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와 내적 독백(quoted monologue)

우리는 일기에 대해 일상적인 의미에서 연대기성과 개인적인 주관성과 진정성을 특성으로 가진다고 이야기한다. 일기라는 형식은 이 세 가지 특성을 고안하기 위해 창출된 독특한 글쓰기일까? 처음부터  세 가지 특성이 모두 일기에 등장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서로 다른 시기에 개별적인 특징들이 제기되었고, 시간을 거치며 일상적인 세 가지 특성이 ‘전형적인’ 일기의 속성으로 여겨져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설명은 빈틈이 많다. 예를 들어, 연대기적 서술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기록일지” 혹은 “레포트”들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야 한다. 최은아(2012: 99쪽)가 말하는 “연감”의 등장과 일기라는 장르의 성립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도 별다른 설명이 없다.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기록이며 진정성을 또 다른 특징으로 보고 있는데, 이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도 부족하다. 설명한 것 같지만, 제대로 설명한 것은 없는 실정이다. 필자 뿐만 아니라, 이 연구노트의 작성자인 나 역시도 무지몽매한 처지이긴 마찬가지이다.)

연대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점은 일기라는 기록이 특정한 주기를 가진 채 쓰이기 때문이다. 흔히 하루라는 주기를 갖는게 보통이고, 쓰는 시기가 불규칙적이라도 24시간이라는 틀, 즉, “하루”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한편, 18세기에 들어와서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기록”이라는 속성이 추가되었다. 개인의 일상과 내면을 담는 또 다른 방식으로 “편지”를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수신자가 없는 만큼 (다르게 말하자면 읽는 사람이 타인이 아니기 때문에) 편지라면 당연히 상투적이거나 의례적인 형식을 갖추지 않아도 되며,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진정성이 있는 글쓰기 형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일기가 가진 “연대기성”, “개인적인 주관성”, “진정성”이란 특성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특성은 아니다. 르네상스와 근대를 거치면서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겪고나서 형성된 특성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최은아, 2012: 99-100쪽).

이같은 특징은 일기보다 일기라는 형식을 차용(借用)한 일기 문학에 대한 구조적인 틀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연대기적 특성은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이란 기법과도 연관이 있다. 한편 “개인적인 주관성의 기록”이란 일기의 특성을 꼽은 것은, 타인의 내밀한 사생활을 공유한다는 인상을 주지만, 결국 “공적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려는 일기-문학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역사에 있어 실제로 사적인 기록들을 모아 ‘출판’, 즉, 일정한 유통과정을 거쳐 공중이 읽을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경우, 내밀한 주관성을 지닌 이 사적 기록물들은 되려 공적인 기록물로써,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일상-도큐멘트로 그 역할이 변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한편으로, 일종의 일기로도 볼 수 있는 ‘의식의 흐름’(최은아, 위의 글: 102쪽)은 하나의 서술 방식으로써, 내적독백(Quoted Monologue/Innerer Monolog)과 체험화법(간접적 내적 독백, Indirect Interior Monologue/Erlebte Rede,영어권에서는 간접적 내적 독백이라 표현하며, 독일권에서는 체험화법으로 표현한다)으로 나눌 수 있다.

의식의 흐름은 『구스툴 소위』를 지배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따로 예를 들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간접적 내적 독백은 한글 소설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방식이다.
(리치와 쇼트가 제시한 예이다. 다른 예로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가 쓴 『젊은 예술가의 초상』(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의 일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음미해보자: At last It had come. He knelt in the silent gloom and raised his eyes to the white crucifix suspended above him. God could see that he was sorry. He would tell all his sins. His confession would be long, long. Everybody in the chapel would know then what a sinner he had been. Let them know. It was true. But God had promised to forgive him if he was sorry. He was sorry. He clasped his hands and raised them towards the white form, praying with his darkened eyes, praying with all his trembling body, swaying his head to and fro like a lost creature, praying with whimpering lips.)

1) He wondered, “Does she still love me?”
2) Did she still love him?

차이가 느껴지나? 한글 번역에 돌입하면, 2는 번역이 잘 안된다. 1)의 경우는 <“그녀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하고 그는 궁금해했다.> 정도일텐데, 2)는 <그녀는 그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던건가?>라고 바꿀 수 있다. (문제가 없어보이지만,) 이 말이 누구의 말인지를 고민해보자. 2)의 경우에 화자가 나타나서 전지적인 신처럼 중간에 한 문장을 탁 던져놓은 것 같다. 그렇지만, 이건 화자가 아니라, 작중인물(he)의 말이다. 화자는 그저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내적 독백과 체험화법은 말이 아니라 생각의 내용을 적으며, 화자에 대한 설명 문구가 전혀 없다는 특징을 공유한다. 그러나 둘은 분명 다르다. 내적 독백이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며, 직접 화법에 해당하는 서술방식으로 독자가 화자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신숙경(2002: 12-13쪽)은 내적 독백의 경우에 이야기와 이야기된 것 사이에 시간적인 거리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시말하자면,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 사이에 아무런 시간적인 거리가 없기 때문에, 지난 일에 대해 돌아보는 행위 자체가 주인공의 현재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파악한다. 따라서 과거의 사건은 객관적인 사실이기 보다, 현재의 심리 상태에 따라 (과거) 사건의 본질 역시 끊임없이 변한다고 본다. 또 다른 특징으로 내적 독백의 문장의 불완정성을 들고 있다. 주인공이 내면을 드러내지만, 내면의 변화를 매순간마다 포착하여, 소설 속 주인공인 ‘나’가 주변 상황과 가지는 괴리를 읽어낼 수 있다고 한다. 한편 끊임없는 언어적 실험이 존재하는 언어의 실험실로도 볼 수 있다.) 체험화법은 3인칭의 인칭대명사(he/she/they)를 사용하고 과거시제를 주로 사용한다는 (문법적) 제한을 둔다. 화자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반면에 체험화법은 말과 생각과 느낌 등을 서사적인 형태로 제시하여, 독자가 화자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신숙경, 2002: 10-11쪽).

2015/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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