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제도는 얼마나 힘이 센가: ‘탈수급 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소준철, 2026/1,  「제도는 얼마나 힘이 센가: ‘탈수급 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복지동향』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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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년간 탈수급 지원 정책의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이유는 제도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제도가 너무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과신했기 때문이다. 제도는 근로능력을 측정하고, 의욕을 진단하며, 자립의 경로를 설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제는 AI까지 동원하여 수급자의 마음을 읽고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제도가 정교해질수록 탈수급률은 떨어졌다. 이 역설이 드러내는 진실은 명확하다. 제도의 힘에는 ‘경계’가 있다. 제도는 근로능력을 ‘분류’해냈지만, 출근길의 두려움까지 읽어낼 수는 없었다. 제도는 의욕을 ‘측정’할 수 있었지만, 수십 년간 생애과정에서 경험한 모멸감과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는 없었다. 제도는 자립의 경로를 ‘설계’했지만, 각자의 삶이 흐르는 서로 다른 시간의 속도를 통제할 수는 없었다. 제도는 인센티브를 ‘투입’할 수 있었지만, “다시 빈곤에 빠지면 어쩌지”라는 깊은 공포를 지울 수는 없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제도가 묻는 질문 자체였다. “누가 일할 수 있는가”라는 분류의 질문은 19세기 영국 구빈법의 ‘가치 있는 빈민’과 ‘가치 없는 빈민’을 나누던 이분법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도덕적 판단이 ‘과학적 용어’로 포장되었을 뿐, 제도는 여전히 개인을 심문하고 자격을 검사하는 권력의 기술로 작동했다. “왜 탈수급하지 않는가?”라는 추궁은 정작 “왜 이 사회에는 빈곤을 벗어날 수 있는 일자리가 사라지는가?”라는 구조적인 질문을 은폐했다. 이처럼 제도가 숫자에 매몰되는 동안, 우리는 ‘감정’뿐만 아니라 그 ‘물적 토대’를 간과했다. 자신감은 교육 프로그램의 이수증에서 오는 게 아니라, 실패해도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안전감에서 나온다. 근로의욕은 저축 통장의 잔고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관계 속에서 자란다. 그런데 제도는 관계를 기능적으로만 이해한다. 제도는 참여자를 만나는 실무자에게 성공의 실적을 요구하며 더 많은 사례와 서류를 떠넘겼고 관계를 위한 시간을 무시했다. 제도는 수급자의 능력을 문제 삼았지만, 정작 그들이 일하며 성장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일은 남의 일인 양 생각했다.

우리가 확인한 건 제도의 ‘실패’가 아니라 제도의 ‘한계’였다. 제도는 물질적인 조건을 마련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인간의 존엄을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기회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공포를 지울 수는 없었다. 수치를 관리할 수는 있어도 가난의 문화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돌보지는 못했다. 이제 제도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더 정교한 평가 도구와 예산을 투입하는 방식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25년의 시행착오는 제도의 완결성을 높이는 것만으로 답을 찾을 수 없음을 증명했다.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제도를 고치자거나 제도를 넘어서자는 이분법은 잘못되었다. 제도는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제도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의존을 재조정해야 한다. “어떻게 수급자를 탈수급시킬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사회에서 사람들이 가난의 공포 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를 물어야 한다. 제도를 폐기하자는 말이 아니다. 제도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제도 너머의 영역, 그러니까 관계, 신뢰, 시간, 존엄과 같은 것에 대한 사회적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제도의 힘은 우리가 믿었던 것보다 약했다. 그러나 이 ‘약함’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변화를 시작하는 가장 단단한 지점이다. 25년의 시간이 증명한 것은 제도의 무능이 아니라 제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절망이 아니라 시작이다. 제도가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제도 안에서 제도를 넘어서는 실천을 시작할 수 있다. 실무자가 매뉴얼 너머 수급자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정책 입안자가 통계표를 덮고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우리는 제도의 경계 어딘가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제도가 요구하는 실적과 현장이 필요로 하는 시간 사이에서, 정책이 측정하는 성과와 당사자가 느끼는 변화 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갈등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갈등 속에서만 새로운 복지의 가능성이 열린다. 제도를 완전히 신뢰하지도, 완전히 불신하지도 않으면서, 제도의 틈 사이로 스며드는 관계와 연대를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25년의 시도가 우리에게 남긴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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