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철
어느 동일한 사회에 있는 평균적인 구성원들이 공통적인 믿음 그리고 감정을 갖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이 공통의 것들이 ‘총체’를 이룬다. 이때, 나름의 삶을 갖는 이 확정적인 체계(총체)에 대해 집합의식 또는 공동의식이라 부른다. 이 집합의식이란 고유한 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그 성격은 사회의 구석구석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다. 집합의식은 분명히 구분된 실체처럼 나름대로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집합의식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개인이 어떤 조건에 처했는가에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둘째 지역이나 도시의 발전 정도, 직업집단이 다르다해도 동일하게 존재하며, 셋째 세대가 바뀐다고 해서 변화하는게 아니라 서로 연속되는 세대들을 연결시켜 준다. 마지막으로 집합의식은 개인을 통하여 실현되지만, 개인의식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정리하자면, 사회의 정신적 유형 중 하나로써 나름대로의 (특수한 조건에 관계없이) 고유한 특징과 생존조건 및 발전양식을 가지고 엄연히 존재한다(뒤르켐, 2012: 128쪽).
스피노자의 생각 하나를 살펴보자. “우리가 사물이 좋아서 그것이 좋은거지, 사물이 좋아서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장난 스럽지만, 인간의 기질과 행위 주체의 성향이 중요하며, 이로부터 기쁨과 고통과 같은 감정이 파생된다고 볼 수 있다. 특정한 행동이 사회적으로 나쁜 이유란, 그 행동이 (본래부터) 나빠서가 아니라, 사회가 그것을 나쁘다고 비난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윗글: 131쪽). 여기에서 이 사유의 예를 살펴보자. 우선, (뒤르켐이 앞 부분에서 설명했다고 하는) “어떤 행동이 범죄적인 것은 그것이 강력하고 분명한 집합의식을 침해했을 때”를 상상해보자. 뒤르켐에 따르면 특정한 행동이 범죄이기 때문에 공동의식을 손상시켰다고 할 수는 없다. 대신에 (범죄가) 공동의식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범죄적 행동이라 말해야 한다. 다름 아니라 특정한 행동을 비난하기 때문에 범죄가 되기 때문이다. 즉, 이 집단감정의 기원과 목표는 더 이상 상관이 없다. 모든 개인은 의식 속에 어느 정도의 강도와 정확성을 지닌 특정한 집단감정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손상시키는 행동을 할 때, 그때의 비난과 부정이 범죄를 만드는 것이다(윗글: 130-131쪽). 범죄와 특정 집단감정 사이의 대립이 범죄의 유일한 조건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공무원들의 결속된 행동이나 사법권에 대한 행정권의 침해, 공공기능에 대한 종교의 침해와 같이, 정부기관(사회생활을 지도하는 특정 기관들)을 침해하는 행동들은 (집단감정이 분노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전 문단의 설명과 상관없이) 억압의 대상이다(윗글: 131-132쪽). 이는 “모든 안팎의 적으로부터 공동의식을 지키는” “형벌적 제제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인)” 정부기관, 즉, 지배권력이 가진 기능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지배권력은 집합의식의 상징이고 살아있는 표현처럼 보인다(윗글: 133-134쪽). 이렇게 통치권력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자리하며, 통치권력이 가진 은밀한 힘에 의존한다(윗글: 134-135쪽). 여기에서 강력한 형벌적 제제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의 존재가 있고 없는게 차이를 만드는 기준이 된다고 따져볼 수 있다.
범죄를 정의하는 건 형벌이다. 즉, 범죄의 정의가 정확하다면, 이는 형벌의 특징과 변화에 따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더욱이 형벌의 주체의 변화는 주요한 살필거리이다.
형벌이란 인간의 열정에 관한 반응이다. 이 성격은 미개한 사회일수록 더 분명하다. 원시인들은 처벌을 위한 처벌을 하고, 고통을 주려는 목적만으로 범죄자에게 고통을 가한다. 그럼에도 그들 자신은 어떤 이익도 얻지 않는다. 무엇보다 처벌이 사람에게만 한정되어 있을 때, 그건 범죄자를 넘어서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 즉 범죄자의 가족, 그리고 이웃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 이유는 처벌이라는게 처벌 정신이라는 하나의 열정이 소진되어야지만 중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처벌의 정신이 처벌을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킨 범죄자인 사람을 파괴하였다해도, 힘이 남아있다면 기계적으로 확장되었다(윗글: 135-136쪽). 그러나 오늘날 형벌의 성격이 바뀌었다. 사회가 형벌을 가하는 건 (미개사회와 달리) 복수를 하기 위한게 아니라,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형벌이 주는 고통은 사회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가진 엄격한 도구에 불과하다. (만족하기 위하여 처벌하는게 아니라) 처벌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범죄 의도가 있는 사람을 무력화하여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범죄행위를 억압하는 건, 분노가 아니라 잘 성찰된 선견지명이다(윗글: 137쪽).
그럼에도 내적 구조가 동일하며, 성격을 바꾸었다고 볼 수는 없다. 미개사회와 현대사회의 차이에 대해, 보복의 본능을 위험에 의해 화가 난 집단의식이 보여주는 자기 보존의 본능이란 전제에서 되살펴 보아야한다. (형벌 자체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현대의 형벌이 고대의 형벌에 비해 행동을 더 크게 의식하면서 결과를 만들어내는데서 차이가 생겼다. 그런데 이 때, 처벌이 섬세하게 고려되었다 하더라도, 그 평가를 살펴 보면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동해보복,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오래된 원칙을 “더 고상한 의미로 이해”하는 정도인 것이다. 게다가 이 처벌의 고려란 범죄자가 치루어야 하는 하나의 속죄를 염두에 둔다. 그렇기에 범죄의 성격을 그 심각한 정도에 따라서 비례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고려하는 것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런 속죄적 성격 탓에 ‘복수’라는 처벌의 본질적인 성격이 달라진 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처벌은 여전히 복수이다(138-141쪽).
정리하자면, 형벌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았고, 오늘날의 복수 욕구는 이전보다 더 잘 조절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문명사회에는 이제 선견지명의 정신이 생겨나서, 이 영역을 더 이상 열정이라는 맹목적인 행동에 맡겨두지 않을 뿐이다. 형벌은 이제 그 강도가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진 범죄에 대한 집단의 열정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윗글: 141-142쪽). 그리고 이 형벌은 사회의 이름으로 정부에 의해서만 공포되고 취소될 수 있다. 강제의 방법을 보유한 주체는 이제 (섬세한 테크닉을 만들어내는) 사회이다. 무엇보다 사회와 그 구성원인 개인들이 공격을 받았다고 여겨질 때, 사회는 형벌로 그 공격을 범죄화하며 억압하는 것이다(윗글: 142-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