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봄은 맑시즘적 사회주의의 원천을 프랑스 사회주의, 독일 철학, 영국 정치경제학에서 왔다는 의견을 밝힌다(홉스봄, 1993/1982: 176쪽). 이를 원천으로 삼아, 이전의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다음 세 가지의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첫째,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포괄적이며 사회를 결정하는 근본적인 관계의 분석에 기초를 둔 비판을 전개하였다. 둘째, 사회주의를 진화적인 역사로 상정한 후 분석하였다. 셋째, 낡은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양식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계급투쟁을 통한 혁명으로 달성하고자 하였다(앞의 글: 188쪽). 그러나 초기 저작의 의의란 맑스가 내놓은 의견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사회를 전화시킬 세력”으로써의 (인위적으로 생산된, 중간 신분으리 해체로부터 출현한) 프롤레타리아트와 헤겔과 포이어바흐에 이어진 서로 다른 소외를 통해 자본주의의 운행과 정치경제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이 작업은 “사태를 뿌리에서 파악하는 것”이며, 바로 “인간 자신”을 파악하는 일이다(「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설」, 9쪽).
(프랑스와 영국에서 진행 중인, 각기 다른 혁명과 각각의 영향을 염두에 둔) 맑스는 독일의 처지란 현실적 주인공들이 죽고 없는 세계 질서의 희극배우에 불과한 “현대적 구체제”라 말한다. “종교의 비판은 법의 비판으로, 신학의 비판은 정치의 비판으로 전환(앞의 글, 2쪽)”되기는 하였으나, “독일의 현 상태란 구체제의 솔직한 완성에 불과하고, 이 구체제는 현대 국가의 숨겨진 결점”을 보여줄 뿐이라 보았다. 더욱이 독일의 국민 경제National Ökonomie 혹은 국민에 대한 사적 소유의 지배에 대해서, ‘충돌’하는데 불과하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정치 경제Politische Ökonomie 혹은 부에 대한 ‘사회의 지배’로 해결된다고 차이를 밝힌다. 남은 것이라고는 철학 뿐인 독일에, 프랑스와 영국에서처럼 “현대적 국가 상태와의 실천적 반목”과 유사한 심급이 필요하다는 문제 역시 제기한다(기든스, 2008/1971: 5-6쪽).이 자리에 “독일의 법철학과 국가철학”에 대한 비판이 위치하였으며, 그 내용은 “하나의 독자적 세계로 구성된 정치적 현대의 결점으로서의 독일”을 깨닫고 “근본적 혁명,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해방”으로의 진보이다(앞의 글: 11-12쪽). 이는 “합리적 국가 속에서 구현된 이념”이 아니라, 모든 신분들의 해체를 꾀할 수 있는 (보편적인 고통을 가진 채 살아가기에 특수한 권리와 역사적인 권원(權原)마저 그들을 비켜나가기에 “인간적 권원(權原)”으로만) “인간의 완전한 되찾기”와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 특수한 신분인 프롤레타리아트를 불러낸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인간이며, 해방의 심장이다(「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설」, 14-15쪽).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를 불러 낸, 이 짧은 글로 인간 ‘해방’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사회의 비합리성이 프롤레타리아에게 집약(기든스, 앞의 글: 61쪽)”되어 있다고 하였으니, ‘이론적 무기’로써 그 ‘비합리성’을 밝힐 차례이다. (이후의 작업에 직접적으로 명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의 노력에 밑바탕/알튀세 등의 인식론적 단절로 여겨지는) 이처럼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소외Entfremdung/alternation’를 통하여, 노동과 (리스트 류의 국민)경제학의 관계를 폭로하며 정치경제학에 대한 연구로 이행한다. 게다가 청년-헤겔주의자들과 다른, 실천 노선을 구상한다.
소외란 주체에게 무언가 낯설게 경험되어서 주체가 통제할 수가 없으며, 이 상태가 되려 주체에게서 독립된 힘으로 대립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 73쪽 참조). “국민경제학이 전제로 삼는” 사적소유 아래에서 (인간에게 적대적인) ‘소외된 노동’으로 나타나며, 이처럼 둘 간에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밝힌다.
우선, 맑스는 (인간적 본질에서 벗어난) 소외의 네 가지 경우를 제시한다. (1)노동의 생산물이 노동자에게 낯선 존재로 나타나며, 한편 독립된 힘으로 노동에 대립한다. 결국 대상인 생산물에, 자본에 지배하에 놓이는 상황이다(앞의 책, 73쪽). 이는 노동자와 생산물의 관계에서 소외를 바라본 것이다. 소외란 생산의 행위에서도 발생한다. 다시말하자면, (2)자기 생산 활동으로부터의 소외도 나타난다. 자본주의 하의 노동에서 노동자는 외재화(외화)되며,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고 본다. “파멸”로 향하는 과정 안에 있으며, 노동 활동 과정이 “편안”하지 않다. 이런 노동은 인간적인 기능을 동물적인 것으로 만든다(앞의 책, 75-77쪽). 이런 소외된 노동은 (3)종적(/유적) 존재로서 인간으로부터의 소외시킨다. 다시 말하자면, (소외된 노동은) -류로써의 생활을 자기 개인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유적 생활을 개인적 생활로 격하한다. 더군다나 “정신적인 유적 능력 뿐만 아니라 자연도, 인간의 개인적 실존 수단이 된다. 자신의 몸도, 개인 바깥의 자연도, 정신인 인간적 본질도 소외되게 된다(앞의 책, 78-80쪽). 여기까지 소외되어있다는 세 사실은 ”하나의 직접적인 귀결“을 가진다. 바로 (4)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소외다. ”신들도 자연도 아닌 오직 인간 자신만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이 낯선 힘“은, 노동자의 고통으로 (다른 인간인) 자본가가 향유하며 (생활의) 기쁨을 느끼는 처지를 가리킨다(앞의 책, 81쪽). 인간이 스스로 자기 자신과 대립하고 있으며,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과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 둘 모두가 ‘인간’적 본질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이처럼 ‘소외’의 정체를 밝히며, 이전처럼 도덕적이거나 해결가능하거나 윤리적으로 그릇되었다는 사변적인 ‘부정’을 거부한다. ‘소외된 노동’의 정체를 밝혀내고 ‘소외된 노동’의 폐지가 인간의 종적(/유적)인 본질의 노동해방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실천의 경로를 밝힌 셈이다.
맑스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는 말을 하기까지의 경로인 셈이다. 무엇보다, 변화를 가능케 하는 “비판의 본질적 파토스는 분노이며 비판의 본질적 작업은 탄핵.”이며, 이 변화는 “독일의 정치적 의식의 기존 양식에 대한 단호한 반대자로서 사변적 법철학 비판은 자기 자신 속에서 헤매지” 않아야 한다, “그 해결을 위해서는 오직 다음과 같은 하나의 수단만이 존재하는 과제들로 나아간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인간 해방을 위하여, 사적소유의 폐지를 통하여 ‘소외된 노동’의 폐지를 거치는 “실천praxis”을 통해야 한다고 말이다. “바로 현대 민족들의 공식적 수준에까지 올려 세우고, 민족들의 다음의 미래가 될 인간적 높이에까지 올려 세울 혁명”에 도달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의 이 ‘실천의 이론’은 취약하다.
우선, ‘사적소유’와 ‘소외된 노동’에 대해 역사적으로 검증하는데까지 그치지는 못 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소외된 노동’의 경우에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문제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미진한 분석 때문인지, ‘실천’을 위한 (‘인간학적’) 구호에 그친다는 감상을 지울 수 없다. ”인간은 유적 본질을 실현“해야 한다는 언명에 대한 의문이다. 여기에서 ”유적 본질“의 정체는 마땅한 설명이 없다. 그리고 어떻게 ”유적 본질“ 더 나아가 ”인간적“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도는 없다.
마지막으로 구조의 부재다. 인간이란 개별적이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사회적인 존재라는 일갈은 인상적이다. 그러나 서먹서먹하니 낯설고, 대립항의 하나인데다, 유리된 상태를 ”벗어나“ (인간적 본질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은 또 다른 ”절대적인 관념“이 아닌가. 헤겔에 대한, 포이어바흐에 대한 (더 젊은)맑스의 비판은 이렇게 (젊은)맑스에게로 되돌려져 향하고 있다. ‘실천’이라는 구호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해방의 주체 설정은 명확히 ‘사회’적인 것을 그려낸다. 그러나 인간 해방이나 소외된 노동이라는 (예상) 결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낭만적인 구호이기보다 치밀한 구조가 필요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젊은 맑스는 ‘사유의 구체화’를 거쳐 자신이 불러 낸 ‘프롤레타리아트’들에게 현 사회의 ‘구조도’를 건네야 한다는 과제가 아직 남아있다.
2016/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