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늙어도 괜찮은 사회 만들기

이 글은 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의 기관지 <걷고싶은도시> 2024년 가을호에 실린 글입니다. 원문은 다음을 눌러 확인해주세요. 글 읽기


나이만 문제인가

사고 하나가 발생했다. 서울시청 앞 역주행 사고 혹은 서울 시청역 교차로 차량 돌진 사고로 불리는. 1955년생 68세 남성이 운전하는 차량이 도로 위를 역주행했고, 보도 위 사람들을 덮쳐 1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운전자는 급발진을 주장했지만, 경찰은 후에 운전조작 미숙이 원인이었다고 밝혔고, 그를 구속했다.

사고 이후 고령 운전자 사고 소식과 대책이 쏟아졌다. 뉴스 분석 사이트인 빅카인즈에서 “고령”, “운전”, “사고”를 검색하면 (2024년 7월 1일부터 8월 29일까지) 총 188건의 기사가 나온다. 보통 동일한 기간 중 10건(2022년), 18건(2023년) 정도의 뉴스가 발견되는 것에 비하면 꽤 많은 수다. 2024년 7월 시청역 사고 이후 발행된 기사에서 추출한 주요 키워드를 놓고 보면 다음 그림과 같다.

시청역 사고 자체에 관한 키워드(“시청역 참사”, “급발진”, “페달 오조작”, “사상자” 등) 뿐만 아니라 대책에 관한 키워드가 흥미롭다. “면허 반납”과 “조건부 면허제”는 얼핏 듣기에는 타당한 정책으로 보이지만, 국가가 나서 노인의 운전을 제한하자는 것이었다.

고령 운전자 사고 소식을 다룬 기사에 대한 의견 역시 대개 부정적이었고, 노인의 운전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7월 말, 브레이크로 착각해 가속 페달을 밟아 2명이 사망한 사건을 다룬 기사에 대한 악의적 댓글을 예로 들어보자. ㄲ는 “악셀과 브레이크를 헷갈리면 운전대를 놔야”한다 적었고, ㄱ은 “70대 노인네들 면허정지”, ㅌ은 “급발진 소리는 안한 걸로 봐서는 양심은 있다……………………” 라는 댓글을 달았다.1) 또 다른 기사들의 댓글을 살펴봐도 대개 노인의 운전이 문제라는 투였다.

차별이 늘어가는 사회

그러나 비수도권 도시와 농촌의 경우 운전은 생계이며 생활이다. 대중교통이 없거나 배차시간이 긴 곳에서는 유일한 이동 수단이 자차인 까닭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작정 노인의 운전을 제한하자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른 이유도 있다. 그럼 65세 이하 운전자는 문제가 없을까? 20대 운전자에 의해 발생하는 사고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더 많다. 그렇다고 해당 연령대의 운전을 제한하자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이로 문제의 원인을 뭉뚱그려 무언가를 대안으로 내놓기란 무척 난감하다.

더구나 노인의 수가 늘고 있다. 사고가 발생하고 열흘쯤 지난 7월 10일, 행정안전부는 전체 인구 51,265,238명 가운데 만 65세 이상 인구가 10,024,468명(약 19.5%)이라고 밝혔다. 별일 아닌 일처럼 보이지만, 역사상 처음으로 노인 인구가 1,000만 명을 돌파한 것이었다. 또 인구 오분의 일이 노인인 초고령사회로 이행하기 직전이 됐다는 말이기도 했다. 한국사회는 이렇게 그 어떤 저항도 없이 이십여 년 동안 경고해 온 고령화사회에 진입했다.

고령화라는 말에 휘말려 불안감이 커지고, 노인이 많아져 사회문제가 새롭게 발생할 것 같다는 ‘느낌’이 커지고 있다. 이렇게 노인은 사회불안의 대상이 됐다. 이런 상황은 ‘연령주의’가 심화되는 사정일 것이다. 연령주의는 나이에 따라 정상적 인간인지 비정상적 인간인지를 가늠하려는 나쁜 태도이며, 연령에 따른 차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앞서 보았던 과학적 사실을 오용하여 노인에 대한 차별을 공연(公然)하게 만드는 현재 상황과도 맞닿아 있다. 고령화는 현실이다. 그러나 고령화가 ‘다가온 지옥’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지옥이 다가오고 있다고 착각하며, ‘지옥 같은 문제’를 자꾸 찾고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고령화로 사회가 위험하다며 고령자를 구석으로 몰아넣는 일이, 달리 말하자면 차별하는 일이 증폭되고 있다. 새로운 문제는 연령주의에 기반한 연령에 따른 차별이 심화된다는 것이다.

나이듦은 어떻게 초라해졌는가

특히 나이듦은 과학적 발견과 같은 ’강한‘ 발견에 의해 규정된다. 대표적으로 의학과 심리학은 나이듦을 사회에서 부적절한 신체와 부적절한 심리로의 전환을 가정한다. 먼저 의학은 사람들이 나이듦을 신체적이며 정신적인 기능의 쇠퇴로 바라보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한 병원은 노년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심장이나 혈관의 기능이 떨어지고 심장의 근육이 약해짐으로써 심혈관 질환의 발생 빈도가 증가하며, 건강 관련 체력 요소인 심폐지구력, 근지구력, 근력, 유연성이 감소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신체적 변화가 우울증과 무기력을 야기하고 결국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수 있습니다.”2) 또 심리학은 정신적인 쇠퇴를 다음처럼 논한다. 심리학자 장근영은 “늙음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며, “우울함 … 내향성 … 성 역할의 변화 … 신체적, 심리적인 경직성 … 옛것에 대한 애착이 커지며 … 조심성이 증가하고 … 후대에 유산을 남기는 것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욕구가 커진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경직된 노인”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사회는 더 이상 늙어감을 ‘지혜의 퇴적’으로 보지 않는다. 이제 나이듦은 신체와 정신의 쇠퇴로 구체화되며, 사회적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의학과 심리학은 이러한 시선을 강화해왔고, 그 결과 우리는 나이듦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잃어버렸다. 1982년 제정된 시민헌장인 「경로헌장」의 “노인은 나라의 어른이다”라는 구절이 상징하던 노인의 (전통)사회적 역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우리를 낳아 기르고 문화를 창조 계승하며 국가와 사회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여 온 어른”이란 주장은 이제 작은 울림도 주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것을 학문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과학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나이듦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확산된 것은 사실이다. 이는 결국 나이듦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혐오의 자리

노인은 개인과 국가 모두에게 부양 비용과 돌봄 수행의 증가를 야기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인식은 노인의 존재를 사회적 짐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사회는 노인을 안락한 노후를 보내는 사람들로 이상화했지만, 현실에서 많은 노인은 여전히 생계를 위해 일을 하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가난해지고 있다. (2023년의 한 토론회서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1944년생, 1945년생, 1946년생의 특정 코호트의 상대적 빈곤율은 매해 증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노인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가난한 노인의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사람들은 부양 비용과 돌봄 부담이 커지는 상황을 점점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경제활동인구(노동가능인구, 생산가능인구)에 비해 비경제활동인구가 늘어나 부담이 늘어난다”라는 경고가 반복되면서, 경제활동인구라 간주되는 청년 세대와 비경제활동인구인 노인 세대를 대립시키는 구도가 심화되고 있다. 이 대립은 점차 세대 간 갈등으로 발전했고, 사회 문제의 원인이 노인에게 있다는 인식이 퍼지게 됐다. 결국, 노인은 불필요한 비용을 발생시키는 존재,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존재, 나아가 다른 세대에 피해를 주는 잉여적 존재로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혐오는 항상 약한 자들에게 집중된다. 노인 혐오를 선동하는 이유는 대개 비슷하다. 새치기를 한다거나, 교통규칙을 지키지 않거나, 막무가내로 밀친다거나, 괜한 ‘꾸중’을 늘어놓는다는 경험담 등이다.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이들은 분명 문제다. 그렇지만 잘못된 행동을 하는 일부가 전체를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시청역 앞 사고의 가해 운전자가 만 65세 이상인 노인이라서 노인의 운전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은 구체적인 사실의 확인이 아닌 혐오 표현에 불과하다

사회의 불안정을 위해 세대 간 갈등을 넘어 세대 간 연대를 기초로 한 패러다임 역시 필요하다. 청년과 노인이 마주치는 자리를 늘려야 한다. 또 청년과 노인을 경제성을 기초로 한 부담과 이익의 구도로 가두기보다 여러 세대가 자신의 입장에 맞는 사회를 위한 책임과 의무를 재설정해야 한다.

자기혐오의 사회

더 나아가 운전면허 반납과 같은 정책적 논의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갓 태어난 아기가 말하지 못하고 걷지 못하는 것처럼 나이 든 노인이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걷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나의 다른 글에서 쓴 문장이 떠오른다. 그렇다고 그들을 집에서만 머물게 하거나, 지하철만 타게 강요할 수는 없다. 느리게 운전한다고 손가락질을 받게 하는 것도 옳지 않다. 신체 능력이 현저히 저하되지 않는 한, 노인의 생활은 그들의 신체적 변화에 맞춰 조절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노인의 삶은 사회의 잉여로 치부되고 말 것이다.

이제 다시 운전대 앞으로 돌아가보자. 내가 아는 한 어른은 나이가 들면서 느린 속도로 운전하다가, 젊은이들과의 충돌이 잦아지자 결국 면허를 자진반납했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 삶의 일부를 포기한 것과 같다고 씁쓸해했다. 이렇듯 노인이 노인의 생활양식을 수행한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대우받아도 되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다. 더 나아가, 노인을 사회 문제의 근원으로 치부하는 현상은 연령주의의 심화와 연령차별로 이어진다. 연령주의의 심화는 노인에 대한 차별을 강화하고, 사회 전반의 결속을 약화시키며, 노인의 능력과 가치를 절하함으로써 사회를 악화시킨다.

연령 차별은 한국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다. 이는 교육, 건강, 경제, 그리고 재개발과 같은 공간 수준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의식 실태조사』에서도 노인의 인권 존중이 매년 줄어들고 있다고 밝혔다. 노인은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 아래서 차별과 소외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늙어도 괜찮은 사회

이제 우리 사회는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 노인은 운전을 하면 안 되는 존재인가? 그보다도 노인이 자신의 신체와 정신에 맞게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하지 않는가? 노인을 사회의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비아냥과 혐오의 대상이 삼아도 되는가?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노인을 소외시키지 않고, 노인 스스로가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나이에 따라 도매금으로 처리되지 않고, 노인이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고령화 사회의 도래는 필연적이며, 이에 따른 사회적 변화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길은 혐오와 배제가 아닌, 연대와 공존이다. 노인을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는 사회, 그들의 지혜와 경험을 존중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회적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돌봄하는 나’와 ‘돌봄 받는 나’의 상호 의존은 우리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것이다. 이 길은 쉽지 않지만, 우리가 함께 노력한다면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켄 로치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인공이 한 말을 다시 떠올린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우리는 노인의 자존심을 지켜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자존심을 잃지 않게끔, 자존감을 갖게끔 하는 사회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