의 목적이란 자신이 관리하는 사물 내부에 존재한다. 라 페이에르는 (공동선이 아니라) 통치를 사물의 올바른 배치라 정의한다. 통치되어야 할 사물은 ‘적절한 목적’을 향해서 배치된다. 가령 최대한 부를 창출하고, 생계수단을 조달하고, 결국 인구를 증가시켜나간다. 여기에서 관건은 (인간에게 법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법보다 전술을, 혹은 법을 최대한 하나의 전술로써 활용하는 게 관건이다. 일정 수의 수단을 사용해서 어떤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사물을 배치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말이다. 즉, 통치에 의해 인도되는 절차의 완성, 최적화, 강화에서 찾아져야 한다. 통치의 도구는 (주권과 달리) 법이 아니라, 바로 다양한 전술이다. 그래서 법이 쇠퇴한다. 통치가 어떠하느냐의 관점에서는 법은 주된 도구가 아니며, 17-18세기 내내 경제학자들의 문헌에서 법을 통해서는 통치의 목적에 도달할 수 없다는 지적이 하나의 반증이다.

넷째, 라 페리에르는 훌륭한 통치자라면 “인내, 지혜, 근면함”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통치자에게 중요한 건,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무기로 삼아서 군림하는게 아니라 인내해야 한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권리 대신에 사물, 달성할 수 있고 달성해야 하는 목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활용해야 할 ‘배치’(이자 운용술)에 대한 인식으로 지혜를 갖춰야 한다. 그리고 통치자 역시 피통치자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여기고 행동할 수 있을 때에만 통치하도록 만들기에 통치자의 근면함 역시 갖춰야 한다.

마키에벨리가 내린 군주의 성격 규정과 (라 페이에르를 통해 살펴 본) 통치의 성격 규정은 이렇게 다르다. 통치술에 대한 개념과 이론들은 속이-빈-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에서 그 상관물을 찾아볼 필요도 있다. 통치술 이론은 (a)16세기 영토적 군주제의 행정장치에서 일어난 발전으로 통치장치나 중계물이 출현되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b)다른 한편으로 국가에 대한 지식이자 (과)학인 ‘통계학’이라 불린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c)중상주의와 관방학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현재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에서 등장한 국가재정에 대한 학문을 가리킴과도 상관관계가 있다.

18세기까지 새로운 통치술의 사용을 가로막은 역사적·제도적 장애물 

이전까지 살펴 본 라 페리에르의 텍스트란 현실적이기보다 도덕적인 원칙을 제시하였을 뿐이다. 현실적인 변화를 살펴보도록 하자. 사실 통치술은 18세기 전까지 충분한 규모나 일관성을 가질 수 없었다. 여기에는 역사적·제도적인 원인이 있었는데, 좁은 의미의 역사적 원인이란 17세기에 발생한 커다란 위기들을 가리킨다. (1)30년전쟁에 의한 붕괴와 황폐, (2)17세기 중엽 농촌과 도시에서 발발한 대규모 폭동, (3)17세기말 군주제 정치를 위협한 재정위기와 식량난이 바로 그것이다. 실질즉으로 통치술이 전개되고 고찰된데다 어느 정도 규모가 갖춰지고 확되는 시기란 18세기이며, 팽창의 시대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더 세밀히 보아야 할 건, (푸코 자신이 대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용어라 말하는) 제도적이며 심성적인 여러 구조의 이유다.

이 구조에는 주권의 행사라는 문제가 있다. 17세기의 경우에 이론적으로나 정치 조직의 원칙으로 강한 호소력을 받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근본적인 원인으로 볼 수는 있다. 주권이 주된 문제이며, 주권의 제도가 근본 제도이며, 권력의 행사가 주권의 행사로 고찰되는 상황에서 통치술이 특수하고 독자적으로 발전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상주의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통치술의 전개에 있어 중상주의가 가진 의미란 정치적 실천과 국가에 대한 지식(인식)의 수준에서 통치술을 행사하려는 최초의 노력이라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상주의는 통치술이 합리화되는 과정에서 최초의 문턱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중상주의는 권력의 행사를 통치의 실천으로 처음 합리화하였다. 이때서야 국가에 대한 지식이 통치의 전술로 활용될 수 있게끔 구축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중단된다. 군주의 힘을 주된 목표로 삼았으며, 주된 도구로 (군주들의 산물인) 법과 칙령과 통제를 삼았던 게 이유다. 즉, 중상주의는 통치술이 제공해 줄 가능성을 고심하고 찾아냈지만, 이를 기존의 목표와 도구를 통하여 주권의 제도적·심성적 구조 내부로 들여오려다 보니 실패한 상황이다.

17세기 내내 그리고 중상주의의 주제가 대거 청산되는 18세기 초까지도 통치술은 답보상태였고, 실상 다음의 두 사물 사이에 갇혀 있었다. 하나는 추상적이며 경직된 주권의 틀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 모델이다. 이 시기에는 통치술과 주권 이론의 타협을 시도하였다. 이 지점에서 계약의 이론이 통치술의 일반 원칙과 재합치되리라 기대하였다. 홉스의 경우만 보더라도 공법公法과 같은 군주와 신민의 상호약속에 대한 이론이자 계약으로 만들려 하였다. 그러나 지도 원리를 찾지는 못하고, 일반적인 원리를 정식화하는데 머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의 통치라는 모델을 고려해봤지만, 통치술에 경제라는 관념이 장애물이었다. 이 시대에 경제라는 건 가족으로 이루어진 작은 전체의 관리만을 지칭하는 실정인데, 이 가족의 관리라는 경제를 관리할 마땅한 도구를 마련하지 못한 셈이다. 이렇게 17세기, 통치술은 자기 고유의 차원을 발견하지 못 하였다.

통치술의 장애 해제에 본질적 요소로 작용한 인구 문제 

통치술은 이 방해물들로부터 18세기에 풀려났다. 이 시기에 들어서자 인구 문제가 출현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앞서 가족모델에서 필요했던 세밀하게 복원해야 하는 미묘한 절차가 고안된 셈이다. 그 안에서 (1)통치학과 (2)가족을 벗어난 경제라는 집중, 게다가 (3)인구문제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었는지 볼 수 있는 절차가 만들어졌다. 무엇보다도 주권이라는 법률적 틀을 넘어서 통치의 문제를 사유·고찰·산출하게 된 계기는 인구의 관리라는 문제가 지각되었다. 이 덕분에 경제라 불리는 현실의 수준이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따로 다뤄질 수 있었다. 여기에서 통계학은 통치술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주요한 기술적 요소 혹은 그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통계학이 주권의 작용을 벗어나, 인구에도 고유한 규칙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인구가 그 자체의 변동과 행동방식, 활동을 통해 특정한 경제적 효과를 자아낸 다는 것을 보여주며, 인구 고유의 현상을 수량화할 수 있게 하였다. 이제 통치 모델로서의 가족이란 소멸하게 되었다. 이렇게 통치술은 인구의 관리라는 문제 하에 통계학을 통하여 고유의 영역을 가질 수 있었다.

둘째, 무엇보다 통치의 최종목표로 인구가 등장하였다. 이제 통치는 인구의 조건을 개선하고, 인구의 부와 수명과 건강 등을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갖게 된다. 인구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사적인 이익과 희망이 무엇이든지 간에, 인구를 통치의 목표이자 수단으로, 개개인이 의식하는 이익과 인구의 이익을 표적이자 도구로 삼게 된다. 하나의 기예, 완전히 새로운 전술과 기술이 탄생하였다.

마지막으로 주권자의 인내심이라 불린 것이 조직되는 중심점에 대한 고려다. 인구란 통치자가 합리적이고 숙고된 방식을 통해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도록 관찰하고 알고 있어야 할 대상이다. 이때, 인구를 중심을 돌아가는 모든 절차에 관한 지식, 다시 말하자면 경제의 구성과 분리될 수 없다. 주권에 의해 지배되는 체제에서 통치술에 의해 지배되는 체제로의 이행은 인구를 중심으로, 정치경제학의 탄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경제와 정치경제학이 낡은 가족 모델과 겹쳐지지 않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며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통해 주권의 법률적 원리 뿐 아니라 새로운 통치술을 감안한 일반원리를 고안한다는 의미를 보여준다.

통치-인구-정치경제학이라는 삼각형 

그렇다해도, 주권이 통치로 대체된 것이 아니다. 또한 규율 역시 그렇다. 주권은 전례없이 첨예한 상황에 처하였고, 규율은 인구를 관리한다는 의미에서 보다 심도있고 섬세하며 세부에 이르러야 했다. 보다 일반원리에서의 주권을 창설하며 규율을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이 생겨났다. 이때 주권-규율-통치적 관리라는 삼각형을 상상해보아야 한다. 인구가 삼각형의 핵심 표적이며, 안전장치가 이 삼각형의 매커니즘이다. 주권의 기조를(/항구성을) 뒤흔든 운동, 인구를 하나의 개입의 장이자 통치기술의 목표로 등장시킨 운동, 경제를 현실의 특수한 영역으로 떼어내고 정치경제학을 이 영역에서 하나의 과학이자 통치의 개입기술로 떼어낸 운동 사이의 깊은 역사적 연관관계를 보여주고자 한다.

푸코의 고백: 방법상의 문제, ‘통치성’을 둘러 싼 역사적 기획과 국가 문제의 과대 평가 

“한마디만 덧붙이고 싶습니다〔……〕 올해 강의에 더 정확한 제목을 부여하려 했다면 저는 ”안전, 영토, 인구“라는 제목을 선택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고, 실제로 지금 하고 싶은 것은 ‘통치성’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162쪽).”

국가의 운명, 국가의 한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통치성의 일반적 전술을 근거로 해야 한다. 사법국가, 행정국가를 거쳐 현재의 통치국가는 본질적으로 영토성에 의해 정의되지도 않고, 차지하는 지표면이 아니라, 영토를 지닌 인구 대중masses에 의해 정의될 것이다. 정리하자면, 안전-영토-인구가 아닌 안전-인구-통치로 바꾸어 고민해야 할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통치성이란 1) 인구가 주요 표적이고, 정치경제학이 그 주된 지식의 형태이며, 안전장치가 그 주된 기술적 도구인, 지극히 복잡하지만 특수한 형태의 권력을 행사하게 하는 제도·절차·분석·고찰·계측·전술의 총체, 2) ‘통치’라고 부를 수 있는 권력의 유형 한편으로 통치에 특유한 일련의 장치를 발전시키고, 다른 편으로는 일련의 지식을 발전시킨 이 권력 유형을 (서구 전역에서 꽤 오랫동안 주권이나 규율같은 다른 권력 유형보다) 우위로 유도해간 경향, 힘의 선을, 3)중세의 사법국가가 15-16세기에 행정국가로 변하고 차츰차츰 ‘통치화’되는 절차, 혹은 그 절차의 결과를 ‘통치성’이라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게다가 국가라는 문제를 과대평가하는 두 가지 형태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 특히 1) 냉혹한 괴물이 있다는 식의 서정적인 표현, 2) 국가를 몇 가지 기능으로, 생산력의 발전이나 생산관계의 재생산 등으로 환원하는 역설적인 형태이다. 국가를 공격해야 할 표적이라거나 점유해야 할 특권화된 위치로 만드는 건, 국가자체를 절대적이며 본질적인 존재로 만드는데 불과하다. 국가란 혼성적 현실이나 신화화된 추상에 불과한 것으로, 사실 사람들이 믿고 있는 국가의 중요성이라는게 어쩌면 훨씬 더 왜소할지도 모르지 않겠나?

어줍잖은 질문들 

그렇다고 해서 이 하나의 에세이에서 통치성의 전모를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 질문을 해볼까 한다.

(1) ‘통치성’은 항상 적용가능한 노하우일까? 일례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라는 말은 꽤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하나의 개념이다. 그러나 “-적인 통치성” 혹은 “-적인 통치”라는 것으로 유형화를 하며 설명을 하는 건 가능한 일일까? (사실 여기에서는 통치성이 단수의 메타적 개념일지, 혹은 여러 유형화로 적용/분류가능한 복수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 역시 든다.) 권력의 문제 혹은 통치나 통치술이라면 유형화라는 시도에 문제가 없겠지만,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에 대하여 “통치성”의 특수한 세부 사례라고 말한다면 다소 머리가 복잡해진다. 통치성은 앞서 제기한 것처럼 일종의 “공통적인 토대”라면 보편적이어야 하는게 아닌가? (덩달아 새로운 ‘토대주의’라는 의문도 제기할 수 있다고 본다.) 만약, “토대”라 본다하더라도, (2) “통치성”이 항상적인 건지 따져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통치성에는 통치의 테크놀로지라는게 있다고 치자. 이때  원리는 항상 같은 것인가? 예를 들면, 권력이 침투하는 원리는 항상 같은 것인가? 그렇다면 통치는 외려 경직된 것은 아닌지, 마치 영원불멸한 과정인건지, 수정의 여지는 없는지가 의문이 든다. 이렇다면 결국 사회에서의 권력의 질서란 항상 유지되는 것인가? (3) 더욱이 통치성은 항상 작동하는가? 예를 들어, 통치성의 작동이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은 없을까? 푸코가 쉽게 적어놓은 것처럼 18세기의 전염병의 정치와 통계학의 자리잡음이란 그리 쉽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지리멸렬한 과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이때의 보다 세부적인 경험, 특히 저항의 상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통치의 실패라고 쉽게 단정하여야 하나, 아니면 지리멸렬하지만 결국 18세기의 통치성이라는 역사적 기획은 성공하였다고, 낙관적으로 보아야 할까? 게다가 이때의 행위자는 어떻게 설정하고, 살펴볼 수 있을까. (역시 이러한 이야기를 하기에 푸코의 『통치성』이란 텍스트는 역사적이라기보다 철학적이다. (4) 마지막으로 통치성은 하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건지 . 무언가 다른 이론적 모형들과, 특히 이전의 여타 다른 이론에 비해, 차이가 두드러진다. (항상 푸코에 대한 논의에서는)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라는 류의 질문으로 실천적인 한계를 알게 된다. 뭐랄까,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Architecture의 정체를 알게 되고 내뱉는 한숨이랄까? 아키텍쳐의 모습을 확인하고, 그 자의 테크닉을 살펴보았지만, 아키텍쳐의 판단(혹은 놀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런 딱한 처지를 파악하게 된다고 할까. 그럼에도 통치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통치가 어떻게 문제가 되는지, 통치가 어떤 테크닉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라는 이해를 얻는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현인의 가르침은 훌륭하지만서도 먹먹한 앞길이 떠오른다.

<푸코 효과>의 일부를 읽고 정리함.

2016/4/7

Junchol Kim So

도시 연구자, 서울을 살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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