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버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 발췌

발제 03 베버 20160517

  1. 세속적 금욕주의의 종교적 토대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역사적 담지자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종류로 대별된다. (1)칼뱅주의가 특히 17세기 동안에 서부 유럽의 주요 지배 지역에서 취한 형태 (2)경건주의 (3)감리교 (4)재세례파(침례파) 운동에서 발생한 분파들(167쪽).

우리는 종교적 사상을 ‘이념형적’으로 구성된 논리적 일관성의 형태로, 즉 역사적 현실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로 제시하는 방식을 취할 수 밖에 없음은 물론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현실에서 분명한 경계를 긋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그 현실의 가장 논리적으로 일관된 형태의 연구를 통해서만 그것이 역사적으로 끼친 특수한 영향에 접근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172쪽).

[옮긴이 주석 5) 이념형은 “하나의 관점 또는 몇 개의 관점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이렇듯 일방적으로 강조된 관점들에 부합하는 일련의 개별 현상들, 다시 말하자면 곳에 따라서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존재하거나 어떤 곳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개별 현상들을 하나의 통일적인 사유상으로 종합함으로써 얻어진다. 이러한 사유상은 그 개념적 순수성에서는 현실 세계의 그 어느 곳에서도 경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유토피아다. 그리고 역사적 연구의 과제는 모든 개별적 현실에 현실이 이러한 이념상에 얼마나 가까운지 또는 먼지를 확인하는데 있다.”(『과학방법론 논총』, 191쪽을 재인용).]

(1) 칼뱅주의 

역사적 인과로 예정론의 의미 묻기

16, 17세기에 자본주의가 최고도로 발전한 문화국가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에서 중대한 정치투쟁과 문화투쟁을 야기했으며 따라서 제일 먼저 고찰해야 할 신앙은 칼뱅주의이다. 당시에 칼뱅주의의 가장 특징적인 교리 … 오늘날에도 일반적으로 그렇게 간주되는 교리는 예정론이다. … 어떤 역사적 현상의 본질성에 대한 판단은 … 그 첫 번째 유형은(으로) 가치판단이나 신앙판단 … 두 번째 유형은 어떤 역사적 현상이 다른 역사적 과정에 끼치는 영향에 근거하는 인과적 중요성이 본질적인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로] … 역사적 귀속판단이 문제가 된다. … 후자의 관점에서 … 예정론의 교리가 문화사적으로 끼친 영향에 따라 그것에 어느 정도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를 묻[고자 한다.](173쪽)

예정론의 역사적인 영향 

이 교리[예정론]는 칼뱅주의가 국가에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고 당국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 일차적 요인[이며] … 17세기의 대규모 종교회의 … 수많은 종교회의에서는 이 교리를 정경적[正經的: 구약과 신약 정도의] 타당성을 지닌 교리로 승격하는 것을 중심과제로 설정하였다. … 그 교리[예정론]는 ‘전투적 교회(ecclesia militans)’의 수많은 영웅들에게 확고한 발판을 제공했으며 18세기와 19세기에는 교회분열을 초래했고 대규모 신앙 각성 운동의 사기를 진작하는 독전의 함성이 되어주었다(174-176쪽).

청교도적 칼뱅주의/예정론의 정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9조 (자유의지에 대하여)
[제3항] 인간은 죄의 상태로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영적 선을 행할 의지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러므로 자연적 인간은 선을 아주 싫어하고 죄 속에서 죽어 자신의 힘으로는 회심[회개]할 수 없거나 아예 회심을 예비할 수도 없다. 

제3조 (신의 영원한 예정에 대하여)
[제3항] 신은 자신의 영광을 계시하기 위해 얼마의 인간들은 … 영원한 삶으로 예정하셨고 다른 인간들은 영원한 죽음으로 예정하셨다.
[제5항] 인류 가운데 영원한 삶으로 예정된 자들은 …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선택한 자들이니 … 모든 것은 신의 영광스러운 은총을 찬미하기 위해 선택된 것이다.

[“신의 은총은, 신의 결단이 확고하고 불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은 자가 잃어버릴 수 없으며 그것을 거부당한 자가 얻을 수 없는 것이다(181-182쪽)”가 이 3조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제10조 (효력 있는 부르심에 대하여)
[제1항] … 자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일을 하도록 작정시키신다(176-177쪽).

칼뱅주의 예정론의 형성

그것[예정론]에 대한 가치평가가 아니라 그것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이다. 예정론이 형성되는 데는(177쪽) 두 가지 경로가 가능했다. … 종교적 구원의 감정이, 모든 것은 오직 한 객관적 힘의 전유(專有)적인 작용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지 그 자신의 가치로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고한 의식과 결부 … 루터도 … 신의 ‘은밀한 결단’을 자신의 영속적인 종교적 은총을 확고하게 보장해주는 절대적으로 유일하고 무한한 원천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신학사상에서 결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 더욱 ‘현실정치적’이 되어감에 따라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178쪽). … 그러나 칼뱅에게는 그 사태가 정반대로 전개되었다. 즉 교리상의 적대자들과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예정론 교리의 중요성은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증대되었던 것이다. … 칼뱅의 경우 이 신의 ‘가공한 결정(decretum horrible)은 루터의 경우처럼 체험된 것이 아니라 사유된 것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라 온통 신에게만 집중되는 종교적 관심의 방향에서 그의 사유가 점점 논리적 일관성을 띠게 되면서 그 교리의 중요성도 점차 증대했다(180쪽).

신과 인간의 관계: 신의 비인격성과 불가지성(不可知性)

신이(180쪽)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며 … –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구원받도록 선택되었다는 사실까지도- 오직 신의 위엄의 찬미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만 의지를 가질 수 있다. 지상적인 ‘정의’의 척도를 신의 지고한 섭리에 들이대는 것은 무의미할뿐더러 신의 위엄을 훼손하는 것이다. …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메울 수 없는 심연에 의해 신과 분리되어 있으며, … (신약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여기에서 모든 인간적 이해 능력을 벗어나는 초월적 존재가 되는데, 이 존재는 영원으로부터 전혀 측량할 길 없는 결단에 따라 각 개인에게 그 운명을 배당하고 우주의 극소한 것까지 주관한다(181쪽).

예정설의 영향(1) 개인의 내적 고독감 

이 … 비인간적인 교리는 … 다음과 같은 결과를 …(,) 각자 개인이 직면하는 전대미문의 내적 고독감(이라는.) 종교개혁 시대의 인간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삶의 관심사는 다름 아닌 영원한 구원이었는데 … 아무도 그들을 도와줄 수 없었다. 설교자도 … 성례전(sacrament)도 … 교회도 도울 수 없(었)다(182쪽).

예정설의 영향(2) 탈주술화의 완결과 성례실천의 소멸 

(루터주의에서는 아직도 완전한 논리적 일관성을 띠는 형태로 발전하지 못한) 교회적·성례전적 구원의 절대적 폐지야말로 가톨릭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 모든 주술적 구원 추구 수단을 미신과 독신(瀆神: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난했던 저 위대한 종교사적 과정, 즉 세계의 탈주술화 과정이 여기에서 완결되었다. 진정한 청교도들은 심지어 장례식에서도 일체의 종교적 의식의 흔적을 배척했고 노래도 예식도 없이 가까운 사람의 장례를 치렀는데, 이는 … ‘미신’(superstition), 즉 주술적·성례전적 방식의 구원효과에 대한 그 어떠한 신뢰심도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신이 은총을 거부키로 결정한자에게 다시 그 은총을 얻게 해주는 주술적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수단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다(182-183쪽). 칼뱅 자신이 단지 성례전적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개인적 고해성사가 소리 없이 사라져버린 사실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 이제 감정적으로 강화된 죄의식을 정기적으로 ‘방출하는’ 수단이 제거(되었다)(185쪽).

예정설의 영향(3) 감각적 문화에 대한 혐오와 개인주의의 형성

인간의 내적인 고립은 [성례 실천의 소멸과 함께] … 모든 감각적·감정적인 요소에 대한 청교(도)주의의 절대적인 부정적 태도의 근거를 제공했으며 … 모든 감각적 문화 일반에 대한 근본적인 혐오의 근거를 제공했다. … 청교주의적 과거를 지닌 국민들의 ‘국민성’과 제도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저 탈환상적이고 비관주의적인 색채를 띠는 개인주의의 원천 가운데 하나를 형성했다.(183쪽). … 버니언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멸망의 도시’에 살고 있음을 자각하고는 지체 없이 천국의 도성으로 순례를 떠나라는 부름을 받은 후 … 아내와 아이들[을 떠나]…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고 “생명, 영원한 생명”을 외치면서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가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자기 자신의 구원만 생각하는 청교도의 심정[을 보라.](186쪽)

예정설의 영향(4-1) 세속적 직업 노동과 ‘신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한’ 노동

세계는 신을 찬미하도록 –그리고 오로지 이를 하도록- 정해져 있으며, 선택된 기독교인은 자신이 맡은 바 본분을 다해 신의 계명을 집행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신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하여 –그리고 오로지 이를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나 신은 기독교인의 사회적 활동과 성취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 신은 기독교인의 삶이 자신의 계명에 따라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자신의 영광을 드높이는 목적에 이바지하기를 원한다. 칼뱅주의자들이 세상에서 행하는 사회적 노동은 어디까지나 “신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한”(in majorem gloriam Dei) 노동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회 전체의 현세적 삶에 이바지하는 직업노동도 역시 그러한 성격을 띤다. 우리는 이미 루터가 ‘이웃 사랑’으로부터 분업적 직업노동을 도출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불확실하고 순수한 구성적·사유적 단초에 머물던 것이 칼뱅주의자들에 와서는 윤리적 체계의 특징적인 일부분이 되었다(190쪽).

예정설의 영향(4-2) 세속적 직업 노동과 구원의 확실성, 은총 상태

모든 신자들에게 즉각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의문이(191쪽) 제기될 수 밖에 없었고, 그와 더불어 다른 모든 관심사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과연 선택되었는가? 그리고 나는 내가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 그러나 칼뱅 자신에게는 이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신의 ‘도구’라고 여겼고 자신의 은총 상태를 확인했다. … 우리는 다만 신이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고 참된 신앙에서 생겨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신뢰에 만족해야 한다. … 그러나 자(192쪽)연스러운 일이지만 그의 후계자들과 특히 광범위한 계층의 평신도들에게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193쪽). … 이 교리에 의해 야기된 온갖 고통을 다루어야 했던 목회 실천에서는 더구나 그랬다. … 이러한 어려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처(했는데) … 두 가지 유형의 목회적 권고가 특징적으로 부각된다. 첫째로 자신이 선택되었다고 간주하고 일체의 의심을 악마의 유혹으로서 물리치는 것이 절대적인 의무가 된다. 둘째로 그러한 자기 확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직업노동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수단이라고 철저히 가르쳐 각인시켰다. 직업노동이 그리고 오직 직업노동만이 종교적 회의를 씻어버리고 은총 상태의 확실성을 제공한다는 것이다(194쪽).

예정설의 영향(4-3) 세속적 직업 노동과 ‘유효한 부름’

신과 신에게 은총받은 자들의 합일은 오직 신이 그들 속에서 역사하고(operatur) 그들이 이 역사를 의식함으로써만 일어날 수 있고 알 수 있다 – 다시 말해서 그들의 행위가 신의 은총에 의해 야기된 신앙에서 유래하며, 이 신앙 자체는 그러한 행위의 특질에 입각해 신이 역사한 것으로 정당화됨으로써만 일어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다. [결정적인 구원상태의 심층적인 차이는] 즉 종교적 엘리트들은 자신을 신의 권능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느끼거나 신의 권능을 실현하는 도구로 느낌으로써 자신의 은총상태를 확신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그들의 종교적 삶이 신비주의적 감정문화로 기울고[루터와 같이], 후자의 경우에는 금욕주의적 행위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칼뱅주의처럼]. … 신앙이 구원의 확실(196쪽)성에 견고한 토대를 제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행위에 객관적으로 끼치는 영향에 의해 증명되어야 한다. 즉 신앙은 ‘유효한 신앙’(fides efficax)이어야 하고, 구원의 부름은 ‘유효한 부름’(effective calling)이어야 한다. 

예정설의 영향(5) 하나의 체계로 고양된 행위구원주의, 또는 일관되며 조직적인 생활양식

오로지 선택된 자들만이 실제로 유효한 신앙(fidex efficax)을 가지며 … 거듭남(regeneratio)과 그로부터 결과하는 삶 전체의 성화(聖化, sanctificatio)에 힘입어 … 진정한 선행을 통해 신의 영광을 드높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품행이 – 적어도 그 기본적 성격과 지속적 의도라는 관점에서 보면 – 신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 자(197쪽)신의 내부에 살아있는 힘에 근거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신의 품행은 … 신이 역사한 것이라는 것을 의식함으로써 … 신앙이 추구하는 … 최고의 선, 즉 구원의 확실성을 획득한다. … 선행은 기술적 수단이다. … 구원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는 기술적 수단이다. … 그러나 … 매 순간 선택되었는가 아니면 버림받았는가의 냉혹한 양자택일에 직면해 행해지는 체계적인 자기통제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198쪽). … 칼뱅주의의 신은 그 신자들에게 상호 간에 아무런 관련도 없이 수행되는 [가톨릭에서의] 개별적인 ‘선행들’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로 고양된 행위구원주의를 요구했다. … 그리하여 일상인의 윤리적 실천은 무계획적이고 비체계적인 성격을 벗어나 생활양식 전체를 일관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형성하게 되었다. 18세기 청교주의 사상의 마지막 위대한 부흥운동의 담지자들에게 ‘메서디스트들’이라는 명칭이 붙여진 사실이나 17세기 그들의 선조들에게 그 명칭과 완전히 동일한 의미를 갖는 ‘엄격주의자들’이라는 명칭이 적용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202쪽).

예정설의 영향(6) 금욕주의적인 성격

인간을 자연적인 상태(status naturae)에서 은총받은 상태(status gratiae)로 승화시키는 은총의 역사는 오직 매 순간과 모든 행위에서 삶 전체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만 보증될 수 있었기(에) … 현세적 진행 과정에서 철저히 합리화되었고 지상에서 신의 영광을 드높인다는 오로지 한 가지 관점에 의해 지배되었다(202쪽). … 오직 자아의 부단한 성찰에 의해 인도되는 삶만이 자연 상태(status naturalis)를 극복한 것으로 간주 … 그리하여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이라는 명제를 당대의 청교도들은 바로 그러한 윤리적 관점에서 재해석해 … 이러한 합리화 과정의 결과로 개혁주의 신앙에 특별히 금욕주의적인 성격이 부여되었(다.)(203쪽)

금욕주의

기독교적 금욕주의는 … 중세에 이미 철두철미하게 합리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 서방 기독교의 수도승적 생활양식이 갖는 세계사적 의미가 동방 기독교의 수도원 제도가 가지는 세계사적 의미와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근거는 바로 이 합리적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203쪽). … 서방 기독교의 수도승적 생활양식은 체계적으로 완성된 생활양식의 방법 … 그 목표는 자연 상태(status naturae)를 극복하는 것 … 인간을 … 계획적 의지의 지상(至上)권에 복속시키고 그의 행위를 지속적인 자기통제그 행위의 윤리적 효과에 대한 숙고의 지배 아래에 두며, … 수도승을 –객관적으로- 신의 왕국에 봉사하는 노동자로 교육시키며 … 그에게 자신의 영(205쪽)혼이 구원받았음을 확신시키는 데 있었다. 이러한  –적극적인- 지배는 … 청교주의의 실천적 삶이 추구한 최종적인 이상이기도 했다(206쪽)

이러한 금욕주의적 생활양식이 항구적으로 지향할 수 있었으며 또한 실상 명백히 필요로 했던 확고한 규범은 물론 성서에서 받아들였다. … 특히 칼뱅주의의 ‘성서정치’(Bibliokratie)(211쪽) … 결론적으로 말해 구약적 경건성 가운데 자신과 동질의 구성요소를 선택해내어 자신의 것으로 동화시킨 것은 궁극적으로 칼뱅주의 자체의 고유한 기본 특성, … 바로 그 금욕주의적 기본 특성이었던 것이다(212쪽).

금욕주의와 세속적 직업 생활

종교적 의미에서 탁월하게 조직적인 삶을 영위한 인간은 항시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수도승 뿐이었고, 따라서 금욕주의가 한 개인을 강력하게 지배하면 지배할수록 그는 그만큼 더 일상적 삶으로부터 격리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세속적 도덕의 초월에 특별히 거룩한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최초로 제거한 이는 루터였고 칼뱅주의는 이 점에서 단지 그를 따랐을 뿐이다. 이미 세바스찬 프랑크가 종교개혁의 의미는 이제 모든 기독교인이 평생 수도승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정신적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그러한 신앙의 정곡을 찌른 것이다 …  지금까지 수도원 제도에 그 최고의 대표자들을 공급해왔던 저 열정적이고 진지한 내면적 인간들은 이제 세속적 직업 생활 속에서 금욕주의적 이상을 추구하도록 교육되었다. 그러나 칼뱅주의는 [금욕적 이상의] 그 발전 과정에서 거기에다가 적극적인 요소, 즉 세속적인 직업 생활에서 신앙을 확증할 필요가 있다는 사상을 첨가했다(209쪽).

종교적 귀족주의

칼뱅주의는(209쪽) … 금욕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동인을 제공했으며, 또한 그 윤리가 예정론에 정착됨으로써 수도승들의 탈세속적이고 초세속적인 종교적 귀족주의가 신에 의해 영원으로 예정된 이 세속적 성도들의 종교적 귀족주의로 대체되었다. 이 귀족주의는 그 변경 불가능한 특성으로 인해, 중세 수도승들이 단지 외적으로만 세속과 분리되어 있던 것에 비해 근본적으로 메울 길 없고 또한 보이지도 않기 때문에 훨씬 무시무시한 심연에 의해 영원으로부터 버림받은 다른 인간들과 단절되어 있었다(210쪽).

예정론이라는 교리와 금욕주의라는 도덕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고찰에 근본적인 확증 사상을 조직적 도덕의 심리학적 출발점으로 설정하고 그 사상[칼뱅주의]을 다름 아닌 예정론과 예정론이 일상생활에 대해 가지는 의미에 비추어 전적으로 ‘순수배양’의 방법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신앙과 도덕을 결합하는 도식으로서의 확증사상은 앞으로 동일한 형태로 반복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가장 일관된 저 교리, 즉 예정론에서 출발할(216쪽) 수밖에 없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내부에서는 이 교리가 그 최초의 신봉자들이 생활양식을 금욕적으로 형성하는 데 가지는 의미들이야말로 루터주의의 (상대적인) 도덕적 무기력과 가장 근본적으로 대조를 이룬다(217쪽).

(2) 경건주의와 경건주의의 난점 

경건주의는 처음에 영국과 특히 네덜란드의 칼뱅주의적 토양에서 성장했고, 전혀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서서히 루터주의로 이행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정통 칼뱅주의와 연결되어 있다가 17세기 말경에 슈페너의 활약으로 루터주의에 흡수되었으며, 그 교리의 토대도 부분적으로 수정되었다. 경건주의는 교회 내부의 운동으로 머물렀는데, 단지 친첸도르프를 추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모라비아 형제단 내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 후스파와 칼뱅주의에 의해 각인된 일파(‘헤른후트’)만이 감리교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의지에 반해 독특한 종류의 분파를 형성하게 되었다(167-170쪽). … 역사적으로 예정 사상[예정론]은 또한 일반적으로 ‘경건주의’라고 불리는 금욕주의적 운동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 운동이 개혁파 교회 내부에 머물렀던 시기에는 경건주의적 칼뱅주의자들과 비경건주의적 칼뱅주의자들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을 설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219쪽). … 슈페너, 프랑케, 친첸도르프의 이름과 결부되어 있고 루터주의의 토양 위에 존립하는 독일 경건주의의 발전 과정을 고찰하려면 이제 예정(222쪽)론의 토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정론에 이르러 그 논리적 정점에 도달한 저 일련의 신학적 사고 방식 영역에서 필연적으로 벗어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 아무튼 우리의 특수한 관점에서 볼 때 경건주의가 의미하는 바는 결국 조직적으로 신장되고 통제된, 즉 금욕적인 생활 양식이 비 칼뱅주의적 신앙의 영역에도 침윤했다는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223쪽). … 요컨대 독일 경건주의를 여기에서 우리에게 문제시되는 관점에서 고찰한다면, 그것의 금욕주의가 종교적으로 정초되는 과정에서 칼뱅주의의 철두철미한 논리적 일관성에 비해 현저히 뒤처지는 동요와 불확실성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루터주의의 영향에 의해, 또 부분적으로는 그 신앙의 감정적 성격에 의해 조건지어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요소를 루터주의와 대조적으로 경건주의에 고유한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일면적이다(229쪽).

그럼에도 즉 칼뱅주의자들의 합리적인(221쪽) 인격이 ‘감정’에 의해 무너지지 않도록 버티어주던 저 ‘제동장치들’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그와 더불어 경건주의의 경우에는 피조물의 타락성에 대한 칼뱅주의 사상도 감정적으로 파악되면 –예컨대 ‘벌레라는 느낌’의 형태로- 직업 생활의 활력을 근절시킬 수 있었다(222쪽). … 그러나 칼뱅주의와 비교한다면 경건주의적 삶은 그 합리화의 강도에서 필연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영원한 미래를 보증하는 은총 상태는 항상 새로이 확증되어야 한다는 사상이 갖는 내적 동인이 신자들의 감정에 호소하면서 현재로 굴절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구원으로 예정된 자들이 부단하고 성공적적인 직업노동을 통해 항상 새로이 획득하려고 시도한 자기 확신이, 부분적으로는 순수하게 내적인 체험에 지향된 감정적 흥분의 결과이자, 또 부분적으로는 경건주의가 심한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면(229쪽)서도 결국에는 대개 용인한 루터주의적 고해 제도의 결과인 저 존재의 겸양과 연약함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 우리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것은, 이 감정적 경건주의의 특성은, 청교도들의 종교적 생활양식과 대조적으로, 당연한 일이지만 무수한 중간(230쪽)단계를 거치면서 아주 점진적인 변화 과정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가 가져온 실천적 결과를 잠정적으로나마 특징지어봐야 한다면, 경건주의가 배양한 덕목은 한편으로 ‘직업에 충실한’ 관리, 피고용인, 노동자 및 가내공업자를,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주로 가부장적이면서 신을 기쁘게 하는 겸양의 심성을 지닌 고용주 발전시켰다고 할 것이다. 이에 비해 칼뱅주의는 시민계층적·자본주의적 기업가들의 엄격하고 정직하며 적극적인 정신과 보다 선택적 친화력을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순수한 감정적 경건주의는 ‘유한계급’을 위한 종교적 유희였다(231쪽).

(3) 감리교와 감리교의 난점 

감리교[methodism]는 18세기 중엽에야 비로소 영국국교회 내부에서 발생했는데, 그 창시자들의 의도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옛 국교회 내부의 금욕적 정신을 새로이 각성시키려는 데 있었으며, 그 발전 과정에서야 비로소, 특히 미국으로 전파되면서 영국국교회에서 분리되었다(167쪽). … 감정적이지만 또한 그와 동시에 금욕적이기도 한 신앙이, 칼뱅주의적 금욕주의의 교리적 토대에 대한 점증적 무관심이나 거부와 결합된 것이 대륙 경건주의의 영미판인 감리교의 특징 … 그것은 구원의 확실성을 획득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활양식을 ‘조직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 처음부터 구원의 확실성을 획득하는 것이 중차대한 문제(이며) … 종교적 실천의 중심점으로 기능(하였다.) … 감리교와 독일 경건주의의 어떤 집단들 사이에 그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의심의 여지 없는 친화력이 존재하는데, … 조직적 방법이 특히 ‘회심[회개]’이라는 감정적 작용을 유발하는 데로 전용되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 처음부터 대중선교를 목표로 (삼기도 하였다.) (231쪽) … 우선 단순히 감정적인 모든 것을 기만이라 보고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 칼뱅주의와 대조적으로,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에서 흘러나와 순수하게 느껴지는 은총받은 자의 절대적인 확신이 원칙적으로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유일하게 의심할 여지 없는 토대로 간주되었다(232쪽). … 그리하여 회심이라는 정서적 행위가 조직적으로 유발되었다. 그리하여 회심이 이루어진 후에는 친첸도르프의 감정적 경건주의의 방식에 따라 신과의 합일을 경건하게 향유하는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게 환기된 감정은 그 즉시 합리적으로 완전성을 추구하는 길로 인도되었다. 그러므로 감리교에서는 신앙의 정서적 성격이 독일 경건주의 식의 내면적인 감정적 기독교로 귀결되지 않았다(235쪽).

그럼에도 감리교도들 가운데 예정론의 추종자였던 신자들에게는 구원의 확실성 금욕적인 생활양식에서 연유하며, 또한 그것에 의해 부단히 새롭게 확증되는 은총 의식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은총과 완전성을 느끼는 것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은 다음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의미했다. 즉 천성이 약한 신자들의 경우 ‘기독교인의 자유’를 반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조직적 생활양식을 붕괴시키거나, 아니면 이러한 결론이 거부되는 경우 현기증이 날 만큼 성도의 자기 확신이 극단적으로 고양되는 것, 다시 말해 청교주의적 유형의 감정적 양양을 의미했다. 그러자 예정론을 추종하는 감리교도들의 적대자들이 공격해왔으며, 그들은 이러한 공격에 직면해 성서의 규범적 타당성구원 확증의 불가결성을 더욱더 강조함으로써 앞의 두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저지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그 적대자들은 성공적으로 감리교 운동의 내부에서 은총의 상실 가능성을 설파한 반칼뱅주의적 웨슬리 노선을 강화시켰다. 형제단을 통해 웨슬 리가 받은 강력한 루터주의적 영향은 이러한 발전을 강화했고 감리교 도덕의 종교적 지향성이 갖는 불확실성을 가중시켰다(234쪽). 그러므로 감리교는, 우리의 관점에서 고찰하면, 그 윤리에서 경건주의와 유사하게 불안정한 주춧돌 위에 세워진 구성물로 보일 수 밖에 없다(235쪽).

(4) 재세례파[침례교] 운동에서 발생한 분파들

칼뱅주의와 재세례파[침례교]는 그 발전 초기에 첨예하게 분리되고 대립했지만, 17세기 후반의 침례교에서 양자는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으며(170쪽) … 유럽 대륙의 경건주의와 앵글로색슨 국민들의 감리교는 그 사상적 내용으로 보나 역사적 발전 과정으로 보나 이차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칼뱅주의 다음으로 등장한 프로테스탄트적 금욕주의의 두 번째 독자적 담지자로는 재세례파[침례교]와 16, 17세기가 경과하면서 그로부터 직접 또는 그 종교적 사고 형태를 수용하면서 발생한 분파들, 즉, 침례교, 메노파, 그리고 특히 퀘이커교가 있었다. 이들과 더불어 우리는 그 윤리가 개혁주의적 교리와 원칙적으로 이질적인 토대 위에 근거하는 종교 공동체를 접하게 된다(236쪽). … [달리 말해 이제는 ‘교회’ 아니라 ‘분파’로 받아 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내적으로 동화하는 것에 칭의의 본질이 있었다. 그리고 이는 개인적인 계시를 통해 일어난다. 즉 각자 안에서 성령이 역사함으로써, 그리고 오로지 그럼으로써만 일어난다. … 그 결과 교의에 대한 지식이라는 의미에서의 신앙이라든가 참회를 통해 신의 은총을 파악한다는 의미에서의 신앙은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237쪽)

그럼에도 각 개인의 삶에 대한 교회경찰의 통제는 칼뱅주의적 국가교회가 지배하는 영역에서는 거의 종교재판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이는 오히려 조직적이고 금욕적인 구원 추구에 의해 조건 지어진 개인적 힘의 해방에 직접적으로 역작용을 할 수 있었고, 또 상황에 따라서는 실제로 그랬다. 마치 국가에 의한 중상주의적 규제가 비록 산업을 육성할 수는 있었지만 적어도 그 자체만으로는 자본주의 ‘정신’을 배양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오히려 국가의 중상주의적 규제는 경찰적·권위적 성격을 띠는 경우에 자주 자본주의 정신을 이내 마비시켜버렸다- 금욕에 대한 교회의 규제도 과도하게 경찰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발달된 경우에 동일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즉 그러한 경우 금욕에 대한 교회의 규제는 특정한 외적 행위를 강요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조직적 생활양식에 대한 주관적 동인을 마비시켰던 것이다. 이에 대한 모든 논의는 국가교회의 권위적인 풍속경찰이 끼치는 영향과 자발적 복종에 근거하는 분파의 풍속(246쪽)경찰이 끼치는 영향 사이에 존재한 커다란 차이를 유념해야 한다. 아무튼 재세례파 운동이 그 모든 교파에서 근본적으로 ‘교회’가 아니라 ‘분파’를 형성했다는 사실은 이들 교파의 금욕주의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는데, 이는 –각각의 경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실상 자발적 공동체 형성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던 저 칼뱅주의, 경건주의 및 감리교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였다(247쪽).

2. 금욕주의와 자본주의 정신 

칼뱅주의에서 발생한 영국 청교주의가 직업 관념을 논리적으로 가장 일관되게 정초했기 때문에(332쪽), … (리처드 박스터의) 『성도들의 영원한 안식』과 『기독교 훈령집』(을 검토한다.)(335쪽)

가장 무거운 죄인 시간 낭비

윤리적으로 진정 배척해야 하는 것은 요컨대 소유에 안주하는 것이고, 부를 향락하며 그 결과 태만과 육욕에 빠지는 것이고, 특히 ‘거룩한’ 삶의 추구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유는 달리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러한 안주의 위험을 수반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렇다. 또한 ‘성도들의 영원한 안식’이란 내세에 있으므로, 이 지상에서 인간은 자신의 은총을 확인하기 위해 “낮 동안에는 그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하여야” 한다. 태만과 향락이 아니라 오직 행위만이 명백히 계시된 신의 의지에 따라 신의 영광을 증대하는 데 이바지한다. 따라서 시간 낭비야말로 모든 죄 가운데 제일가는 그리고 원칙적으로 가장 무거운 죄가 된다. 또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각자의 소명을 ‘굳게 하기’에 너무나도 짧고 소중하다. 사교, ‘쓸모없는 잡담’, 사치를 통한 시간 낭비 그리고 심지어 건강 유지에 필요한 시간 –6시간에서 아무리 길어도 8시간- 이상의 수면에 따른 시간낭비도 절대적인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아직 프랭클린의 경우처럼 “시간은 돈이다”라는 명제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의미에서는 어느 정도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시간이라는 것은 무한히 귀중하다. 왜냐하면 낭비한 모든 시간은 신의 영광에 봉사하는 노동의 기회를 상실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336쪽).

금욕의 수단인 노동

이에 상응해 박스터의 주저에는 엄격하고 부단한 육체적 또는 정신적 노동에 대한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때로는 격정에 가까운 설교가 관통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설교에는 두 가지 동기가 함께 작용한다. 첫째, 노동은 이미 오래전에 그 효과가 검증된 금욕의 수단이다. 그런 연유로 서방교회는 동방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비기독교 승려 집단의 계율과 극히 대조적으로 예로부터 노동을 금욕의 수단으로 존중해왔다. 노동은 특히 청교주의가 ‘부정한 삶’(unclean life)이라는 개념으로 요약한 저 모든 유혹에 대한 특수한 예방수단이며 – 따라서 그 역할은 결코 작지 않다. … 종교적 회의와 소심한 자책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처방된 것과 동일한 것이 모든 성적 유혹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처방되었다. 그것은 –절제적인 섭생, 채식, 냉수욕 외에도- “네 직업에서 열심히 일하라”는 것이었다(337쪽).

삶 일반의 자기 목적인 노동

둘째, 노동은 그 이상의 것으로서 무엇보다 신이 규정한 삶 일반의 자기 목적이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울의 명제는(337쪽) 무조건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노동 의욕의 결핍은 은총받지 못한 상태의 징후이다. … 재산이 있는 자라도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설사 그가 자신의 욕구 충족(338쪽)을 위해 노동하지 않아도 된다 할지라도 그가 가난한 자와 똑같이 복종해야 하는 신의 계명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즉 신의 섭리는 누구에게나 차별없이 직업(소명)을 예비하는 바, 각 개인은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위해서 노동해야 한다. 더구나 이러한 직업은 루터주의에서처럼 인간이 순응하고 만족해야 할 운명이 아니라 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라는 신의 명령이다(339쪽).

신의 부름과 이윤의 획득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한 직업의 유용한 정도와 그에 상응해 신이 기뻐하는 정도는 물론 일차적으로 도덕적 척도에 따라서,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그 직업에서 생산되는 재화가 ‘전체 사회’에 가지는 중요성의 척도에 따라서 평가되지만. 그에 이어 세 번째로 그리고 자명한 일이지만 실천적으로 가장 중요한 관점(341쪽)이 대두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사경제적 ‘이윤성’이다. 왜냐하면 청교도들이 삶의 모든 장에서 역사한다고 믿는 신이 그의 신자들 가운데 누군가에게 이윤의 기회를 준다면 거기에는 그 나름의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깊은 기독교인이라면 그러한 기회를 이용함으로써 신의 부름에 따라야 한다. “만약 신이 너희에게 너희의 영혼이나 다른 자들의 영혼에 해를 끼치지 않고도 다른 방법보다 더 많은 이윤을 획득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을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이 방법을 거부하고 오히려 더 적은 이윤을 창출하는 방법을 따른다면, 너희는 너희가 받은 소명(calling)의 목적 가운데 하나를 방해하는 것이 되고, 신의 청지기(stewart)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 되며, 또한 신의 선물을 받아 신이 요구할 때 신을 위해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 물론 육욕과 죄를 위한 것이라면 모르지만 진정 신을 위한 것이라면 너희는 부자가 되기 위해 노동해도 좋다. 이렇게 부는 단지 나태한 무위와 죄악적인 삶의 향락으로 유혹하는 경우에만 의심스러운 것이며, 부의 추구도 단지 후일 근심 없고 안일하게 살 수 있기 위해 행해지는 경우에만 의심스러운 것이다. 이에 반해 직업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서의 부의 추구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또한 절실히 요구되기도 한다(342쪽).

사업가의 정당화

주인이 맡긴 달란트를 증식하지 못한 이유로 쫓겨난 저 종의 비유도 청교도들의 눈에는 이 점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342쪽) 것으로 보였다. 그들에게 가난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빈번히 논증되었듯이 병들기를 바라는 것과 똑같은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행위구원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배척되어야 하며, 또한 신의 영광을 손상시킨다는 것이다. 게다가 노동능력이 있는 자가 구걸하는 것은 청교도들이 보기에 나태한 것이므로 죄악이 될 뿐만 아니라, 사도의 말씀을 따르더라도 이웃 사랑의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었다(343쪽).

중세의 윤리는 구걸을 용인했을 뿐만 아니라 탁발승단에서는 아예 찬양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세속의 걸인들조차 자신들이 가진 자들에게 자선을 통한 선행의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에 일종의 ‘신분’으로 묘사되고 존중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 이 방면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한 저 가혹한 영국 구빈법의 입법에 기여하는 것은 청교주의적 금욕주의의 몫으로 남겨졌다(359쪽).

고정된 직업의 금욕주의적 의미를 강력하게 설파한 것이 근대적 전문가주의윤리적으로 신성시했듯이, 이윤 창출의 기회를 섭리적으로 해석한 것은 사업가들을 윤리적으로 신성시했다. 봉건귀족들의 고상한 태만과 졸부들의 천박한 허식은 금욕주의가 똑같이 증오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자수성가하고 절제적인 시민계층den nüchternen bürgerlichen Selfmademan은 최상의 윤리적 평가를 받았다. 즉 신의 섭리를 따라 이윤창출에 성공한 성도가 있으면 언제나 그를 가리켜 “신이 그의 사업을 축복하신다”(God blesseth his trade)고 말했다(343쪽).

불평등한 재화 분배와 ‘생산성’을 위시한 착취의 정당화

영리 활동을 ‘소명’으로 보는 것이 근대 기업가의 특징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소명’으로 보는 것이 근대 노동자의 특징이 되었다(360쪽). 즉 시민계층적 기업가들[부르주아 기업가들]은, 만일 자신이 형식적 공정성의 한계를 지키고 자신의 도덕적 품행이 나무랄 데 없으며 자신의 부를 비속하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신으로부터 충만한 은총과 확실한 축복을 받았다는 의식을 갖고 자신의 영리적 이해관계를 추구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이다. 종교적 금욕주의의 힘은 그 밖에도 시민계층적 기업가들에게 냉정하고 양심적이며 고도의 노동능력을 소유하고서 노동을 신이 원하는 삶의 목적으로 삼고 거기에 매진하는 노동자들을 제공했다. 그리고 종교적 금욕주의의 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시민계층적 기업가들에게 현세에서 재화가 불평등하게 분배되는 것은 신의 섭리의 특별한 역사라고 확신시킴으로써 위안을 주었다. 신은 특수 은총에 의한 차별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차별을 통해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목적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칼뱅은 자주 인용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즉 ‘민중’, 다시 말해 노동자와 수공업자 대중은 오직 빈곤한 경우에만 신에게 복종한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인들은, 인간 대중은 오직 궁핍에 내몰리는 경우에만 노동한다는 명제로써 이 말을 세속화 했는데, 자본주의 경제의 기조에 대한 이러한 정식화는 그 후 저임금의 ‘생산성’에 관한 이론의 흐름으로 합류했다(358쪽).

프로테스(359쪽)탄티즘의 금욕주의 자체는 아무런 새로운 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는 이러한 관점을 아주 철저하게 심화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 규범이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요소를 창출해냈다. 즉, 노동을 소명으로, 은총 상태를 확신하기 위한 최선의, 아니 궁극적으로는 유일한 수단으로 파악함으로써 그 규범에 심리학적 동인을 부여했던 것이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주의는 또 다른 한편으로 기업가의 화폐 취득도 ‘소명’으로 해석함으로써 이와 같이 특별한 노동 의욕을 가진 자들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했다. 이렇게 보면 신의 나라에 대한 배타적인 추구, 다시 말해 오직 소명으로 주어진 노동의무를 이행함으로써 신의 나라에 도달하려는 시도와 교회규율이 당연지사지만 특히 무산계급에 강요한 엄격한 금욕이 자본주의적 의미에서 노동‘생산성’을 강력히 촉진할 수 밖에 없었음은 새삼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360쪽).

프로테스탄티즘의 세속적 금욕주의가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에 미친 영향

이처럼 프로테스탄티즘의 세속적 금욕주의는 – 우리는 지금까지 논한 것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 혼신의 힘을 다해 재산의 무절제한 향락에 맞서 싸웠으며 소비, 특히 사치성 소비를 억압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금욕주의는 전통주의적 경제윤리의 장애로부터 재화 획득을 해방시키는 심리학적 결과를 낳았고, 또 이윤 추구를 합법화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전술한 의미에서) 신이 직접 원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그 질곡을 분쇄해 버렸다. 육욕에 대한 투쟁이나 외적인 재화에 집착하는 태도에 대한 투쟁은, 청교도들과 더불어 퀘이커교의 위대한 호교론자인 바클레이도 명백히 입증하고 있듯이, 합리적인 부의 취득에 대항하는 투쟁이 결코 아니라 부의 비합리적인 사용에 대항하는 투쟁이었다. 그런데 부의 비합리적인 사용은, 피조물 신격화가 되기 때문에 배척해야 하는 그리고 더 나아가 봉건적 감각과 매우 유사한 과시적 형태의 사치를 높이 평가하는 데서 특히 잘 엿볼 수 있다. 이는 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개인적 삶과 전체적 삶의 목적을 위해 부를 합리적이고 공리주의적으로 사용하는 것과는 상치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세속적(351쪽) 금욕주의는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고행을 강요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재산을 필요하고도 실제적으로 유용한 일에 사용한 것을 원했던 것이다.

사경제적 부의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금욕주의는 부정직성에 대항해 투쟁한 것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충동적인 소유욕에 대항해서도 투쟁했다. – 왜냐하면 이러한 소유욕이야말로 금욕주의가 ‘탐욕’, ‘배금주의’ 등으로 배척했던, 부유해지는 것 자체를 최종 목적으로 삼는 부의 추구이기 때문이었다. 즉 소유 그 자체는 유혹이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가 하면 금욕주의는 구약성서와 더불어 그리고 ‘선행’에 대한 윤리적 평가와 매우 유사하게 목적으로서의 부의 추구를 무엇보다 먼저 배척해야 할 태도로 보면서도, 직업노동의 열매로서의 부의 획득을 신의 축복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금욕주의가 부단(352쪽)하고 지속적이며 체계적인 세속적 직업노동을 단연 최상의 금욕적 수단으로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거듭난 인간과 그 신앙의 순수성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확증으로 평가한 이유를 들 수 있다. 그런데 금욕주의가 선과 악을 동시에 낳는 힘이라는 명제를 뒷받침해주는 이 두 가지 근거 가운데 후자가 전자보다 우리의 논의에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그와 같은 종교적 평가야말로 이 연구에서 자본주의 ‘정신’이라고 지칭해온 저 삶의 태도가 확장되는 데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지렛대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금욕주의에 의한 소비의 억압을 금욕주의에 의한 영리 추구의 해방과 결합해서 본다면, 그로부터 나타나는 외적인 결과는 자명하다. 즉 금욕적 절약 강박에 의한 자본형성이 그것이다. 획득한 부의 소비적 사용이 제어되면서 그 부의 생산적 사용, 다시 말해 투자자본으로서의 사용이 촉진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353쪽).

청교도들은 직업 인간이 되기를 원했다 – 반면 우리는 직업 인간이 될 수 밖에 없다(365쪽). … 만약 기계화된 화석화가 도래하게 된다면, 그러한 문화 발전의 ‘마지막 단계의 인간들’(366쪽)에게는 물론 다음 명제가 진리가 될 것이다. “정신 없는 전문인, 가슴 없는 향락인 – 이 무가치한 인간들은 그들이 인류가 지금껏 도달하지 못한 단계에 올랐다고 공상한다(367쪽).”  


막스 베버, 2010(/1904-1905), 김덕영 옮김, 「제2장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직업윤리」,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도서출판 길: 167-418쪽.

Junchol Kim So

도시 연구자, 서울을 살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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