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역사는 자기계발서일지도 모른다

김현식의 <역사, 위험한 거울> (2001, 푸른역사)을 읽고

2013년 1월호에 예언인지 예측인지를 주제로 삼는다고 한다. 잘 쓰지도 못하는 문장으로, 그것도 [월간 잉여]라는 열정만큼은 스웩(Swag)한 ‘종합 (시사 문화) 교양지’에다 어떤 내용의 글을 써서 보내야 할지 나 스스로도 궁금해하다보니 12월 중순이 되었다. 전공 분야도 아니면서 “통계가 만들어 낸 허상에 대해 써볼까요?”라고 떠든 근자감은 무언지, 정말 이 쓸모없는 자신감의 근원이나 먼저 찾아야 할 텐데 말이다. 여하튼 ‘무한정판’에서 만난 해맑은 잉집장 얼굴이 생각나서 뭔가 쓰긴 써본다.

과거를 알아야 미래가 보인다?

어쩌다보니 역사가 주제다. 1월호 타이틀인 예언과 역사학이 대체 무슨 관련이 있을지 생각해볼까? 표준국어대사전은 예언에 대해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알거나 짐작하여 하는 말’이라고 밝힌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신의 계시를 전달하기 위한 예언(prophecy)이 아니라, ‘질문과 대답을 통해 사실을 논리적으로 추론해’낸다는 의미로 보면 역사는 예언(prediction)과 무슨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다시 말하면, “과거를 알아야 미래가 보인다”라는 흔한 말이 맞는지, 인문과학이라는 역사학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확인을 해보자는 셈이다. 비록 [사회학 사전] (2000, 사회문화연구소)에서 ‘사회적 사건들에 대한 성공적인 예측(prediction)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경험적인 지적을 모른 체하고 말이다. 이렇게 역사를 살펴본다는 건, 예언을 할 때 그 본보기를 만드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앞서 [사회학 사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공적인 예측이 지금까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문과학에서 ‘예측(prediction)’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처럼 보편적인 ‘일반 법칙’을 확립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내일 아침에도 해가 뜬다는 건 하나의 사실로써 예측을 넘어 법칙으로 알고 있다. 정작, 인간이 만든 사회에 이러한 법칙이 있을까? 1분 뒤에 어떤 일을 하고 있을 지도 정확히 모르는 것을. 사진을 찍던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가장 유명한 전시 제목처럼 우리는 ‘찰나의 순간’만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찰나의 순간들을 이어가며 끝없이 살아가고 있는지도. 역사학은 예언이 아니라,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과거에 대한 참된 이야기를 서술하는데 기여하는 학문이다.

역사와 소설의 경계, [역사, 위험한 거울]

역사학은 미래를 예언하는 일과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럼 대체 이 역사학이라 하는 건 무언지 살펴보고자 한다. 알라딘 헌책방의 서가 구석에서 내 책꽂이로 이사 온 책 한 권 때문이다. (책 디자인이 새로워서 데려온) 김현식이라는 사람이 쓴 [역사, 위험한 거울](2001, 푸른역사)을 살펴볼까 한다. 구성도 새롭다, 한 서평자의 말처럼 ‘기괴할’ 정도다(이상의 작품만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기를). 차례를 펼치면 ‘프롤로그’, ‘갈등’, ‘화두’, ‘역사 (1강, 2강, 3강, 4강, 5강)’, ‘해석 (1강, 2강)’, ‘실천’, ‘글 끝에 부치는 말 몇 가락’이라 쓰여 있다. 구성상상을 해볼까? “갈등이 생겨나고 그 안에서 화두를 집어 든다. 아, 답은 역사였구나, 우리는 서로를 이렇게 해석했던 거야. 어떻게든 잘 할께”라 다시 쓸 수 있을지 모를 전형적인 달달씁쓸한 연애 소설의 기승전결을 차례에서 드러내고 있다. 정체 모를 책이다.

우선 ‘글 끝에 부치는 말 몇 가락’을 펴면 이 책은 ‘역사와 문학의 경계, 진실과 허구의 경계, 이론과 실천의 경계, 그리고 사랑과 집착의 경계’들의 우울한 틈새를, 필연적이라 여겨지는 이 간극을 드러내고 건드리는 ‘경계를 시험하는 사고 실험의 결실’이라 말한다. 저자가 끄집어 낸 경계들을 살펴보자.

두 이야기: D와 A, 그리고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 이야기 하나: D와 A

“배경은 2001년이다. 주인공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D와 강의를 수강하는 A다. 종강일, A가 D에게 다가가고, 둘은 사랑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D는 A와의 절대적인 사랑을 꿈꾸며,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여자이며 유일한 남자인 그런 연인 사이로 나아간다. 대학원생이 된 A가 어느 날, D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한 선배를 축하하는 자리에 가게 된다.

D는 며칠간 A의 연락을 피하고, 그리스 신화에서 메데아를 배신한 영웅인 이아손을 떠올리며 ‘가벼운 배신과 그에 대한 무거운 증오, 홀로 남겨진 증오, 홀로 남겨진 자의 비통한 절망’만이 남았다 생각한다. “열정에 가득 찬 사랑이란 그 얼마나 사악한 것이더냐!”며. 이 후, D는 A에게 화해를 청하고, A는 “사랑을 줄이라는 게 아니에요. 저에 대한 당신의 집착을 조금 덜어내라는 거죠.”라 답한다. 집착이란 말은 다시 D와 A를 혼란의 끝에 자리하게 한다. 이 이야기에는 사랑과 집착의 경계를 오고간다. D는 절대적인 사랑과 순종을 바라고, A는 이 상황 안에서 부조리함을 느낀다. A는 D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라는 11세기의 한 연인과 자신들의 차이를 읽어내길 바란다며 전화를 끊는다.“

  • 이야기 둘: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D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이야기를 자신이 진행하는 역사 이론 강의의 주된 논제로 삼는다. 명성과 업적을 쌓은 학자인 아벨라르와 16살 엘리오즈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D는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11세기 한 남녀의 이야기다. 어느 날, 엘로이즈의 삼촌인 풀베르가 아벨라르에게 엘로이즈의 교육을 맡긴다(심지어 체벌까지도 허락한다). 아벨라르와 엘리오즈는 사랑의 열락을 맛본다. 이를 알게 된 풀베르가 뒤늦게 둘을 갈라놓지만, 엘로이즈가 임신을 하게 된다. 아벨라르는 풀베르에게 사죄를 청하며, 엘리오즈와의 결혼을 약속한다. 이 때, 엘리오즈는 결혼이라는 굴레를 씌워 억지로 묶어두기 보다는 그저 사랑으로 연인으로 살자며 결혼을 거부한다. 하지만 아벨라르는 결혼을 감행한다. 그렇지만 둘의 결혼은 풀베르만 아는 비밀결혼이었다.

이 후, 풀베르는 아벨라르를 계속 의심하고, 결국, 비밀결혼을 다른 사람들에게 폭로한다. 당황한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수도원으로 보냈지만, 풀베르가 사람을 보내 ‘가장 잔혹하고도 수치스러운 복수’라는 명분으로 아벨라르의 성기를 잘라낸다. 수치와 모멸감 속에서 아벨라르는 수도원으로 숨어들고, 엘로이즈는 비탄과 의무감 속에서 수녀원 생활을 계속했다. 몇 번의 편지를 주고 받기는 했지만, 십 몇 년 동안 둘은 만나지 않았다. 아벨라르가 죽어서야 엘로이즈에게 오고, 엘로이즈는 자신이 원장으로 있는 수도원에 아벨라르를 묻었다. 그로부터 이십여년 후가 되어서야 엘로이즈는 그토록 갈망했던 아벨라르의 옆에 누워 긴 잠에 들었다.“

대체 역사란 무엇인가?

작가는 이렇게 두 가지 이야기를 내놓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은 단 하나의 복잡한 질문이다. E. H. Carr가 꺼내놓았던 “역사란 무엇인가?”에 답을 해보자고 말한다. 저자는 이 질문은 1) 역사란 무엇에 관한 것이며, 2) 역사가는 어떤 방법을 통해 그 대상을 탐구해야 하는지, 마지막으로 이 3) 역사란 무엇인지라는 세 개의 질문이 섞인 복합질문이라고 말한다.

역사가들이 역사를 연구하는 제 일의 목표는 ‘타자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있다고 한다. 다시 질문이 생긴다. 왜 타자의 삶을 알아야 하는 걸까? 답은 너 잉여도 알고, 나 잉여도 아는 우리, 나의 삶을 알기 위해서. 하지만 역사를 바라볼 때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인간들은 자신이 소속된 각자 고유한 패러다임 속에 살고 있다. 그렇기에 과거인들이 채택한 방법은 단지 그 시대에 유용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회사에서 내가 하던 일을 다른 동료가 맡아 할 때도 그 결과가 똑같지 않다. 상대적으로 차이 나지 않아 보이는 시간인데도, 서로 다른 패러다임이 작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역사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자각하며 읽어야한다. 이렇게 읽어낸 역사는 미래를 알게 하는 예언이라기보다, ‘한 줄기 희망이든, 부질없는 열망이든 상관없이’ 나의 삶이 ‘자유로운 말’을 발견할 수 있게끔 돕는 실마리는 아닐까 싶다. 과거에 존재했던 다양한 삶의 모습은 (개연성을 통해) ‘빛’이 될 수 있고, 다채로운 대답은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자는 저자의 말을 기억해보자.

서먹서먹한 시선, 얼빠진 표정으로 우리의 말들은 일그러져 가네
진심을 가득 담아 노랠 불러보지만 이제는 나조차도 자신이 없어
누군가 말하네 거침없는 말이 있다고 한 줄기 희망일까 부질없는 열망일까
웃으며 떠나네 자유로운 말을 찾아서 한 줄기 희망이든 부질없는 열망이든
상관없어
– ‘생각의 여름’이라는 음악가의 노래, [말]

저자는 ‘극단의 허무’까지도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슨 말일까? ‘두 이야기’ 다음 부분을 살펴 보면 짐작할 수 있을테다. “D가 강의를 마치는 순간이 등장한다. D는 ‘역사’ 속에서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을 확인했다, 절정에 다다른 한 연인을. D는 학생들에게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이야기를 해석해내듯, ‘스스로의 사고 실험으로’ 사료를 탐구하라는 말을 던지고, ‘어떤 회의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진실을 가슴에 안으’라며 영웅이 된 듯 역사에 대해 논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역사적 지식의 적용이야말로 역사를 공부하고 고민하는 궁극의 목표’라며 마무리를 한다. 이 후 둘은 다시 만난다. 허나 이 자리에서 A는 D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D는 ‘역사의 무의미성, 역사적 교훈의 가벼움, 역사한다는 것의 허망함’ 따위를 논하며 자신이 학생들에게 했던 말들을 모두 무너트린다. 그리고 D는 자살하고, A는 D의 감정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역사를 탐구한다는 것, 사랑을 한다는 것, 이건 일생의 책임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상징은 아니었을까? 사랑과 집착 사이를 오고가는 D의 모습은, 사실 이 두 개가 하나라는 이야기는 아닐까? 상투적이고 촌스러워 보이는 죽음에 대한 결론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이 책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온통 그 경계가 희미하다. ‘사실로써의 역사’와 ‘허구로써의 문학’인지 라는 책의 성격이, D에게는 역사 이론과 실천의 경계가, 또 사랑과 집착이, 아벨로주와 엘로이즈가 사랑인지 아닌지 온통 희미하게 존재한다. 그래서 실험적인 책이다. 저자는 사랑과 집착 사이에 경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은 단지 우리만의 바람일 뿐이라고 밝히고 싶었던 건 아닐까? 경계를 정하고, 나누고, 의미를 부여한 건 (역사의 창안자이며, 대상자이기도 한) 인간들인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할 때, 이룰 수 없는 절대적인 상태를 꿈꾸다 고꾸라지기보다, ‘고통과 슬픔이라는 매서운 절정에서도 (살아갈) 힘을 가질 의지를’ 갖게 될 것이다. 그 의지를 갖고 담담히 그리고 담대히 새로운 출발을 하자는 저자의 바람인 듯하다.

역사를 실마리삼아

이상이 ‘69’라 다방 간판을 달았다가, 허가를 취소당한 일이 있다. 그 날 저녁 이상은 아마 삐루를 마시며 “고것들 내가 쎈쓰 좀 부려보려 했건만 이리 막네’라 웃지는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이상은 ‘二十三‘이라는 표현을 내놓은 적도 있다. 뜻은 다리 둘과 다리 셋을 합친다는 류의 휴우머다. 우리, 이런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실마리 삼아 적어도 한 몇 년 즐겁게 잉여질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역사는 미래 예언은 아니지만 괜찮은 자기계발서인지도 모른다. “청춘들이여, 참아 봐, 좋은 날이 올꺼야”라 떠드는 허경영 류의 친구들을 떠나보내자.

80년 5월 광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따스한 눈인사를, 그 후로도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따스한 눈인사, 그리고 미안함과 감사를. 그리고 김목인이 부르는 ‘음악가 자신의 노래‘ 처럼 많은 잉여들이 ‘나 잉여의 노래’를 스스로 지어 부를 수 있기를 바란다. 공염불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리 되지 않을 거라 예언하며. 안니옹.

덧붙임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살던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했던 사람들과 그 시대에 대한 책을 소개합니다.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으려 애 쓴 연구들입니다. ‘유신’, ‘독재’라는 한 시대를 통칭하기 전에, 그 시대를 살아 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들을 살펴보길 바라는 마음에 권해봅니다.

*김현식, 2001, [역사, 위험한 거울], 푸른역사
*권보드래, 천정환, 2012, [1960년을 묻다 – 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 천년의 상상
* 김원, 2006,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이매진
*김원, 2011,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 기억, 사건 그리고 정치], 현실문화연구
* 김영미, 2009, [그들의 새마을 운동 – 한 마을과 농촌운동가를 통해 본 민중들의 새마을 운동 이야기], 푸른역사

 

날아
몇 년 동안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여러 가지 이름으로도 불렸다. 지금은 모두 정리하고 운중동에서 역사사회학을 공부하며 지내고 있다. 책, 출판, 독서, 지식 등에 눈길을 두고 있다. 소피아와 함께 행복하게 보낼 하루를 기다리며 버티며 산다.

 

 

  • 이 <월간잉여> 2013년 1월호 기고글은 잉집장의 편집을 거친 글이다. (이글은 편집 전의 글이다. 원래 쓴 걸 보여주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내 블로그에는 잉집장이 편집하지 않은 글을 올린다.)
    타인이 자신의 글을 고칠 때 화가 나지 않냐고들 말하는데, 지면의 정체와 물질적 제한에 따라 편집이 필요하다고 본다. (월잉스럽지 않지만.) 그리고 잉집장이 뽑아낸 문장이나  부제들에 대해 불만이 없다.
  • 2013년의 나와 2016년의 나는 달라졌더라.
Junchol Kim So

도시 연구자, 서울을 살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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