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자에게 명복을 빈다. 남은 자들이 이대로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될 그런 일이 벌어졌다.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는데라는 보기만 해도 슬픈 사람들의 마음을 놓고 머리를 굴려봤다. 나는 내 몸으로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떤 경험들과의 친화성 정도로나 (오만하게) 상황을 ‘인지’하고 ‘(위험한) 판단’을 내린다. 뭐 이런 생각이 나를 지독할 정도로 괴롭히는 하루다.
누군가와 말을 하는 것조차 버거웁다.
이런 말이 우습지만, 길을 지나다 혹은 어딘가에서, 남성들끼리의 대화가 들릴 때, 대개는 역겨울 때가 많다. 그런데 더 끔찍한 건, 화법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나 역시 같은 방식의 사고를 가지고 있을 때다. 어찌해야 하나, 어찌해야 하나 혼자 중얼거리다가 울적해진지 꽤 오래다. ‘이해’라는 말을 할 자격은 없고, 그저 ‘안다’는 정도의 겁에 질린 답이나 내놓을 따름이다.
잠자의 변신을 목도하고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변명이나 늘어놓는 작자들이 가득하다. 이 사회는, 지옥과도 처지가 다르지 않을테다. 한참 전부터 현세가 지옥이다. 돌아보면 어설펐지만 꿈이라도 꾸던 사람들이 그득하던 시대가 참 부럽다가도, 실상은 그 당시의 (어느 정도의) 귀결이 지금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어느 시대도 부럽고나 그리워할 대상은 아니더라.
어쨌거나 지금 앞에 펼쳐진 이 문제부터 살펴보자며 지친 목소리로 답할 수 밖에. 무언가를 맹렬히 좇지 않겠다는 각오나 다지며, 일단 추적해보자. 주머니 왼쪽에는 슬픈 마음과 분함을, 오른쪽에는 내 도구를 챙겨넣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