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가짜라면을 만들어냈다.

    때때로 우리는 가짜라면을 만들어 놓고는 “이것이 진짜 라면”이라고 외치고 있는지 모른다. 나만의 진실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진짜”라며 헛된 표상을 내밀고 있는 건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나는 이 영상을 보며 연구자(지망생)으로, 특히나 지나간 시간에 벌어진 일을 상대해야만 하는 연구자(지망생)으로 이 가짜라면을 만드는 법을 보며 내 지난한 연구과정과 무언가 부족한 결과물을 떠올렸다. 아주 일부의 인간들이지만, 마지막 남은 근대의 지식인이 되겠다거나 (업계의 달라진 처지를 인지하고) 덕을 쌓아 업을 이루겠다는 자들이 한데 모인 연구계에서, 이 영상은 어설픈 이 연구자(지망생)를(을) 반성하게 했다.

    이 가짜라면의 이야기부터 하자. 우선, 맨 마지막 장면의 완성품을 보자. ‘진짜’ 라면과 같은 모양새다.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자. 라면 면발과 거의 유사하게 만드는 법과 국물의 색과 점성과 비슷한 소-스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라면 사발과 똑같이 생긴 그릇에 담는다. 이 라면은 하나의 모사품이다. 역할 역시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걸 라면이라고 부르는 건 무리가 아니다(라고 믿어보자). 외양과 “먹는다”는 행위의 대상이라는 점은 같지만, 맛과 만드는 방법, 실재의 가치 등 모든게 다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짜 라면이라고 할 수 없다. 결과로써의 모양새 뿐만 아니라, 라면 자체의 제조 과정과 집에서의 제조 과정, 무엇보다 맛까지 고려할 때, “진짜 라면”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연구에 대한 이야기다. 어쨌거나 최종결과물인 라면처럼 한 연구결과를 내놓았는데, 다시 검토해보니 가짜라면이었다. 물론, 사실 연구는 모사품이라기보다는 현실에 대한 설명이거나 해석이다. 그러나 현실에 대해 설명하거나 해석하는 일이기에, 연구의 결과를 현실보다 ‘현실적’이라고 믿을 때가 있다. 게다가 이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없는 경우, 유일하기에 적확하리라 착각할 때가 있다. 나는 가짜라면을 만들어 놓고 진짜라면이라고 착각해 온 셈이다.

    사회사/역사사회학 분야의 초짜 연구자(지망생)에 불과한 나의 석사학위논문에 관한 실패담은 다음과 같다.

    만드는 방법에서 발생한 문제이다. 해당 시대를 촘촘히 살피지 않고, 필요한 재료만을 골라 썼다. 이 문제의 근원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뿌리깊은 나무>로만 논문을 작성하겠다는 고집 때문이기도 하다. 연구란 덕질의 기록만은 아닌데, 오로지 <뿌리깊은 나무>에 관한 자료만을 찾았고, 관련된 역사만을 수집하였다. 이때문에 <뿌리깊은 나무>에 대해 과장된 의미부여가 존재하였다. 차차 살펴본다면, 가설에 있어 <뿌리깊은 나무>에 대한 과장된 해석이 투사되었다. ‘과학적’ 이론을 선택하고, 그에 걸맞는 대상을 선별해서 연구를 진행하는게 보통의 경우이다. 그런데 나는 <뿌리깊은 나무>를 고르고, 특성을 골라내어 분석을 계획했다.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웠다.

    – 이 잡지는 현대적 출판의 시작점 혹은 큰 계기로 볼 수 있다.
    – 이 잡지는 ‘비판’의 의미를 확장할 수 있다.
    – 더불어 이 잡지는 당시 사회의 공존하거나 뒤엉킨 전통과 근대를 보여줄 수 있다.

    나는 밝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구대상이 될 만한 이론과 경험을 잡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마땅한 이론, 즉 방법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어떤 렌즈가 없는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뿌리깊은 나무>를 1970년대 후반의 “특징”을 오롯이 담은 매체로 승격시키는 방법 뿐이었다.

    더군다나 이 가설에서 “-할 수 있다”를 “이다”로 바꾸게 되면 결과로 탈바꿈한다. 이 가설/결과에 맞추어 과정을 상정하였다. 연구의 용이함을 이유로 몇 가지 요소를 추출하고,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구분한 다음, 실험장에 집어넣은 셈이다. “이렇게 하면, 이 결과가 나오겠지. 저렇게 하면, 저 결과가 나오겠지.”라면서 꽤나 중얼거리며, 아래처럼 전개-과정을 만들었다.

    (1) 당시 출판계의 상황을 제도로써 살펴보고 “얼마나 책을 내기 힘들었는지”를 밝힌다. 유신정권 당시에 헌법 조항인 ‘출판-언론의 자유’가 정권 종속적이었는지를 살펴보겠다. 이런 상황에서 (2) 영리한 <뿌리깊은 나무>는 정권의 영향 하에서 변화를 통하여, 일종의 우회적 비판을 시도하였다.  그러려면 잡지 자체의 정체성과 인력을 구성해야 하며, 안정된 상황에서 주요한 연재를 구성하는게 급선무였다. 그 후, 우회적 비판을 시도했다. (3) 이 우회적 비판이란 (당시 정권의) 발전지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전통-문화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4) 특히, 전통-문화 가운데서도 별 볼일 없어진 개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생애사적 기록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5) 그러므로 <뿌리깊은 나무>는 잔존한 전통적 생활세계와 생애사적 기록을 통하여 나름의 사회-비판적 매체로써 역할을 하였다.

    실험장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글을 쓰며, 이 내러티브에 포함된 몇 가지 요소의 인과를 조절하고(재료로써의 사료를 문맥에 맞추어 나열하고), 요소의 강도(분량)을 조정하여, 미리 설정한 가설과 “결과”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설명없는 자료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부여하는 연구였기 때문에, 내러티브의 온전함에만 집중하였다. 그렇다면 이 상태의 라면은 진짜라면일까, 젤리로 만든 가짜라면일까?

    내 라면은 진짜라면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걸, 다 쓰고나서야 깨달았다.

    1) <뿌리깊은 나무>의 위치가 내가 상정한 것처럼 ‘당대의 매체’라고 볼 수 있을지 희미하다고 판단한다. 다시말하자면, 나 역시 업계의 <뿌리깊은 나무>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자평한다.

    (1) <창작과 비평>이나 <문학과 지성>과 같이 학술계의 담론을 이끌며 지식인계의 상징적 매체나 유신정권의 의도와 전개를 살펴볼 수 있는 정책 보고서들에 대한 연구나 각종 <르포>나 기록을 통하여 노동자들의 써발턴됨을 살펴보는 연구와 달리, <뿌리깊은 나무>의 그 위치와 역할을 살펴 볼 방법을 찾아내지 못 하였다. 즉, 시대성을 반영하는데 한계가 존재했다.

    (2) 판매와 타 매체에서의 영향력, 독자의 증언을 통하여 밝혀낼 수 있다고 판단하기는 했지만, 각 부분마다 부족한 점들이 꽤나 많다.
    – 무엇보다, 판매부수에 있어 당대 최고의 교양지인 <신동아>를 앞질렀다고 하지만, 실질적인 타 매체에 대한 파급력은 당대 이슈메이커였던 <신동아>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천재소년 김웅용의 도미가 거짓이라는 폭로성 기사이거나 이이화과 황석영의 역사소설의 고증 논쟁, 연극계에서의 논쟁 정도였다. 이처럼 타 매체에 실릴 정도로 영향력을 가졌던 분야는 “전통”이 아니라 기존 시사지와 같이 특정한 사건에 대한 “단독보도”였을 뿐이지, “전통”에 대한 글들은 아니었다. 게다가 판매의 경우에 <뿌리깊은 나무>는 일정부분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붐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즉,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구매자에게 일종의 “사은품” 역할을 하기도 했다(문제는 이 사은품 역할을 언제까지 하였는지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 타 매체의 영향력에 있어서는 일종의 사업적 파트너쉽이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동아일보>는 판소리감상회를 후원하며, <뿌리깊은 나무>에 대한 광고와 기사를 종종 실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고려는 하지 않고, <동아일보>에 실린 것이 당대의 열광인 것처럼 서술하였다. <뿌리깊은 나무>의 경우는 한국 브리태니커회사의 사보 형태에서 발전하였으며, 일정부분 ‘동아일보’의 파트너쉽이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 (뿌리깊은 나무출판사의 또 다른 간행물인 ‘한국의 발견’과 ‘민중 자서전’역시 후원 업체가 존재한다.) 분명 더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 독자의 증언을 고려한다는 것도 힘들었다. 잡지 내에 실린 독자의 편지는 일정 부분 편집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기에 직접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해서 잡지 후기가 타 매체에 실린 경우는 거의 없다. 다만 한 일기에서 <뿌리깊은 나무>는 “장사꾼 잡지”로 치부되었고, 일반 대중독자로 볼 수 있는 사람들과의 얕은 인터뷰에서는 “병원에 가면 있는 잡지” 혹은 “유별난데 재미없는 잡지”로 기억할 뿐이었다. 몇 독자들의 경우는 “전통”의 취재에 관심이 있다거나 “고급”과 “세련”된 잡지라 관심이 있는 정도였다.

    2) 더 필요한 분석은 형식과 내용에 대한 분석이었다. 당시 상황을 더 정제할 필요가 있다.
    따지고 보면, 나는 “전통”을 추구한다는 <뿌리깊은 나무>의 주장에 대한 분석을 외면하였다.
    –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통해 ‘전통’ 추구의 양상에 대해 세세히 살피지 못하였다. <뿌리깊은 나무>의 한국적인 것이라는건 “일본의 형태와 체제를 벗어나 미국적인 형태와 체제”의 교양을 의미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현대 출판의 물질적 요소는 대개 미국 혹은 서유럽의 형식을 가져다 쓰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뿌리깊은 나무>의 판형은 물론, 폰트의 생성, 지면 배치 등은 서구 출판물을 본보기로 했다는 점은 이미 밝힌 바 있다. (내용의 구성, 즉 목차의 구성과 사진의 경우도 그러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근대”와 “전통”의 접점, 즉, 사실상 전통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근대와 뒤엉켜 전해진다는 사실을 외적으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이 비교를 위해서는 한국에 유입된 구미권의 잡지와의 비교가 필요하다.
    – 정말 다시 고민해야 하는 부분은 “내용”에 있어 그러했는가란 점이다. 적어도 <숨어사는 외톨박이>나 <외롭잖은 외돌톨이>의 경우에 전통사회에 산다는 주인공들은 제목대로 대개 숨어살거나 외로운 “외톨박이”이거나 “외돌톨이”였다. 바꿔 말하자면, 그들을 근대 바깥에 위치시킨 점이다. 적응하지 못 하여 도망쳤거나, 사라졌거나 하는 과거의 연속으로써의 존재들이다. 형식과 내용을 동등하게 분석하여, 보다 심도 깊게 밝혔어야 하지만, 그러하지 못했다.

    3) 마지막으로, 기존의 평가에 기대면서 이들이 말하는 “토박이”에 대한 검토를 누락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주로 ‘토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혹자는 이에 대하여 토박이를 국민과 민중 사이 어디쯤으로 위치시키고 싶어한다. 다시 말하자면, 정권과 재야민주화운동세력의 사이 어디엔가에다 위치지으려 하는 것이다. 지금 와서 살펴보니 <뿌리깊은 나무>는 애초에 다른 뿌리에서 ‘토박이’를 차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인류학자들의 연구대상인 ‘a native’가 가장 가깝다는 판단이 이제서야 든다는 이야기다. 도시가 아닌 시골이라는 점에서, 반근대적인 생활을 집중적으로 부각하며, 근대적인 생활의 부적응자로 본 것이다. ‘한국적 민주주의’와 ‘새마을운동’에 대응했다는 지적도 일리가 있으나, <뿌리깊은 나무>가 이들을 ‘문명’과 ‘야만’의 시선으로 바라본 건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숨어사는 외톨박이’와 ‘외롭잖은 외돌톨이’에 대한 분석에서 분명히 적용되어야 했다. 나는 이렇게 박정희의 ‘한국적인 것’에 대한 대항으로 <뿌리깊은 나무>의 ‘토박이’를 설정하는데 동의해버린 셈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뿌리깊은 나무>가 말하는 ‘전통’의 실체를 밝히기보다는, 결과를 위하여 일부의 검토로 <뿌리깊은 나무>와 1970년대를 단언한 상황에 처하였다.

    아, 이런 점에서 내 연구 결과가 진짜라면이라고 말하기 힘들어진다. <뿌리깊은 나무>가 가진 1970년대 후반의 대표성을 어설피 연관시킨 점과 “당대”의 단면을 <뿌리깊은 나무>를 기준으로 선택한 탓에, 모양새만 라면에 가까와졌다. 재료 역시 엄선하지 못 하였다. 모양새에 치중하느라 엉성하게 재료를 취사선택하였고, 중간중간 필요했던 조미료가 빠져버렸다. 에고, 맛이 달라져버렸다. 다음에는 “더 나아지겠지”라는 혼잣말을 공연히 드러내기도 해보지만… 리콜은 불가할 것 같고, 스프 교체가 가능한 시기가 언제라고 특정하기는 힘든 실정이다.

    애초에 그 시대에 살아본 적 없는 역사-관련 연구자로서, 혹은 당사자가 아닌 사회-관련 연구자로서 진짜라면을 우리가 뚝딱 만들어낼 수 있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살아본 적이 없기에, 한정된 재료만 갖고 있기에 우리가 진짜라면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라면 만들기에 종사하는 일인으로, 만들려는 라면의 모양새와 과정과 재료의 촘촘함을 따져야 하는 일은 당연하다. 마지막으로, 호이징하의 <문화사의 과제>의 한 문장을 옮기며 가짜라면을 만든데 대한 반성문을 마친다.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빛에 의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더 깊이 이해할수록 객관적 진리라는 이상에 자기 마음의 눈을 보다 단단하게 붙들어 맬 수 있는 존재, 역사가는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 사실 충분한 가설을 세운다는 건, 요사이 연구자들에게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과정생/수료생의 경우는 여러 차례 시도할 경제적인 여력이 부족하다. 학위자들의 경우는 논문이 곧 경력이며, 일정한 연구 성과를 내지 않으면 지위가 위태위태한 상황이라 실패를 반복하며, 실수를 줄여 연구결과를 내기에 힘든 상황이다. 많이 알려져있다시피 실패는 허용되지 않는다.
    • 나는 실험실 대신 실험장이라 부르고 싶다. 인문/과학자들에게 (사유와 논거를)실험할 수 있는 방이란 없다.  자연과학자들처럼 공간마저 통제할 수 있는 방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를, ‘인간’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이 (인문과학의) 실험장은 밀폐된 실험실과 다르다. 때때로 대지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흔들리고, 동네 친구들, 웃어른이나 옆 동네 어르신들이 등장하면 꾸지람을 피하겠다며 실험장을 청소하거나 보기 좋은 것만을 드러내놓기도 하는 가상의 공간이다. 더군다나 자기검열을 하기 일쑤인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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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준철 혹은 날아. 연구자이며 작가.

단행본으로 <가난의 문법>(2020)을 썼고, 학술논문으로 “정부의 ‘자활정책’과 형제복지원 내 사업의 변화”(2020) “청계천에서 난지도로 – 공간정보의 생산과 도시하층민 이동의 관계에 대하여>(2023)”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