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 탓에 잠이 깼다. 담배를 한 대 태우겠다며 병동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에 내려왔지. 자그마한 의자에 앉아 새벽녘 사람들을 관찰한다. 소리가 들리면 고개를 돌리는게 새벽의 관찰법이다.
우선 몇 무리의 취객들이 보인다. “샌드위치”라 소리지르는 남자들, 뛰어다니는 남자들,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한다는 남자들이 보인다. 또 길끝에서 나타난 굽네치킨 배달용 택트에 남자 셋이 타고 내 옆을 지나간다(두 명은 시트에 낑겨 앉았고, 한 명은 배달통을 안고 매달려 간다. 그들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내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한밤의 짐승떼들.
이제 어떤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근처의 술집과 노래방들이 마감을 하는 중일텐데. 어떤 이가 퇴근을 하는 모양인지 “수고하세요”가 여러번, 이어 발을 질질끄는 소리가 들린다. 역시 남자들의 소리다.
한 대를 다 피우고나자 여기 저기서 비질소리가 들린다. 아침이 오긴 오나보다.
아, 달달달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작년 잠깐의 경험 덕에 무척 익숙한 소리다. 카트를 끄는 미약한 발걸음. 역시나 어떤 할머니가 작은 카트에다 비닐봉지 여러개를 묶어 지나간다. 대개의 경우가 그렇듯이 아침 일찍 재활용품을 주우러 다니는 사람이다. 며칠 전, 같은 이유로 주차장에 내려온 날의 같은 시간에 길에 주저 앉은 한 할머니를 보았다. 아마 밤을 꼬박 샌 모양인지, 박스랄지 (요새는 구하기도 힘든) 신문지같은 걸 잔뜩 실은 카트가 그녀 옆에 서 있었다. 오늘의 그녀나 며칠 전의 그녀는 모두 피로에 절어있다.
남과 여, 젊은이들과 늙은이들의 대비라는건 때를 가리지 않고 항상 있다. 그래도 새벽은 여러 대비-꺼리 가운데서도 극적인 때라 할 수는 있겠다. 잠잘 수 있는 자와 잠들 수 없는 자라는 계급적인 대비는 예나 지금이나 다른게 없는 것 같고. 무엇보다도 감정을 숨기지 못 하는 이 시간의 젊은 남자(짐승) 떼와 피로를 숨기지 못 하는 늙은 여자가 골목을 가로지르는 이 도시풍경은 (내가 목격한 한에서) 가장 서글프다. (싱숭생숭함에 못이겨 잠못드는 젊은 자들의 내적 괴롬도 말 못할 것이겠으나,) 무뢰한인 젊은 남자들과 (혹자의 불편한 표현대로) 골목의 청소부이거나 (생존과) 산업의 끄트머리에서 살아가려는 늙은 여성노인들이 있는 풍경 말이다.
그러고보면 내가 잠들어있는게 보통인 이 새벽 다섯시는, 밤샘 영업이 끝나 간판도 불을 끄는 이 시간이란, 실은 (주로 남자들인) 취객들과 야간영업자와 나이든 여자의 시간인지 모르겠다. 어떤 이유로든 아파 잠못드는 작자의 시간일 수도.
*1 다리가 저려와 병동으로 다시 올라가며, 오늘의 관찰을 까먹지 않으려 몇 줄 적어놓는다.
*2 적어놓고나니 새벽의 뻔한 관성을 발견이랍시고 뻔뻔하게 적은 것 같아 찜찜하다.
*3 이 지점에서 탁월한 분석과 제언 정도는 해줘야 할텐데, 그저 또 다른 비참함을 발견했다는 류의 어설픈 글이나 싸지르고 있는게 스스로 답답허기도 하다. 내 한계인가.
*4 짐승떼와 피로의 대비는, 문명과 야만이라는 오래된 도식을 따르는 것처럼도 보인다. (적어놓고 다시 보니. 맑스마냥 인간은 노동을 하기에 인간이지, 라는 전환의 계기를 만들 능력은 없고.) 변명을 하자면 이 둘은 ‘노동(을 시작하는) 시간’, 쉴 수 있는 시간의 대비가 얼핏이나마 그려졌으면 싶었던거다. 그리고 무뢰한인 남자들과 무언가에 질린 여자들의 대비도 상상해보았으면 한다. (새벽에 작다란 골목에서 주인마냥 구는게 얼마나 꼴불견인지 말이다. 빌어먹을 ‘남자’행세.)
* 5 나는 폐지수집 노인이 부품화된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가 기술이 없고 몸이 노화되는 노인기에 경험 할 ‘현미래’라 본다. 시장에 진입할 능력이 없고, 경비와 청소도 하지 못할 때 (거의 유일하게) 진입할 수 밖에 없는 보이지 않는 시장이라고. 보이지 않으니 보호란 애초에 없다.
*6 가까운 시간 내에 쓸 논문 중 대상 하나는 ‘넝마주이’인데, 폐지수집이나 넝마주이나 (국가동원적 성격은 다르지만, 유지시키는 전략은 동일하다 보며) 10-20대가 넝마주이였던 과거와 70-80대가 폐지수집가가된 현재로 시장 바깥의 노동의 계보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