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뿌리깊은나무』는 어떤 의미인가

들어가면서

『뿌리깊은나무』는 1976년 3월 처음 발간한 잡지로, 신군부에 의해 1980년 8월 53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됐다. 이 잡지의 의미는 1970년대라는 시대를 알아보는데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는 과연 어떤 시기인가. 국가가 주도한 근대화 프로젝트가 강력하게 추동하던 시기였다. ‘잘살아 보자’는 구호 아래 개발과 현대화가 온 나라에 번지며 새 것이 옛 것을 몰아내던 북새통의 시기였다. 획일적인 산업화와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인구 급감과 이농 현상을 부추겼고, 도시 변두리의 떠돌이와 도시 내부를 떠다니는 부랑인 문제. 그리고 사회적 익명화 같은 부작용이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인구가 대이동한 시기였다. 1960년에서 1980년까지 전국 인구수가 약 150% 증가했고, 같은 기간 서울시는 342% 증가했다. 산업구조가 농업 중심에서 공업 중심으로 이농하는 현상을 가리켰고, “수도의 인구가 그 나라 인구의 10%를 넘어서”는 “비정상적인 추세”가 발생했고 이를 “이촌향도”라고 불렀다. 농촌의 낮은 소작료와 과다한 가축, 환금작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성이 낮은 쌀농사 중심의 농업 등에 대한 실리적인 이유로 많은 ‘빈농’이 도시로 이동한 결과였다. 서울의 삶이 ‘기회’만은 아녔다. 다수의 빈농은 자연스럽게 도시하층민이 되었고, 이들은 무허가주택 철거와 도심재개발에 의한 반강제적인 이동을 겪어야 했다. 이 과정은 단순하게 인구가 통계적으로 어느만큼 이동했다는 것이 아니라 ‘지역성’이 희미해져 가는 과정이었다. 

더구나 1970년대 유신 체제는 북한과의 대립 구도를 빌미로 권위적이며 억압적인 사회 통제를 시도했지만, 발전에 대한 약속인 동시에 통일성을 빙자한 정당화를 논하며 전사회적으로 ‘한국적인 것’을 발명하길 바랐다. 문화공보부는 ‘민족문화’ 담론을 주도했고, 무형문화재 제도를 성립하며 전통을 ‘발굴’하며 국가가 ‘지정’하는 방식으로 민족주의, 특히 관제 민족주의를 구축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렇게 발굴된 전통이 민족문화의 ‘원형’으로 고정된 데 있다(정수진, 2006). 국가의 필요에 따라 지정되고 동원된 전통이, 정작 그것을 살아온 사람들의 실제 삶과는 유리된 것이었다. 새마을운동을 비롯한 ‘근대화’와 ‘한국적민주주의’ 등의 성취가 전통을 파괴하는 한편, 민족문화 중흥과 같은 담론과 정책이 전통을 박제하는 아이러니가 공존했던 것이다. 즉, 전통사회에서부터 이어졌던 생활양식(lifestyle)이 해체가 본격적으로 이뤄졌으며, 그 범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일상의 층위까지 생활 전반이 뒤바뀌었다. 게다가 도시와 농촌의 물질적 순환이 끊어지면서 사회의 기반이었던 농촌이 점차 자생력을 잃어 가는 시대였다. 

바로 이런 시대에 창간된 잡지가 『뿌리깊은나무』였다. (인용하자니 마음이 불편한 한 시인은) 『사상계』의 시대에 이어 『뿌리깊은나무』의 시절이 왔다고 읊을 만큼, 이 잡지는 1970년대 문화지형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 잡지의 간행도 쉽진 않았다. 당시 유신체제에서는 출판 허가를 받기란 여간 어려웠다. 그나마 1976년에 창간이 가능했던 이유도 흥미롭다. 발행처인 한국브리태니커회사가 사내보 『ENBCO』를 1970년 4월 『배움나무』로 바꿔 정기간행물로 등록하여 이 사내보를 한참 냈다. 이후 1976년 그 제호와 체제를 변경해서 『뿌리깊은나무』로 다시 바꿨다. 형식적으로는 창간이 아니라 기존 사보의 제호 변경이었다. (그래서 창간호가 ‘7권 2호’였다.) “검열의 우회로”를 통해 등장한 잡지는 한글 전용, 가로쓰기, 미국식 편집 체제, 강한 편집권이라는 파격적인 형식을 갖추었다. 1976년부터 1980년 강제 폐간까지 4년 5개월, 총 53호.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잡지가 시도한 것은 국가가 독점하려 한 ‘전통’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일이었다. 

‘토박이 문화’는 왜 필요했나

한창기는 『뿌리깊은나무』 의 발행인이자 편집자이며 저자였지만, 사실상 잡지 그 자체였다는 평가가 높다. 강준만(1997)은 한창기를 두고 “박정희의 민족문화에 대응하는 토박이 문화”를 제기한 사람으로 위치 짓는다. 한창기가 문화의 바탕이 “토박이 문화”에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전통을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얕잡힌 숨은 가치’를 펼쳐내고, ‘대중’문화에 치이지 않으면서 변화가 주는 진보와 조화롭게 만나며 싱싱하게 뻗어나가는 것이어야 했다. 이런 측면이 잘 드러나는 지점이 잡지의 형식이자 물적 특성이었다. 기존 정기간행물이나 단행본 출판에 관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편집자와 기자로 뽑았고, 서구 출판 시스템에 가까운 새로운 판형과 지면 구성을 시도했다. 한글 전용이라는 방침에 맞추어 잡지의 형식과 내용을 재편했고, 가장 대표적인 건 “뿌리깊은나무”라는 잡지명의 디자인이었다.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기반으로, “우리말, 환경, 교육, 예술”(한창기, 1호: 170-171)을 관심거리로 삼고, 전통의 흔적을 담는 연재를 기획했다. 

더 나아가 이 잡지가 당시 국가의 ‘민족문화’와 어떻게 달랐는지 검토하자. 당시 국가의 민족문화는 위로부터의 발명이었다. 즉, 무형문화재 제도를 통해 전통을 ‘원형’으로 고정하고, 민속학자들과 공무원들이 ‘발굴’한 것을 국가 행사에 동원하는 방식이었다(김창민, 1997).  『뿌리깊은나무』가 공격한 건, 이를 뒤집어 아래로부터 기록하는 일이었다. (‘아래로부터의 역사’와 같은 개념과 ‘구술사’와 시도가 마땅치 않았더 당시에) 전통사회의 ‘유산’이나 ‘마지막 남은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 개인의 생애와 사회적 의미, 현재의 삶을 글의 장으로 끌어내어 전통문화의 문제를 다뤘다. 

이러다보니 이 잡지는 애매한 잡지로 읽히기도 했다. 당시 권력 비판의 한축을 이뤘던 직접적 비판 세력에게는 맹한 잡지였고, 어떤 이에게는 전통문화를 수호하는 교양지로 이해됐다. 그렇다고 영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종의 문화적 우회를 시도했다고 볼 필요가 있다. 근대화의 물결 속에 축소되고 파괴되고 잊혀져가는 전통 생활양식을 기록하는 전형을 새롭게 구축한 것은 분명한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이 ‘토박이문화’를 기록하는 일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무래도 현재 우리는 어떤 문제를 품고 살아가는지 생각하는게 먼저겠다. 순천에서의 삶, 고흥에서의 삶은 서울과 광주 같은 곳에서의 삶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이전에도 달랐겠지만, 지금의 다름에는 ‘소멸’의 위기와 ‘부족’한 삶이라는 뉘앙스가 풍겨진다.) 여기서 무엇이 ‘위로부터’ 이루어지는 압력인지 생각해보자. 이는 대개 ‘지방소멸’과 지방의 비극적인 운명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대안으로 대개 외부 자본을 동원하거나 획일화된 관광지 개발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1970년대 국가가 전통을 박제하고 동원했던 위로부터의 방식의 반복일 따름이다. 이러한 사정의 가장 큰 문제는 전통과 지역성을 외부의 시선으로 전시하고 소비하는 것이며, 그 지역이 가진 고유한 생활양식을 고정하고, 그 문화를 기반으로 지역 인프라를 구축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시도를 하지 않는 데 있다. 애먼 것을 이식한다고, 지역이 살아나는 건 아니다. 이것이 한창기가  『뿌리깊은나무』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당시 만들어진 민속촌에 입주한 김 모가 털어놓은 자신의 민속촌 생활 사정은 바로 한창기도 공감했을 말일 테다.  “허는 일은 없이 편해서 좋습디다만, 내가 사람이다 허는 생각보담 나는 동물원의 원생이(원숭이)다 허는 생각이 들었다. 귀경오는 관광객 앞에서 빈 절구질을 하다, 양반 흉내나 내고, 흥겨울 것 하나도 없는디 맨날 북 장고 꽹가리나 쳐쌓고 통 사람 사는 것 같지 않아.” 

‘남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토박이 문화’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다. 그것도 새로운 사람이 아니라 남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특히 10여 년 전 내가 관심을 가졌던  『뿌리깊은나무』의 대표 연재인 〈숨어사는 외톨박이〉와 〈외롭잖은 외돌톨이〉는 전통사회의 ‘유산’이나 ‘마지막 남은 사람들’로 명명한 대상들을 기사화한 것이다. 이 연재들이 흥미로운 이유란, 국가가 전통의 담지자들을 대했던 방식과 잡지가 그들을 대했던 방식이 극명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무형문화재는 하나의 제도로, 국가가 전통을 ‘보존’하겠다는 선언과 이를 잇는 정책이었다. 그래서 기술과 기예를 가진 사람을 선별하여 ‘지정’했다. 『뿌리깊은나무』는 지정된 이유보다 지정된 이후 그들의 삶을 묻는다. 한산모시를 짜는 중요무형문화재 14호 문정옥의 사정이 대표적이다. 기자 강창민이 찾아간 그는 “넋나간 사람처럼 말에 앉아 낙숫물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후 텔레비전에 몇 번 나가거나 3달마다 돈을 받기는 했지만, 신경병이 심해졌고,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장항 도립병원에서 치료하라는 통지만 보냈을 뿐이다. 모시밭 200평을 사주겠다는 약속만 기다리게 했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기술이라지만 ‘사양산업’에 불과한 현실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국가의 ‘민족문화’ 정책이 실제 그 전통을 살아가는 사람의 삶과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지를 이 사례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문정옥에게 국가는 그의 기예를 ‘박물’했지만 그의 삶을 돌보지는 않은 셈이다. 

전라남도 장성의 입암산성에 살았던 “댕기 마을” 사람들의 사정은 또 달랐다. 당시 <동아일보>는 그들을 “끝내 문명을 외면한 채 원시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람들로 보도했다. 국도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을 들었을 때야 ‘현대를 찾아 돌아왔다’는 비문명(원시)과 문명(현대)이라는 대립 구도로 마치는 기사였다. 3년 뒤, 『뿌리깊은나무』는 (아무리 생각해도) 의도적으로 그들을 끌어왔다. 잡지는 ‘원시’를 말했던 기존의 보도와 달리 ‘역설’을 말했다. 나이 많은 가장들은 옛 풍습을 지키며 살기를 원하지만, 젊은이들은 “자라나는 동생들은 신식 공부를 해서 넥타이 매고 양복 입은 신사가 되기를 원”한다. 한 쪽에서 이미자의 ‘타국에서’가 들리고 옆집에서는 ‘육자배기’ 가락이 들려오는 공간, 이것이야말로 근대화 과정에서의 전통사회의 일상이었다. (원시는 현대와의 대립 구도를 상정한 바깥 것들의 상상일 따름이다!) 사실 이들의 가장인 김 모가 전라북도 부안에서 약초 재배를 위해 이 지역에 터를 잡은 사람이었고, 그 후부터 아이들의 머리를 땋아 늘이게 하고 한복을 입히며 자신도 상투를 틀었다. 이들은 ‘토박이’가 아니라 ‘재현’하는 사람이었다. 『뿌리깊은나무』는 이 사실도 밝히면서, 그럼에도 그들이 처한 전통을 지키겠다는 욕망과 근대를 향한 욕망이 한 가족 안에서 충돌하는 장면을 기록했다. 

남사당패 이야기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 명의 인간문화재를 통해 남사당의 삶을 기록하는데, 기자는 그들의 “남색” 경험에 당혹감을 내보였다. 남색팔기 삐리들은 구경꾼 앞에서 치마를 벌리고 돈을 걷어야 했고, 밤이면 떠돌이 장사꾼이나 수염이 허연 노인들에게도 남색을 팔았다. 기자는 이를 ‘처절한 삶’으로 이해했고, “살기 위해서 무엇인들 팔지 않을 수 없는 계급”의 문제로 수렴했다. 그 자체로 한계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기록은, 민족문화의 자랑스러운 ‘원형’으로 박제된 남사당놀이 뒤에 그들의 실제 삶을 세상에 꺼내놓은 의미가 있다. “우리는 그들 남사당이나 그들의 놀이를 지금과는 별개인 과거 역사 속의 굳은 사실로만, 갑자기 생긴 특수한 삶의 형태로만 개념화시켜 받아들이고 있다”고 기자가 지적했다. 국가가 문화재로 지정한 것은 그들의 놀이였지, 그 놀이를 한 사람의 삶은 아니었다. 

이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이 잡지가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 묻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지켜야 할 사람을 어떻게 골랐으며, 또 대하고 있는지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국가는 문정옥의 기술은 보존하려 했으되 문정옥의 병은 돌보지 않았다. 입암산성 마을은 ‘원시’의 구경거리로 소비됐다. 남사당패의 놀이는 민족의 자산이 되었으되 그들의 삶은 ‘떳떳치 못한’ 것으로 감춰졌다. 『뿌리깊은나무』가 시도한 것은 이 순서를 뒤집으려 시도했다.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구경거리가 아니라 역설을, 자랑이 아니라 삶의 그늘까지 기록하려 했다. 기자는 기자가 만난 사람들의 기예와 정체성을 팔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를 빌려 그들 삶의 의미와 가치를 드러냈다. 

이건 단순한 향수가 아니다. 『뿌리깊은나무』는 권위주의적이며 강력한 통제가 이뤄졌던 사회에서 전통 농업사회의 자장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던 세계를 톺아보며 작은 개개인의 생애와 사회적 의미를 보여줬고, 이는 일상적 삶과 문화의 맥락에서 역사와 정치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도였다. 그리고 이 질문은 지금 여기로 돌아온다. 우리는 지역에서, (    )을/를 위해 우리가 마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지역의 문화를 이야기할 때 그 문화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이 빠져있지는 않은가. 관광 상품이나 축제 등으로 지역을 포장할 때, 50년 전 민속촌에서 “동물원의 원숭이”같다고 말한 김 모의 한숨이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가. 지역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결국 거창한 정책 담론과 커다란 수치가 아니라, 그 지역에서 오랜 시간 축적된 사람들의 일상적 삶과 기억이 이어지는 일이다. 이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기록으로 다 되는 것도 아니다

『뿌리깊은나무』는 사람의 삶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깨침이 다가온다. 기록은 소중하다, 기록으로 잊혀지기 쉬운 걸 기억해야 한다, 뭐 이런 이야기들 말이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어딜가도 ‘아카이브 열기’가 뜨거웠다. 지역의 것을 수집하고, 정리하고, 전시하는 일, 글을 쓰는 나도 십 년 넘게 그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 행위는 늘 의심스럽다. 

우리는 기록 현장에서 만나는 걸 ‘레디메이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청계천에서 기록활동을 하던 때의 일이다. 내가 그들의 작업장에 찾아가 기술자를 만나면, 그들이 가진 현장에서의 쓸모와 삶이 아니라 나는 그들을 그 현장을 대표하는 오브제로 이해한다. 개조한 작은 도구를 보며 장인의 몸과 하나가 된 기술 자체라며 과장해서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 이해가 기록과 수집이라는 사업이 되고, 또 이게 또 다른 사업의 기준점이 되며, 아카이빙된다. 물론 의미 있는 물건을 보관하는 일은 수십 년 전에 찍은 사진 한 장을 가진 것과 비슷할 것이다. 과거의 한 장면을 알려주는 ‘소중한’ 오브제이니까. 그러나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아카이빙은 대개 무언가가 사라지기 직전이거나, 사라지면서 시작된다. 돈과 인력의 문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실재가 사라져도 그 흔적을 남길 요량으로 하는 일이다 보니 늘 뒤늦다. 수집가들은 “아카이브를 구축해야 후대가 현재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현재를 역사화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가볍게 말하자면, 과거에 유행하던 타임캡슐 묻기가 더 크고 자주 일어나는 셈이다. 그러나 무얼 ‘기록’할 것인가? 지금 우리 사회는 저장해야 할 게 너무 많다. 기록의 이유는 또 이렇다. 이걸 발굴하는 건 기획자/수집가인 나의 안목이다. 대외적으로는 쓸모를 다하거나 곧 다할 예정이라 사라져가는 것이다. 이때 내 안목은 타당할까? 

둘째, 아카이빙이 투기적 개발과 급격한 현대화에 대항하는 적절한 도구일까? 서울은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편찬원 등 공공기관이 주도하는 ‘동 단위’의 기록 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그 이유는 늘 ‘사라지기 전에’ 기록해야 한다는 명분이다(나 역시 이미 세 개 동의 역사를 혼자 썼거나 함께 썼다). 지금은 경제의 순환을 빌미로 (전국적으로) 1980-90년대에 형성된 주거지역, 상업지역 대개가 재개발 사업의 타겟이 됐다. 거의 예외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아카이빙은 마치 투기적 개발에 대항해 과거를 기록하는 전사(戰士)적 이미지로 보이기도 한다. “아카이브를 구축하면,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후대에서 역사로 이해할 거”라고. 그렇지만 이건 오만이다. 아카이빙은 전후를 비교하는 데서 ‘과거’의 모습을 재현하는 도구로 기능하며, 결과적으로 이후의 변화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기록은 오히려 재개발과 친연성이 있다. 게다가 전시 등의 ‘문화프로그램’ 역할까지 갖고 있으니 오히려 재개발을 찬성하는 이들에게도 거부감이 적다. ‘역사화’가 곧 ‘저항’이 아니다, 착각하지 말자. 

셋째, 기록을 할 바엔 이미지 저장을 넘어서야 한다. 아카이빙은 사라진다는 이해를 전제로 이뤄진다. 수집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수집된 것들은 대개 쓸모없는, 혹은 쓸모없어질 것들이다. 그러다보니 예산과 인력 같은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아예 없는 것보다 나은” 상태를 끊임없이 되내이게 된다. 기록 현실에서, 수집에 배정된 돈은 없다. 돈을 주고 유물이나 작품을 취득하는 박물관·미술관과 달리, 아카이빙은 무상취득 혹은 주인 없는 물건을 취득해 이뤄진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상황은 아카이빙이라는 행위가 수집 대상의 경제적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는 건 아닐까. 청계천에서 한 가게의 폐업 직전 도구와 시설을 수집했을 때, 그건 지독하게 씁쓸한 일이었다. 그렇게 모은 건, 낡은 세계의 규범들과 은어, 장소와 쓸모를 다한 도구들, “죽은 자들의 백과전서”인 인터뷰, 오래된 파사주, 연결되었다 끊어진 것들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가게는 재개발로 문을 닫았다. 

넷째, 기록은 현재와의 대비 속에 쓸모를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전시장에 박제하지 말자. 솔직히 말해보자. 아카이브란 만인의 것인가? 과거를 그대로 보여준다기보다 수집가 혹은 전문가들의 의도에 따라 기획되는 건 아닐까? 기록의 대상이 당신의 수집 행위에 어느만큼 개입할 수 있을까? 또 아카이브의 결과는 무엇일까? 대개는 수집한 것들을 이어 붙여 전시를 하는 게 보통인데, 전시의 주제는 대개 ‘어떤 과거의 흔적과 부활’, ‘과거로의 일시적 회귀’ 같은 것들이다. 미래를 말할 수 없는 상태, 기록 대상을 현실로 끌어올 수 없는 상태에 머문다면 우리는 현재를 의심해야 한다. 이때 기록에 대한 필요성은 패배감이 만든 정당화이며 사라질 위험에 대한 안쓰러움일 따름이다. 우리는 기록을 넘어, 기록대상이 되는 사라질지 모르는 것들이 현재와 대화하게 만들겠다는 꿈이라도 꿔야 하는 건 아닐까. 예컨대, 기술자라면 작업에, 장사꾼이라면 장사에, 예술가라면 창작에 끌어들여야 한다. 

무엇이 사라지지 않아야 하는지를 묻자

『뿌리깊은나무』로 돌아가 보자. 이 잡지가 한 일은 기록이었다. 사라져 가는 전통, 잊혀져 가는 사람을 찾아가 글과 사진으로 남겼다. 그런데 이 잡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카이빙과 달랐다. 바로 사라짐을 전제로 하고 수집한 것이 아니라, 아직 살아 있는 삶의 한 가운데로 들어갔다. 문정옥의 신경병을, 입암산성에서 벌어진 신구 간의 갈등을, 남사당패의 불편한 기억을 기록했다. 이건 ‘사라질 것을 남기려는’ 행위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일을 드러내는’ 행위였다. 당사자의 삶이 현재형일 때, 그 삶에 개입하고, 그 삶을 (앞이든 뒤든) 이끄는 기록이다. 바로 여기서 단순한 ‘기록’과 다른 점이다. 

나는 연구를 하고, 조사를 한다. 대개는 분석하고, 때로는 기록하며 사회와 역사에 내 의견을 기입한다. 그런데 이 ‘기록’이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집은 수집일 뿐, 운동이 아니다. 기록은 중요하지만, 기록만을 위한 기록은 사라짐에 동의하는 일에 가깝다. 모두를 위한다고 ‘아카이브 구축’ 사업이 필요하다고 떠드는 일보다 필요한 건, 각종 현장에 뒤엉킨 온갖 욕망을 드러내고 조금이나마 함께 풀어내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래도 기록이 필요하다면, ‘자랑’하지 말고, 그와 나 사이에 얽힌 문제를 드러내고 풀어 낼 아카이브 정도면 족하다. 즉, 함께 활용할 자산이어야 하며, 함부로 타인의 시선과 욕망에 휩쓸리지 않는 ‘반대하는 자산’이 필요하다. 

한창기가 『뿌리깊은나무』를 통해 했던 일은 함께 활용할 ‘반대하는 자산’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만드는 민족문화 아카이브가 아니라, 그 밖에 놓인 사람들의 삶을 현재형으로 기록하는 일. 그것은 사라짐을 애도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라지지 않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묻는 행위였다. 어떤 지역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록을 한다면, 무엇이 사라지는가를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이 사라지지 않아야 하는가를 함께 묻는 일, 그리고 비슷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연대하여 공동의 기록을 만드는 일. 이것이 『뿌리깊은나무』가 우리에게 보여준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