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정책을 연구하는 연구자는 아닙니다. ‘가난한’이라는 처지의 변화를 추적하는 사람이죠. 그래서 정책에 대해 뚜렷한 상을 그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조사를 하며 접했던 ‘사회복지제도’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이에 대한 나름의 의견을 전해드릴게요. 첫째, ‘일한 댓가로서의 복지’에 대해 다시 고민하면 좋겠어요.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국가는 가난은 개인의 탓이며, 국가가 제공하는 ‘기회’를 통해 정상적인 국민으로 변신하라고 요구해왔어요. 대개는 국가가 제시한 갱생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일한 만큼 돈을 받아 갔죠. 이게 바로 취로사업이구요. 정말 경제적 사정이 극심한 경우에야 최저의 생계비를 제공했어요. 우리는 이런 프로그램을 두고 흔히 ‘선별적 복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어야 할 것 같아요? 모든 가난이 ‘개인의 탓’이기만 한지, 만약 정신과 신체가 질병의 경계에 놓여 있거나 노화로 일을 할 수 없는 사정이라면 어떻게 할지, 이런 것들에 대한 대비 말이죠. 모두가 가능한 일정 수준 이상으로 살게끔 하고, 그 이후에 개인의 사정에 따라 필요한 서비스를 지급해야 한다고 봅니다. 핵심은 ‘모두가 가능한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사는 세상’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기본소득을 비롯한 논의들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다른 연구자 분들께서 더 작업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둘째, 가난을 경제적인 기준에 맞춰서만 일괄 선별하지는 않았으면 싶어요. 가난이란 경제적 어려움, 건강의 어려움, 주거의 어려움, 관계의 어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봅니다. (<가난의 문법>서 보여드린대로 말이죠.) 일단 정부의 사회복지체계 자체가 협소해요. 대개 개개인의 소득을 기준으로 해서 대부분의 사회복지체계가 짜여 있어요. 재활용품 수집 여성 노인은 정부의 사회복지 대상 기준으로 놓고 보면 잘 포착이 안 되기도 해요. 그냥 저소득층이라고 추정이 되지만 흔히 선별할 수 없는 분들이거든요. 집이 있는 경우도 있고, 가족이 있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분들의 현실은 가난한데, 정작 복지의 바깥에 놓여 있기도 해요. 즉, 사람들이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다양한 자원을 취할 수 있게끔 하는 체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상상합니다. (제 전공이 아니라 이 정도로만 이야기를 드립니다.)
셋째, 사회복지의 전달체계에 대한 고민에서, 숙련된 ‘행정’을 기다려 봅니다. 우선 관료 중심적인 제도에 대해 시정이 필요한 것 같구요, 또 지역 내에서 숙련된 복지 관련 공무원과 사회복지사가 양성되어야 할 것 같아요. 말단의 사회복지직 공무원이나 사회복지사들은 중앙 관료들의 목표 수치와 이를 증명하는 페이퍼 워크(Paper Work)에 일이 집중됩니다(이 과정서 번아웃도 잦지요.). 게다가 현장에서 직접 무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이 중앙관료에게 전달되지도 않구요. 즉, 우리가 보는 중앙정부의 ‘통계치’가 나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제도가 작동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도 알아둬야 합니다. 그리고 지역의 숙련된 복지 관련 공무원과 사회복지사의 양성이 절실합니다. 특정인의 문제가 아니라 복지행정 자체가 계속 순환보직인 상태에서 사례 관리가 어려워요. 민간 위탁이 끝나거나 내부의 보직이 바뀐다거나 하면 공백이 생기죠. #가난의 문법 에 나오는 재활용품 수집 노인분들을 뵐 때도 사회복지사가 계속 바뀌는 문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어요. 공무원은 ‘된다/안 된다’ 둘 중 하나로만 얘기하고. 복지행정 말단의 문제를 제도적으로 개선하는 데 집중을 해야 할 때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