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평화저널 플랜P 11호(2023/3)에 기고한 글입니다.
비정상이란 무엇인가
근대 사회에서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개념은 일상용어로 사용될 만큼 익숙한 대립개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근대에 들어 정상의 개인들이 살아야 하는 존재이며, 비정상의 개인들이 죽어야 하는 존재로 구분되고, 인간이라는 종에도 우등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이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고 보았다. “열등한 인종(퇴화된 인간이나 비정상적 인간)이 좀 더 사라지고, 비정상의 개인들이 좀 더 제거된다면 종의 퇴화를 좀 더 잘 막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 개인이 아니라 종으로서의 – 나는 좀 더 강하고, 좀 더 활기차게 살아남아 많은 후손을 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는 식이다. 푸코는 이처럼 우생학적 인종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근대국가가 인구집단을 규제하는 통치 전략을 생명장치라 불렀고, 이로 인해 근대사회가 재구성되었다고 주장했다.
한국 사회도 다르지 않다. 근대 한국 사회에서 ‘비정상’이란 개념, 그리고 ‘비정상인 사람’이란 말은 놀림거리에서부터 혐오의 표현, 혹은 위험의 표현으로까지 사용된다. 한국 사회는 신체 부자유가 없는 사람, 노동 가능 연령에 속한 사람, 집이 있는 사람, 이성애를 기반으로 한 가족을 가진 사람, 4대 사회보험을 가진 사람처럼 국가가 의도하는 사회적 노동력을 생산하는 이들만 정상적 존재로 인식할 뿐이다.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면, 버스와 지하철에 탈 때, 일자리를 구할 때, 대출을 받을 때, 아이를 키우며 보육시설에 보낼 때, 일상생활에서 차별과 소외를 겪게 된다. 어떤 이들은 ‘비정상적’이란 이유로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시설에 수용됐다. 주거지 불명, 장애, 노령이 비정상의 대표적인 이유다.
비정상을 격리하라
격리 수용, 혹은 시설 수용의 역사는 꽤 깊다. 1601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구빈법’의 영향 아래서 지역 교구가 도시로 몰려든 가난한 이들을 시설에 격리 수용하기 시작했다. (사회복지시설의 시작으로도 잘 알려진 이 법은) 교구 단위로 지방세를 거둬 (1) 노동력이 있는 빈민을 강제노동시켰고, (2) 노동력이 없는 빈민은 구빈원에 격리했고, (3) 아동과 노인은 작업장에 수용했다. 이러한 사정은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1645년 생장드디외 수도사들이 만든 “가난한 병자와 정신이상자를 수용하는” 샤랑통 구빈원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곳에는 사디즘으로 유명한 문제적 철학자인 사드 후작이 한 번은 정치적 이유로, 다른 한 번은 광인이란 이유로 갇혔다. 사드 후작의 사례에서 비정상이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이 구빈원이라는 모델은 종교와 군주가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임의적인 권력이 이뤄지는 장소였고, 특히 빈민과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배를 공고하게 한 권력들이 야합한 산물이며, 차별과 사회적 배제의 시도였다.
한국 사회 역시 사회적 약자가 격리 대상이 되었다. 노동력이 떨어지는 아동, 노인, 행려병자(행려불구자)였다. 식민지기부터 미군정기까지의 시기, 격리 수용된 사람은 아동, 노인, 행려병자의 순으로 많았다. 더구나 한국 전쟁이 끝난 이후, 전쟁고아가 대량으로 발생했고, 그들은 불량한 대상으로 인식됐다. 시설이 부족한 상황에서 고시원에서의 열악한 생활을 거부하고 거리를 부랑하는 고아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구걸을 했고, 껌팔이, 구두닦이, 신발닦이, 넝마줍기 등의 노동을 했다. 때로는 소매치기와 절도, 성매매에 연루되었다. 고아들은 전쟁피해자라는 점에서 연민의 대상이었지만, 통제되지 않는 불량함과 우범성을 지닌 대상이란 점에서 우범자로 여겨졌다. 즉, 곤궁한 전후 사회에 대한 구조적 피해자라는 고려보다는 개인의 우범적인 소질이 문제가 되었고, 사회적으로 배제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위치 지어졌다. 그 배제의 방법은 ‘고아원’과 같은 수용시설에서의 격리였다.
격리의 대가
고아원은 1960년대 들어 늘어났다. 종교단체나 자선가 등이 외국의 원조를 받아 고아원으로 잘 알려진 아동복지시설을 설치했고, 국가는 그 운영을 허가했다. 장애인은 국가 혹은 민간이 운영하는 정신치료교화원, 불구자수용원, 맹아원, 직업보도원 등에 수용했다. 문제는 이들의 시설 수용이 국가가 내세운 목적인 전쟁고아와 장애인의 보호만을 위한 건 아니었다는 데 있다. 고아원 운영이 사업화되면서 운영자와 관련자들의 비리가 횡행했고, “고아원 갑부”라는 용어가 유행했다. 비정상적인 존재를 수용해야 한다는 사회적 필요는 시설 운영자의 돈벌이의 근원이 됐다.
잘 알려진 인물로는 박인근이 있다. 그는 부산에서 직업군인으로 일하며,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기존 복지시설이 부랑아 수용보호에 난색을 표한다는 공무원의 말을 듣고, 부랑아 출신만 수용하는 고아원을 설립했다. 돈이 따로 없었기에 복싱장을 철거했고, 그 자리에 160명을 수용하겠다는 계획에 맞춰 온돌방 4개, 취사장, 휴게실, 화장실, 세면장을 설치했다. 동시에 급식비 지원을 받기 위해 사회복지법인을 만들었다. 바로 형제복지원의 전신, 형제원의 시작이었다.
그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글에서 수용 중인 부랑아들을 동원해 수용시설을 확장했던 과정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대한민국 사회복지 역사에 길이 남을 멋있는 자원노역의 역사로 표적을 남기고 싶(었)다. 부랑인들이 일시 수용기간 동안 정부 보조, 지방비 보조, 일반 후원금 없이 스스로 이 건물을 자원노역으로 신축하였다는 그 표적을 남길 것이다.” 수용자들의 강제노역은 1960년 16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형제원이 1986년 3,975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커지는 과정 내내 이뤄졌다. 박인근은 형제복지원 시설이 확장되는 과정이 사회의 기생충과 같은 부랑인들의 갱생 가능성이 높아지는 일이라 자평했다.
그렇지만, 박인근의 말은 거짓이었다. 형제원과 형제복지원에게 수용자는 돈벌이의 수단이었다. 사회학자 김일환의 연구는 이 사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형제복지원 법인의 재산 규모가 1964년 114만원에서 1975년 2,761만원으로, 1985년에는 12억원 규모로 커졌다. 그에게 형제복지원의 수용자들은 돈벌이의 수단이었고, 늘 일정 수준의 수용인원을 유지했다. 늘어난 인원을 기초로 해외원조와 기부금, 혹은 보조금을 들여왔다. 1964년, 전체 수입 가운데 정부보조금이 23.9%, 기부금과 해외원조금이 48.2%에 달했고, 해외원조가 줄어들었던 1977년만 하더라도 정부보조금 18.3%, 기부금과 해외원조금이 33.8%였다. 1985년,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던 전두환 정부 시절, 형제복지원은 전체 재산의 91.1%가 국가보조금이었다.
수용시설사회, 한국
형제복지원은 한국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불법의 소치가 아니다. 수용자들에 대한 극단적 폭력과 수용자 657명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이며 참담한 사안 때문에 형제복지원이 유별나게 보일 뿐이다. 폭력과 죽음에 놀라서는 안 된다. 폭력과 죽음이 이뤄질 수 있었던 이유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수용시설의 일상을 살펴야 한다. 고아, 부랑인이나 장애인을 수용하며 그 대가로 원조와 보조금을 받는 일은 사회복지시설 사이에서는 일상적이었고, 운영자들 역시 당연하게 생각했다. 즉,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수용시설의 문제란 비정상적 존재가 이익으로 치환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비정상적 존재의 배제와 격리를 통해 도시 경관의 안정을 꾀했고, 운영자들은 그들을 격리하며 몸의 수에 비례해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그렇다면, 형제복지원 사건이 드러난 후, 이러한 관행은 사라졌을까? 아니다. 정신장애인, 중증장애인, 노숙인, 요양원과 같은 노인 수용시설 등은 여전했다. 더구나 인화학교, 밀알의 집, 벧엘의 집 등 집단수용시설에서 학대와 성추행, 인권유린이 끊이질 않는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노인 요양원에서도 학대 사건이 끊이질 않는다. 부랑인 수용시설에서의 문제는 집단수용을 기초로 하는 의료기관과 복지시설로도 이어지고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원형이다. 유럽의 구빈원, 식민지기 선감학원이라는 앞선 사례와 고아원, 장애인 의료기관/복지시설, 노인 요양원 등의 이후 사례의 잘 알려진 연결지점일 뿐이다. 한국 사회는 사회적 약자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집단수용하는 일이 정상을 위한다고 여겨지는 부정의한 사회다. 사회적 약자를 대상화하며, 배제하기보다 사회 안에 자리를 만드는 전환이 필요한 때다. ‘탈시설’은 그 전환의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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