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마음

“누구나 맞이해야 되는 거고 그냥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그걸 제가 사람을 죽여본 경험도 없고 어떻게 연기해야 좋은지 감독과 너무 많이 상의했고 또 성매매라는 게 불법인데 그걸 하게까지 된 할머니들의 얘기. 그리고 제가 찍어야 되는 환경 그런 게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몇 달을 찍는데 그렇게 힘들었는데 이렇게 내몰린 할머니들도 저하고 똑같이 어떤 엄마의 소중한 딸로 태어나서 여기까지 내몰린 것. 인생은 뭔가 제가 막 거의 철학자가 된 것 같이 너무너무 좀 싫었어요. 하는 도중에, 제 작업이.”
– 윤여정, 2016/10/5, “[인터뷰] 윤여정, ‘죽여주는 여자’ 감독에 대한 믿음으로 선택“, .

누구도 노인의 삶을 선택해서 경험할 수 없는데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노인의 생애를 살펴볼 수 없기에 지금 여기의 노인을 잘 알지 못 한다. <죽여주는 여자>(2016)라는 영화가 있다. 2001년부터 사회문제 중 하나로 일컬어진 ‘박카스 아줌마’가 주인공인 영화다. 주인공이었던 윤여정(1947년생)은 이 영화를 “성매매하는 할머니[의 이야기]예요. 죽여주게 서비스를 잘한다는 할머니가 옛날 고객들, 그분들이 정말 치매 걸리신 분, 또 중풍 걸리신 분, 독립생활할 수 없는 분들. 또 자기 사랑하는 상대를 잃어서 고독한 노인들을 만나면서 정말로 죽여주게 되는 그 할아버지들을 죽여주게 되는 얘기”라고.

단순한 소개로 보이지만, 이 영화는 하나의 시발점이다. 한국사회에서 여성노인과 여성노인의 삶을 그린 예술작품, 언론의 보도, 혹은 학술연구도 그리 많지 않은 상황에서, 문제대상이 아니라,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자 ‘노인’을 그려낸 유일무이한 작품라는 점에서 말이다. 지금껏 여성노인은 ‘폐지수집 할머니’, ‘박스 할머니’, ‘박카스 아줌마’처럼 문제의 대상이자 ‘대명사’로 가시화되는데 그쳤다.

예를 들어, 박카스 아줌마의 경우는 윤락-호객행위를 하는 “노인상대 윤락녀”로 경범죄 처벌법의 대상이자, (종묘와 탑골공원에서) 소탕하고 추방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2000년, “[만점남성학] 노인의 성생활”(<국민일보>, 2000/11/30), “70대 할머니-할아버지, 30% 성생활 가능”(<동아일보>, 2001/5/22)의 기사를 보자. 여기에는 “음료수를 팔면서 노인들을 상대로 매춘행위를 하는”이란 수식이 붙을 따름이다. 경찰이 그녀들을 단속하자 “민족의 문화유산에서 눈살 찌푸릴 일이 사라지게 됐다”는 주장과 “노인도 ‘남성’인데 단속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주장을 함께 배치한다. 그녀들은 그저 단속/소탕대상이거나 (남성)노인의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도구’로 치부된다.

이후, <죽어도 좋아>(2002)라는 노인을 대상으로 한 첫 독립영화가 개봉한 후에는 더 난감한 상황이 펼쳐진다. “노인들의 해방구 ‘종묘24시’”(<한국일보>, 2002/9/30”라는 (최초의) 현장 취재 기사를 보자. “종로3가 지하철 역사로 사라져가는 (남성)노인들이지만 … 이 곳을 찾아들어 남은 열정을 불태우며 서로를 통해 위안을” 얻는다고 마무리하는데, ‘고독한 남성노인’이 ‘성행위’를 살 수 있는 “끈적거리는 시선”의 “박카스 아줌마”라는 구도가 자연스레 그려진다. 즉, 이때부터 노인의 성행위와 성적욕구 해소라는 문제로써, 남성노인의 ‘성욕구 해소’ 방안 중 하나일 뿐이다.

2010년에 들어서야 “그러나 이들이 다 똑같은 배경을 갖고 있는 건 아니(“노인 길거리 성매매 신풍속도”, 「신동아」, 2010/12/24)”라며, 박카스아줌마의 배경을 살핀다. 여기에는 이호선(2010; 2011; 2012; 2013)의 연구가 기여한다. 다년간 인터뷰를 통해 박카스 아줌마에 대한 실태조사를 한 결과로 ‘박카스 아줌마’가 어떻게 되었는지, 어떤 생활을 했는지 설명했다. 유용한 유형화지만, 연구기획의 전반적인 목적이 목회 상담의 대상으로 설정을 한다는데서, ‘문제의 유형화’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언론매체는 만남-흥정-매매라는 성매매 도식에서 ‘남성 노인’과 ‘박카스 아줌마’의 위치를 버리지 않는다. 즉, 고독한 남성노인과 ‘싸구려 매매춘’을 가능케하는 가해자의 구도로 설정할 뿐이었다.

여기에서 다른 노인문제 중 하나로 일컫어지는 “폐지수집 노인”에 대한 여러 구도를 살펴보자. 앞서 박카스아줌마와 같이 ‘가해자’로의 구도가 보인다. 물론 한 개인이 공감하지 않는다는 의견으로 볼 수도 있다.

“딱히 불쌍하거나 안됬다는 생각은 안드는데?? 오히려 아침 ,저녁 출퇴근 시간에 안그래도 좁은 도로 길막히게 차선하나 떡하니 차지하며 리어카 끌고 가는거보면 참 몰염치한 이기적인 노인들이란 생각이 든다. 본인 한명땜에 바쁜 시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 손해를 봐야 되는거냐??”

아마도 여기에서는 길을 막는 일에 대한 불만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단지 폐지수집노인에 대해서만 이렇게 생각할까? 횡단보도가 아닌 무단횡단을 하는 노인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차는 사람들이 많다. “역시 노인들이란”같은 류의 반응이 뻔한 형태가 아닐까? 이같은 구도는 꽤나 전형적이다. “열심히 살지 않은 젊은 날의 결과”라며 가타부타 원인을 설정한다거나, “자녀와의 어떤 문제”가 있다며 가정의 결과로 돌리고 만다. 즉, 개인의 잘못으로 잘 못된 개인이라고 문제화하는 방식 말이다.

그러나 빈곤한 노인에 대해 또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바로 인도주의적인 관심이다. 2016년 4월, 폐지수집하는 노인들을 다룬 한 신문기사에 대한 반응 중 상당수는 노인의 삶을 잔인하고 비참하게 여기며, 연민을 느끼거나 정부에 책임을 묻는 분노어린 댓글들이 여럿 달렸다.

“이분들도 그 누군가의 부모님이실테고 또 어느 누군가의 우리의 미래 모습이 아닐까요? 그럼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우리 모두가 고민하고 노력해야할텐데.”

물론 가슴이 아프고 눈물 나는 일이기도 하다. OECD 가입국가가 될 정도로 성장했으나 “위험에 노출되고, 저임금에 힘들어하는 분들”이 있는 세상이다. 그러나 “폐지 한 장, 빈 병 하나라도 쥐어드리는 따뜻한 세상이” 오길 바라기도 한다. 더 나아가 “정부”의 책임으로 “노인 부양문제는 그간 사회를 위해 공헌한 분들에 대해 정부로서 그에 합당한 노년생활을 보장해 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는 복지문제와 차원을 달리하는 정부의 의무가 아닌가?”라 묻기도 한다.

여기에서 바우먼이 “빈곤의 쓸모”라 이름붙인 한 부분이 떠올라 옮겨본다. “빈곤층을 인도주의적 관심의 대상으로 제시할 경우, 이들이 처한 운명의 잔인함과 냉혹함에 분노하게 되는데 이렇게 분출된 분노는 안전하게 자선활동으로 전환”된다. 바우먼의 확신과는 달리 이 분노는 “안전하게 자선활동으로 전환”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주목해야 할 부분이란, 이 “빈곤의 쓸모”다. “세계의 빈곤층과 한 나라의 빈곤층은 일자리가 있고 정기적으로 소득이 있는 이들의 자신감과 의지를 매일매일 조금씩 좀먹는다. 빈곤층의 처지를 보고 빈곤하지 않은 계층이 체념하게 되는 현상은 이상할 것이 없다. 제대로 생각이 박힌 사람이라면 빈곤층의 처참한 삶을 보면서 여유로운 삶은 보장된 것이 아니고 오늘 성공했다고 내일 실패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게 타당하다.” 그러나 결국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자신의 상태를 상기하거나, 벗어나겠다는 일념을 가지는데 급급하다. 결국 “조용히 지나쳐 버리고 덮어”버리는 “잘못”이 그 마지막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사회체제의 불안정함과 미비함을 깨닫는 것처럼 보이지만, 되려 자신의 상대적 안정감과 불안정에 대한 두려움을 상기할 따름이다. “결국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빈곤층의 존재란, 끊임없이 불확실성이라는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는, ‘소비자’의 삶이 야기하는 혐오스럽고 끔찍한 결과를 상쇄”하는지도 모른다.

즉, 빈곤의 실태는 이렇다며, 사회의 연민과 분노를 일으키는 연구를 지양해야 한다. 자극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아야 된다는 질문이랄까. 문제화하는 작업이, 영미권의 속담처럼이나, “뜨거운 감자”가 될 때엔 (한 영한사전의 해석처럼) “난문제(難問題), 누구나 꺼리는 대상”이 되기 쉽다. 여기에는 풀기 어렵다는 선입견을 먼저 만들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여성노인의 문제를 앞에 둔 (특히, 어린 남성인 우리) 연구자는, 여성노인이 어떤 문제의 주인공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난문제’로 고정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이 연구는 우선 문제를 풀 수 있는 요인을 찾는 것보다 불확실하고 불가사의한 여성노인의 생활을 그려보는데 집중하고자 한다. 사회적 문제로서의 여성노인이 아니라, 여성노인의 언어를 따라 그녀의 삶을 재구성하려 한다. 가령 “죽음은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다 죽는 것이 가장 잘 죽는 것 같다. 물론 약장수 맘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라는 말에서,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 살펴보는 방식을 찾아볼 것이다. 그녀가 배우이든 박카스 할머니이든, 중요한 건, ‘그 일’의 문제적 성격이 아니라,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인지 아닌지, “어떤 세계에 속해, 어떤 생활과 경험으로, 이런 사유를 가졌는지” 등을 바라보자는 문제를 우선 제기한다. 다른 한편으로 “지방정부의 행정전달체계(광역-기초-동)을 통한 공공부조”의 경험적 관찰이자, 한 지역에서 지역 내부에서 (사회복지학적인 언어로는) “비공식적인 복지자원”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해석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즉, 한 개인의 생활을 톺아보며, 그녀가 속한 생활세계를 살펴보는 작업이다.

Junchol Kim So

도시 연구자, 서울을 살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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