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의 <표백> 읽기 후, 이런 저런 노트. (현재 158쪽까지 읽었음.)
- 내 또래에 대한 사유에서 소설가 ㅈㄱㅁ에게 빚진게 적잖다는 생각. 물론 세대에 대한 사유, 즉 세대론은 불편하다. 보완 혹은 수정, 나아가 폐기의 사유도 마련할 필요.
- 소설가 ㅂㄱㅎ이 긁적인대로 <표백>은 IMF 이후의 난관들을 맨몸으로 겪은 세대들의 이야기라는데 동의. 청소년기와 청년기가 꼭 포개진 듯, “다시 이 짓을” 한다는 말이 자주 논해지는 사람들. 가령 청소년기의 입시학원과 청년기의 온갖 학원처럼. 그리고 시간의 관리 역시. “열심”인 사람들. 습에 관심있는 자로써, 이 습들은 거대한 규율의 현실태.
- 롤모델과 이데아, 하나의 아이돌(idol)은 여전히. 그러나 사회학자 ㄱㅎㅈ의 말대로 장래는 남았으나 미래는 상실한. 또한 하루키를 끌고오자면 금욕적인 욕이 습관으로 몸에 밴. 비루한 처지이기도. 마음은 이런 모습으로.
- 생활에 여러 장치를 만들고 이용해야 하는 처지. 가령, 시간표, 규율, 벌금과 같은 (사소한 제도) 장치를 이용해야 하지만, 장치 때문이 아니라 자유의지로 무언가 한다는 핑계를 대야 하는 기술자(mechanic)의 처지. 장치를 사용하지만 장치를 뛰어넘는다, 혹은 그로부터 영향받지 않는다는 확인이 필요하다. 핑계란 말은 더 이상 없다. 성과 패만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 플랜 A와 플랜 B, 성공과 실패 후 또 다른 성취라는 여러 계획이 상시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처지. 이렇게 적응을 토대로 한 세대가 언제 있었냔 말이다. - 역사로부터 유리된 현실로 보이는게 불편하다. 소재를 달리 하면, 가령 학교-시간의 일상적 적용이랄지, 고입-대입으로 이어지는 입시 사회(혹은 군대사회)의 구축의 변용이라면 IEA라 불리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의 흐름처럼 보이기도 하나, 쉬이 적용할 수는 없다. 왜냐, 이데올로기를 이론적으로 구축하다 실체를 놓치기 쉽고, 그 기능만으로 분석하자니 행위자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일단 아이디어는 챙겨두기로. 차라리 비교 방법이 더 용이할지도.
- <열광금지, 에바로드>와 <표백>, 이 두 축을 아우르며 그릴 수 있길. 그래봤자 다른 세대 혹은 직위의 사람들과 <알바생 자르기>에서처럼 서로 그리며 각자의 변명을 늘어놓겠으나.
- 이런 이야긴 연구자로서의 관심이나, 34살 ㅅㅈㅊ씨으로 읽는다면, 경계인이자 “팔자 편한 또래”로 관찰하는 내 시선을 고백하게 되며, (관계든 일이든) 그 무어든 버리거나 버림 받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사는 불안한 처지를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