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의 공간 변화에 대한 소설적 상상

형제복지원은 1976년 정부의 사용승인 하에 주례동으로 이전했다. 형제복지원은 산을 개간하고, 그 자리에 60개 동의 건물을 건설하겠다 공포했다. 박인근의 사촌동생이 기술자이자 중간관리자로 나섰고, 수용자 70여 명이 동원됐다. 1년 후인 1977년 1월의 자료를 살펴 보면, 수용자들은 산의 개간은 물론이고, “흙-블록과 가시오나무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건물 23개동을 만들었다. 원장인 박인근은 이를 두고, “고귀한 자원 노역”에 의해 이룩된 것이라 말했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1976-1977년에 구축한 체제가 안정이 찾아오던 1979년, 사회에 격랑이 일었다. 이 상황은 형제복지원에게 새로운 기회였다. 박정희의 사망 이후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사회복지시설”의 확충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곧이곧대로 보면 복지사회가 구축된 시작으로 볼 수 있겠지만, 형제복지원을 비롯한 당대 사회복지시설에서 발생한 문제를 볼 때 사실상의 (민간) 격리시설이 등장한 계기가 아니었는지 의심할 수 있다. 어쨌거나 다시 형제복지원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형제복지원은 사회복지시설로서 성장할 기회라고 생각했으리라 본다. 정부의 지원을 보다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눈길을 끌어야 했을 텐데, 1976-1977년에 구축한 시설이 정부의 목표/요구에 비해 부족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기에 박인근은 정부와의 일종의 ‘협업’을 위해, 다르게 표현하자면 부랑인 문제를 사업으로 기획하는 과정에서 정부와 공모하기 위해서 새로운 수준의 시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리라 본다.

그래서 정부의 기준에 맞는 ‘부랑인수용소’가 되고자, 형제복지원 측은 새로운 시설을 건축할 계획을 세웠다. 1980-1982년 사이, 복지원은 수용자에게 (그들 자신이) 일궜던 건축물을 부수게 했고, 2-3층으로 된 새 건물을 짓게 했다. 이 과정은 꽤나 괴로웠을 것으로 보인다. 수용자들은 직접 벽돌을 만들었고, 목재를 가공했고, 철근을 가져다 가공해 골조를 만들었으며 거기에다 콘크리트를 부어 현대식 건물을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1차 공사나 2차 공사를 해낸 수용자들에게는 그 어떤 보상이 있었던 건 아니다. 복지원측이 수용자들에게 어떤 비용을 치뤘다는 주장도, 혹은 이를 입증할 기록은 없다. 더구나 박인근이 이 두 공사를 두고 노후에 ‘자원 노역’이라는 2년 만에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형제복지원의 시설이 만들어졌다. 공사가 이뤄지던 1982년, 전두환은 형제복지원의 2차 건설을 두고, 시설 내 수용자 동원을 통해 건축비를 절감한 우수한 모델로 치켜세웠다. 바로 건축에 대한 정부의 지원금의 지출이 줄었다는 것이었고, 이러한 수용자 동원을 통한 시설의 건축은 타 지역의 부랑인 수용시설의 모범사례라 말했다.

그래서 정부의 기준에 맞는 ‘부랑인수용소’가 되고자, 형제복지원 측은 새로운 시설을 건축할 계획을 세웠다. 1980-1982년 사이, 복지원은 수용자에게 (그들 자신이) 일궜던 건축물을 부수게 했고, 2-3층으로 된 새 건물을 짓게 했다. 이 과정은 꽤나 괴로웠을 것으로 보인다. 수용자들은 직접 벽돌을 만들었고, 목재를 가공했고, 철근을 가져다 가공해 골조를 만들었으며 거기에다 콘크리트를 부어 현대식 건물을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1차 공사나 2차 공사를 해낸 수용자들에게는 그 어떤 보상이 있었던 건 아니다. 복지원측이 수용자들에게 어떤 비용을 치뤘다는 주장도, 혹은 이를 입증할 기록은 없다. 더구나 박인근이 이 두 공사를 두고 노후에 ‘자원 노역’이라는 2년 만에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형제복지원의 시설이 만들어졌다. 공사가 이뤄지던 1982년, 전두환은 형제복지원의 2차 건설을 두고, 시설 내 수용자 동원을 통해 건축비를 절감한 우수한 모델로 치켜세웠다. 바로 건축에 대한 정부의 지원금의 지출이 줄었다는 것이었고, 이러한 수용자 동원을 통한 시설의 건축은 타 지역의 부랑인 수용시설의 모범사례라 말했다.

이러한 상황은 다음처럼 이해할 수 있다: “시설의 입장에서 형제복지원은 수용자를 동원해 형제복지원 및 형제요양원 등의 사업 다각화를 위한 물적 토대를 다졌다. 그러나 이 노역은 개인의 ‘자활’을 앞당기는 노동도 훈련도 아니었다. 이 노역을 통해 실질적인 이익을 거둔 주체는 보조금을 절감한 정부와 정부로부터 우수사례로 손꼽힌 형제복지원이었다. 정리하자면, 형제복지원의 성장에 있어 ‘자활’은 수용자 개인의 ‘자활’이 아니라, 국가의 비용을 절감하고, 민간 사회복지시설의 물적토대의 확보를 위한 방편으로 기능했다.”

Junchol Kim So

도시 연구자, 서울을 살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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