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페이스라는 알고리즘 은폐법

니체는 “우리의 필기-장치(혹은 도구)가 우리의 사유를 구성한다(Our writing equipment takes part in the forming of our thoughts)”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인간이 (특정한 의식과 사유방식에 의해) 도구를 사용하는게 아니라, 실상 매체가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 예컨대, 키틀러는 “알고리즘은 미디어의 내용이 어떤 감각적 장에 속하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으며, 결국은 모든 것이 앨런 매디슨 튜링(Alan Mathison Turing)이 1936년 발명한 ‘불연속적 보편기계’인 컴퓨토로 귀결”될 뿐이라 말한 바 있다(키틀러, 2011: 343쪽). 즉, 빌렘 플루서가 말하는대로 컴퓨터는 “모든 차원이 철폐되는 과정”을 겪어 온 장치이다. 그의 방식대로 인류의 ‘기록’의 변화를 단순화한다면, 실제의 인간과 사물에서 (피라미드같은) 3차원적인 기호를 추출하고, 이를 회화와 같은 2차원 기호로 재추출하고, 결국 텍스트나 인쇄물 같이 ‘이차원적인 것을 지시하는’ 1차원의 기호로 만드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컴퓨터는, 텍스트 기반의 현실 개념마저도 0과 1로 바꾸어, 0차원의 숫자와 비트로 만들었다(키틀러, 위의 책: 345-346쪽). 그러나 이 0차원은 이전의 어떤 미디어와 달리, ‘현실’을 재현하는, 심지어는 ‘가상의 현실’(virtual reality)마저 만들어 낸다. 혹은 현실과 ‘재현물’을 합성하여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내는 ‘증강 현실(增强現實, augmented reality)’의 세계마저도 만들어 낸다. 이는, (과감하지만) 인터페이스의 변화라고 일축할 수 있다. 정보생산과 정보처리에 있어, 인터페이스의 변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페이스(interface)의 역사는 끊임없이 변해왔다. 아마도 IBM 사무직 노동자가 사용한 펀치카드(천공카드, punched card: [그림1])는 컴퓨터 인터페이스의 최초 모델일 것이다. 이후, 흔히 코볼(COLBOL) 등에서 사용한 영숫자(alphanumeric) 명령 시퀀스를 사용했다. 인터페이스에 있어 가장 큰 변화는 ‘마우스’와 ‘매킨토시’의 등장이었다. 더글러스 엥겔바트(Douglas Engelbart)는 마우스를, 애플(Apple)은 매킨토시를 제작했고, 이로 인해 아이콘을 클릭하는 것으로 프로그램을 구동할 수 있었다. 획기적인 변화란 “현실 책상에 대한 은유”를 통해 컴퓨터 인터페이스가 변한데 있다. 여기에서도 애플(Apple)이 기여했는데, 즉, 일반적으로 사무실이나 책상에서 수행해 온 작업 환경을 컴퓨터에 그대로 옮겨 놓았고, 사용자가 컴퓨터 환경에 쉽게 적응할 수 있게끔 운영체제 자체에 변화를 주었다. 즉,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raphic User Interface)라 불리며, GUI로 줄여서도 말하는 방식으로, 컴퓨터를 켜면 화면에 (가상의) 책상(desktop)이 펼쳐지고, 그책상 위에는 문서함, 공책, 메모장, 계산기, 시계, 휴지통 등이 아이콘으로 가지런히 놓여있다. 이후,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는 윈도우즈(Windows)에 애플의 GUI를 모방하여, 적용했다.

인터페이스는 (윈도우즈에서의) ‘명령 프롬프트’ 혹은 (맥 OS에서의) ‘터미널’과 같은 ([그림3] 모양의) 명령어 해석기(Commnad Interpreter)를, 사용자들은 마치 이러한 과정이 없다고 여기게끔, 은폐(隱蔽)하며 발전해왔다. 게다가 모바일 디바이스의 발전에 따라, 여러 디바이스에서 별 차이가 없는 통합된 플랫폼(Universal Platform)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특히 현재의 (실제로는 애플의 맥이 아닌, 스티브 잡스가 독립해서 차려 만든 운영체제인 넥스트스텝(NeXTSTEP)의 후손인) Mac OS는 모바일디바이스인 iPhone과 iPad에서 사용하는 iOS와 점차 유사한 플랫폼을 갖추고 있으며, Windows10은 컴퓨터와 모바일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하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바로 이 책상의 모양새다. 왜냐하면, 노르베르트 볼츠가 말한대로, 현재적 의미에서 “좋은 컴퓨터는 보이지 않는 컴퓨터”이며, “사용자는 기술로부터 계속 보호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인터페이스가 강조하는 “사용자 친화”란 “사용자가 접근하는데 있어 공포를 느끼지 않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볼츠, 2011: 194쪽). 컴퓨터를 사용할 때, [그림3]과 같이 문자화된 기술언어가 보일 때, (분명 익숙하지만)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 하는데서 불편감을, 심지어는 공포를 느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인터페이스는 항상 감춰져야 하며, 보여서는 안 된다. 이런 특징은 웹(Web)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구글은 ‘검색’ 페이지와 ‘결과’페이지로만 이루어져있다고 아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개발자라고도 불리는 프로그래머들은 인터페이스를 ‘Front-End’라 부르고, 그 전반의 시스템과 내부 로직, 데이터베이 설계, 데이터 처리방법과 과정 등을 ‘Back-End’라 불러 나누어 개발하는 게 일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명령 시퀀스를 감추고(혹은 은폐하고), 인터페이스를 ‘사용자 친화’적으로 사용하는데서 ‘인간’의 무력한 처지가 드러난다. 일반의 인민이 ‘컴퓨터’ 뿐만 아니라 ‘웹’을 이해하기란 도통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기껏해봐야 [그림4]에서,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 (하드웨어들로부터) 출력된 것들을 지각(知覺)할 따름이다. [그림 4]에서 보이는 데서, 처리장치 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도통 알 수가 없다.

물론 여기에 대한 일종의 비판이 가능하다. 빌헬름 플루서의 경우는 “새로운(탈역사적) 의식차원은 디지털코드 속에서 표현된다”고 보며, 프로그램 언어 역시 하나의 문자이며, 새로운 탈역사적 문자가 등장했다며 새로운 미래를 환영한 바 있다. 특히, 선형적이며 논리적인 구조가 아닌, 일종의 ‘점’ 단위로 사고하며, 선 단위의 계산이 아니라, 점 단위로 계산하며, 일종의 점을 조합하여 모자이크를 만드는 일에 비유한 바 있다. 즉, 디지털코드의 형태로 기존의 문자를 사용하는 합성적인 형상의 시도인 셈이다. 이는, 커뮤니케이션과 기존의 선형적인 역사에 대한 반성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발언이다. 그리고, 네트의 ‘민주성’에 일부 기인한 바 있는데, 디지털코드가 ‘기존의 언어’로 정착된다는 주장을 강하게 내세울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플루서는 키틀러와 달리 ‘수용자’ 이용에서의 변화 측면을 강하게 내세우는 면이 있다. (반면, 키틀러는 푸코의 권력에 대한 논의, 그리고 유물론적 사유가 강하다.)

다시 돌아가보자, 앞서 ‘감추어 온 처리방법’이라 부른 것의 정체란 ‘알고리즘’이다. 무엇보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처리방법을 부각하는 이유란, 기술결정론에서 ‘기술의 독주’는 ‘알고리즘’이 하나의 전체주의적 장치로 쓰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다. 개인이 ‘편리’를 갖게 하는 장치라 볼 수 있으나 기술이 인민을 ‘포획’하는 장치라는 양면을 살펴야 한다. 게다가 인터페이스의 변화는, 포획장치라는 사실을 은폐하는, 그리고 더 철저히 ‘보이지 않게 하는’ 기술적 변화이다. 처리방법의 ‘언어’란 (여느 과학·기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소수’의 독점적 영역이다.

다시, 이 문제를 지식과 그 형태(form) 혹은 양식(樣式, mode)의 문제로 확장해보자. 시각과 청각이라는 감각 기관을 대상으로 하는 ‘이미지’의 형태와 ‘소리’의 형태의 지식이라 할지라도, 문제란 그 지식은 출력된 형태이자 하나의 양식이며 현실을 재현하거나 혹은 모방한 출력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플루서의 말대로 출력물들은 점들의 조합물이지만, 우리는 ‘재현’ 혹은 ‘모방’의 사태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현재의 사태를 읽다 보면, 디지털화된 지식이란 ‘신화’적 존재가 되지는 않을지도 고민된다. 의사(疑似, pseudo)자연에 대한 (막연한) 이해와도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감각기관을 중심에 놓는다 해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용 가능한 정보형태가 확장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일반적 인민의 감각이란 매체에 종속된 존재임이 드러나는 자리다. 유순하게 말하자면, 기술적 조건이 사회와 인간을 규정하는 결정적인 조건이라는 사유로, 기술이 이제는 기후같은 ‘자연환경’과도 유사하게 위치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기술결정론의 자리는, 아무리 그가 권력의 구조를 통제해야 할 필요를 말하며, “기술통제와 정보자유화”에 대해 분석하고, “계산시스템에 의해 운영되는 현대의 기술매체가 권력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추적해야 한다”고 말한다지만, 실상은 비극의 자리이기 쉽다. 권력에 복무하는 기술의 독주를 저지하는 방법만이, 즉, “기술이 (스스로 혹은 타인에 의해서) 한계를 가질 수 있게 해야”한다지만, (그의 말대로) 유토피아의 건설에 인간의 몫이 남아있는지는 미지수다. 그 또한 자본의 ‘컴퓨터 회사’와 ‘프로그래머’들과 같이 시스템을 만들어 계획하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대량의) 보급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파악하고 자제시킬 수 있다지만, 이는 만병의 통치약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앞서 언급한대로, 더는 연필처럼 일반의 인민들이 통제할 수 있는 장치라거나, COBOL 시절처럼 소수의 전문가만이 사용하는데 그치는 장치가 아니라, 만인이 사용하며 사회 전반의 동력장치가 된 상황에서 소수의 전문가와 독점적 기업에 그 (이타적인) ‘통제권’을 주장하기엔 무리가 있다.

참고문헌

노르베르트 볼츠(2011), 『미디어란 무엇인가』, 한울아카데미.
도기숙(2008), 「기술매체의 변화와 새로운 인간학 – 프리들리히 키틀러의 매체이론을 중심으로」, 『독일문학』108.
빌렘 플루서(2015),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xbooks
프리드리히 키틀러(2016),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 – 예술, 기술, 전쟁』, 현실문화.

Junchol Kim So

도시 연구자, 서울을 살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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