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활자(新鉛活字)에 대한 사회사적 소고(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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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준철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학 박사과정)
1. 신연활자란 무엇인가?
천혜봉은 신연활자를 “고종 20년(1883년) 통리아문에 박문국을 설치하고나서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활자라고 보며, 1세대 근대 신문인『한성주보』(1886년 1월 25일 – 1888년 7월, 주간)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한다. 인서체이며, 연(鉛, 납)으로 만들었고, 크기는 0.4㎜×0.7㎜ 정도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납을 주재료로 한다는 물질성을 기준으로 한 ‘카테고리’에 불과하다. 신연활자는 (서구 근대를 본 뜬) 일본을 통해 유입된 근대적 활자로써, 하위 카테고리를 만들기 위한 분류가 필요하다. 디자인계의 타이포그라피 연구자들에 의하여 한글활자에 관한 연구(박지훈, 2011; 류현국, 2015)가 존재하나 한글활자에 국한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유미영(2013)이 밝힌대로 「한성순보」나 ‘관보’, 교과서와 같이 납으로 만든 한문 활자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2. 신연활자의 분류
- 타이포그라피를 다루는 디자인계에서는 크기와 모양으로 신연활자를 구분한다. 박지훈(2011)은 1호(Double Pica, 8.55㎜), 2호(Double Small Pica, 7.5㎜), 3호(Two-line Brevier, 5.6㎜), 4호(Three-line Diamond, 4.8㎜), 5호(Small Pica, 3.7㎜), 6호(2.8㎜)로 분류하였다. 각 크기마다 모양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 1호체는 (1)최지혁체 1호(해서체)와 『보통학교 국어 독본』(1909)에서 발견할 수 있는 (2)‘독본체’ 1호(인서체), 2호체는 (3)최지혁체라 추정되는 2호 활자(해서체), 아오야마 진행당(青山進行堂)의 견본집(1909)에서 발견할 수 있는 (4)‘2호 조선국 언문(朝鮮國 諺文)활자(해서체)가 있다. 3호체는 흔히 (5)’성서체‘(활자체)라는 활자가 잘 알려져 있다. 영국 장로교의 J. Ross와 Mecintyre가 서상륜(종자 조각), 이응찬(자본) 등의 도움으로 번역한 『누가복음』(1882)과 『요한복음』(1882)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6)『보통학교 조선어독본』(1923)에 쓰인 3호체(인서체)가 존재한다. 무엇보다 1885년에 만들어진 (7)’한성체‘ 4호 한글 활자는 유심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츠키지 활판제조소에서 만들어졌고, 『한성주보』(1896)에 사용되었다. 헌데 일본에서 발행된 『메이지자전(明治字典)』(1885)라거나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해』(1885)에서도 같은 활자체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은, 한성체의 주조 목적이 『한성주보』제작을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고민하게 한다. 그 목적이 어찌되었거나 4호체는 근대기 출판물 가운데 ‘본문용 활자‘로 자주 사용된 활자이다. 「한성주보」, 「독닙신문」, 「황성신문」, 「데국신문」 및 「소년」등의 초기 언론매체와 근대 교과서, 해방 후 국어 교과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박지훈, 앞의 책: 740-741쪽). 5호체 가운데 (8)’최지혁(5호)체‘(해서체)의 경우, 역사적으로는 가장 오래된 신연활자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히라노 활판에서 만들어진, ’최지혁체‘는 『한불자뎐』(1880)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그 쓸모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이 외에도 (9)츠키지 활판제조소의 5호 한글 활자는 『유년필독(幼年必讀)』(1907)이나 『시편(詩篇)』(1908)에서 부터 식민지기의 여러 인쇄물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10) 『5호 조선문 활자 견본장(五號朝鮮文活字見本帳)』(미상, 1920년대 추정)의 한글활자나, (11) 수영사(秀英舍)의 『활판견본첩 미완(活版見本帖 未完)』(1896)에 실린 5호 조선문자(五號朝鮮文字, 해서체)가 있지만, 그 독창성에 대하여서는 츠키지 활판제조소의 활자의 것이 아닌지 의심되고 또한 일본 내에서 본문용이 아닌 작은 활자로 사용되었다고 본다(박지훈, 앞의 책: 748-450쪽). 6호체는 (12)『노동야학독본』(1908)의 6호 한글 활자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2.8㎜에 불과한, 가장 작은 활자다. 『노동야학독본』(1908)과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펴낸 『소년(少年)』(1908) 등에 사용되었다. 아마도 한자의 음독(音讀) 표기를 위하여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3. 금속활자의 폐쇄성: 순한문체의 우위
천혜봉은 금속활자 인쇄술이 서양보다 200여년 앞섰으나, 폐쇄적인 성격 때문에 그 이상의 발전을 못하였다고 지적한다. 폐쇄적인 성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는데, 성격의 주체는 조선 정부와 지식인층으로 한정할 수 있으며, 당시 이들이 순한문 체계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의 금속활자인쇄체계와 목판인쇄체계 대신에 서구식의 기계식 인쇄체계를 도입하는데 지체하였다고 전제할 수 있다.
첫째, 한문 체계에서 국한문혼용 체계 혹은 순국문 체계로의 변화 과정에서의 지체로 볼 수 있다. 활자가 새롭게 필요한 경우는 두 가지로 여겨진다. 한 가지는 기존의 활자를 더 이상 사용하지 못 하여 대체할 수 있는 활자를 주조해야 하는 것이며, 다른 한 가지는 새로운 언어가 도입되어 새 활자를 주조해야 할 때다. 전자의 경우는 조선시대에 있어서 다양한 금속활자와 목판활자가 만들어진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한글 신연활자나 영어, 혹은 일본어와 같은 새로운 언어의 도입을 위하여 새 활자를 마련해야 하는 경우다.
“국가와 관청의 공식 문서는 한문을 사용하며, 어려운 한자의 옆에 뜻풀이를 기입하는 경우 외에는 거의 한글을 쓰지 않는다. 조선의 남자 유생들은 한글을 천시했고 오로지 빈민층의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이나 쓰는 것으로 여긴다.”
새비지-랜도어의 기록처럼 1890년대까지도 공식적인 언어는 한문이었다. 1895년에 이르러서 유길준은 『서유견문』의 서문에서 “한글과 한자를 섞어 문장의 체제는 꾸미지 않고, 속어를 되도록 많이 써서 말하고자 하는 의사가 잘 통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고 밝힌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그대의 고생하며 노력한 자취는 가상하나, 한글과 한자를 섞어 썼다는 사실이 문장가의 궤도를 벗어난 일이기 때문에 식견이 있는 사람들의 비방과 웃음을 면하기 어려우리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 사례가 보여주듯이 한문 체계가 우위를 점한 상태라면, 국한문혼용 체계나 순국문 체계의 도입이 지체되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신식 인쇄기의 도입보다는 금속활자와 목판활자를 통한 순한문체 출판물의 발행을 유지해야 한다는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둘째, 현재까지의 연구로 볼 때, 1895-1896년까지는 ”관 주도“로 출판-인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관 주도로 이루어지는 기술의 근대화라면, 분명히 새로운 인쇄기술을 들여오는데 한계로 기능한다. 신식 인쇄기술의 도입을 살펴보자. 조선 정부는 1882년 신식 인쇄기술을 들여왔다. 이때 들여 온 신식활자와 인쇄기로 「한성순보」(1883년 10월 28일 발행)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12년 간의 공백기가 있었다. 1886년, ‘조불 수호 통상 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된 후, 선교의 자유가 허용된 상황에서야, 요코하마(가톨릭 세력)와 만주(개신교 세력)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한글 신연활자와 인쇄기가 대한제국 내부로 유입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신식인쇄기계를 갖춘 민영 인쇄소와 출판사가 생겨날 수 있는 틈이 열렸다. 이 후, 성서활판소(천주교), 삼문출판사(개신교: 미아미활판사, 미이미활판소, 한미화활판소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영국성공회인쇄소(1891),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등의 종교단체의 인쇄소를 통하여 신연활자가 도입되었다. 또한 배재학당(앞의 삼문출판사), 보성학교 부설 보성사/보성관, 휘문의숙 부설 희문관과 같은 학교 부설 인쇄소와 광학사나 국민교육회 인쇄부와 같이 ‘민간 애국 운동 단체’의 인쇄소 설립도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4. 신연활자 도입으로 야기된 가능성: 순한문체에서 국한문혼용, 혹은 순국문체로
“우리 한글은 우리 선조의 창조하신 문자요, 하나는 중국과 두루 쓰이는 문자인바, 나는 오히려 순수한 한글만을 사용하지 못하였음을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처지이다. 더구나 외국과의 국교를 이미 맺은 오늘날,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 상하, 귀천, 여자 그리고 어린이를 가릴 것 없이 저들의 형편을 알지 못하고는 안 될 것이다. 그러니 서투르고 껄끄러운 한자로 혼돈된 이야기를 늘어놓음으로써 참다운 정경이나 사실을 기록하는데에 어긋남이 있기보다는 유창하고도, 친근한 한글에 의하여 사실 그대로의 상황을 충실히 나타내도록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신연활자의 사용은 새로운 언어체계가 도입된 계기로 볼 수 있다. 신연활자에 대한 필요를 느끼는 과정에서 생겨났을 법한 변화를 살펴보자. 1894년, 학부대신 유길준이 모든 법률과 명령을 국문으로 작성하며, 한문역을 덧붙이거나 국한문을 혼용할 것을 선언하고, 1895년 『서유견문』을 내놓는 과정은 신연활자의 재도입 시기와 일치한다. 정리하자면, 신연활자의 도입과정은 순한문체를 탈피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중앙정부는 “대체로 1985년을 기점으로 인쇄방식이 신식으로 전환”되었다. 유길준의 주장처럼 국한문혼용체와 순국문체의 도입의 필요가 제기된 상황에서 “새로운 인쇄기계나 새로운 신연활자의 수입이 필요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최초로 신연활자를 사용한 건,『한성순보』(1883)였다. 1888년 인쇄주체인 박문국이 사라지자, 신연활자를 사용한 인쇄물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1895년 1월 29일부터 ‘관보(官報)’가 순한문체에서 국한문혼용체로 변경한 이후, 국한문혼용체와 순국문체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몇 달이 지난 1895년 6월 21일, ‘관보’가 신연활자로 인쇄되기 시작하였다. ‘관보’는 소식지인 동시에, 공문서의 역할도 담당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달 속도의 신속성을 꾀하며, 대량 인쇄가 적합하다는 기술적인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즉, “관보를 간행하는 상황과 대량화가 가능한 신연활자의 장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순한문체가 더 이상 공식언어가 아닌 외국어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 더욱 확산될 수 있다. 즉, 인쇄되어 읽히는 언어가 ‘한문’만이 아니라는 점에서, 순한문체는 외국어로 이해될 수 있다. 이같이 순한문체를 외국어로 이해하는 일종의 ‘의식혁명’은 “인간의 언어가 여러 개라는” 기본적인 문제가 공유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상황은 서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거나, 서구의 조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더 이상 소중화(小中華)이어서는 안된다는 자각과 연결된다.
더욱이 영어와 같은 서구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야기되면서,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졌을 것이다. 『한불뎐』(1880)의 등장 이후, 선교사들은 『한영뎐』(1890), 『한영문법』(1890) 과 같은 사전류를 발간한다. 게다가 1886/1887년의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역서(譯書)의 제한이 풀리게 되었다. 이 때, 야나부 아키라의 ‘카세트 효과’를 염두에 두면, 국한문혼용체는 일종의 새로운 개념어를 담는 ‘카세트’로써 기능할 수도 있다. 이로써 몇몇 선교사들의 시도를 통한『사과지남』(辭課指南, 1894)과 같은 외국인을 위한 한글 문법서의 출간까지 이루어지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순한문체 뿐만 아니라 국한문혼용체, 심지어는 순국문체의 필요성을 논할 수 있으며, 일종의 공식언어의 변화까지 추진할 수 있었다.
일본의 경우에 메이지 유신 직후, 넝마로 만든 종이와 활자와 금속인쇄기, 무선제본, 우편 시스템을 이용한 배송 방식, 서양식의 서점들이 등장하였고, 정치적·경제적 구조의 변화가 (새로운) 출판의 쓸모를 만들어냈다. 신연활자는 본래 서구의 기술이지만 일본이나 청국을 통하여 조선/대한제국에 유입되었다. 조선시대 금속활자와 그 기술이 조선 일국에 한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분명 신연활자와 인쇄기계의 유입은 이전보다 큰 무역일 것이다. 1882년 인쇄기와 신연활자를 일본으로부터 사온 박문국 뿐만 아니라, 민간 인쇄소인 광인사(1883) 역시 일본으로부터 신식 인쇄기계와 활자를 일본으로부터 사들였다. 1896년, 「독립신문」의 사장인 서재필에 의해 또 다른 인쇄기가 들어왔다. 독립신문사는 인쇄기(500원), 한글 활자(580원), 한문 활자(350원), 영문 활자(280원)의 비용을 들여 독립적인 인쇄시설을 갖추었다. 이 비용으로 어느만큼의 활자를 들여왔는지 모르지만, 순한글과 영문만 사용하는 신문사에서 350원이나 들여 한문활자를 산 이유는, 「독립신문」이 단지 신문사가 아니라 인쇄소의(혹은 현재 출판사와 유사한) 역할을 하였을지 모른다는 추정을 가능케한다.
5. 남은 과제들
신연활자의 도입 과정과 당대의 언어 지평의 확장 가능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실증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과제들을 선결해야 한다.
첫째, 개화기 조선인들이 어떤 경로를 통하여 일본의 누군가(들)로부터 인쇄기와 활자를 구매한 것인지라거나, 당시 인쇄기술의 습득과 사용의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서재필은 누구를 통하여 인쇄기와 활자를 구매한 것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더욱이 개화기 초기의 경우에 출판 주체가 조선인인지 조선인이 아닌지, 조선 내부에서 발행한 것인지 외부에서 발행한 것인지 등에 따라 ‘최초’ 혹은 ‘민족적’ 등의 논쟁에 시달리고 있다. 예를 들어, 『독립신문』의 독자적 인쇄 및 발행(신용하, 2006/1976)인지, 배재학당의 삼문출판사(류현국, 2015)에서의 발행인지에 대한 논쟁이 대표적이며, 인천의 개항장이나 정동 지역에서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신문’을 한국사에 포함시킬지 말지에 대한 논쟁 역시 그러하다. 분명한 건, 최초의 논쟁 보다 그 영향력의 범주이며, 재조 외국인들의 각종 기록과 출판물은 민족의 독자성을 살피기 보다, 유관한 점을 살피어 (요동치는) 근대성을 파악해야 한다.
둘째, 서지학적인 관심으로 「한성주보」, 「독립신문」, 「황성신문」, 「뎨국신문」 등은 한성체(4호)를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한성체(4호)의 제작과 전파 과정에서 류현국(2015, 82-187쪽)이 다룬 바 있으나, 조선에서 어떤 목적과 계기로 한성체(4호)를 사용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우선, 한성체(4호)를 사용하는 간행물과 출판물의 목록을 작성하고, 단행본이라면 판권장을, 간행물이라면 판권사항을 정리함으로써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정치적인 상황을 감안하여, 매체와 각 매체에 연계된 정치세력 간의 구분은 이루어진 바 있다. 즉, 개화파나 수구파 등의 분류가 진행된 정도인데, 각 세력에 따라 실증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유사한 건 어떤 점인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즉, 각 매체의 자본금 조달 뿐 아니라 인쇄기계의 사용 및 조판공이나 인쇄공 등의 보유, 배송지를 통한 세력의 전파 범위 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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