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파악하는 ‘효과’(effect)라는 길

한석정의 『만주국 건국의 재해석: 괴뢰국의 국가효과, 1932-1936』(동아대학교 출판부. 1999) 가운데 일부를 정리한 글임.

  1. 들어가면서

국가라는 개념을 정확히 무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그리고 국가라는 개념에 대해 어쩌다 의문을 제기하였을까?) 한석정(1999)은 “국가와 그 상대개념인 사회간의 구분을 전제로(한석정, 28쪽)” 하는데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 ‘국가―사회’라는 대응항의 각 항목을 명확히 규정하기 힘들다. 근 이십여년 간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제기한 “시민사회”와 그곳에서 시도하는 “시민운동”에 대한 강조에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국가와 일정부분 대립하고, 보완하려는 시도에서 ‘국가’는 선명한 듯 보이기도 하니. 우선, 사회와시민사회’를 먼저 살펴보자. 요사이에 관찰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다. 노동자 계층과 분단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중심으로 “노동운동”과 “통일운동”, “(환경운동의 후손인) 생태운동” “평화운동”까지. 그 영역은 참으로 다양하다. 이들의 입장은 국가로부터 각 영역의 “사회”를 확보하며, 국가적으로 제도와 법에 의한 지원과 보호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사회’란 무얼까? “운동 자체를 말하는 건지, 운동의 결과로 도래하는 이상사회”를 말하는건지 역시나 의문이다. 국가를 법적인 제도적인 인정이 이루어지는 최종심급으로 파악하기도 하며, 국가와 차별화를 시도하며 대립하기도 한다. 이들의 사회를 정리하자면, 어떠한 역동(逆動, dynamic)이나 이상사회인지 애매한 무언가에 대해 (자칭 혹은 타칭) ‘사회’라고 말하고 있다. 어설프게 넘어간다면, 이들은 “국가”와는 다르다는 점을 부각한다. ‘시민사회’의 말과 그 존재를, “국가가 그 존재를 끊임없이 나타(한석정, 1999: 29쪽)”내고 있는 상황에 대한 어떤 반응이라고 생각해보자. 근대국가에서(“왕이 곧 국가”라는 세계를 벗어난 상황에서), 지금까지도 어떤 상대항이 없이는 국가가 무어라고 명백하게 말하지 못 하고 있다.

  1. 국가라는 개념: 국가와 사회의 경계는 어떠한가

필자가 정리한 이론적인 논의를 살펴보자.

우선, ‘국가’라는 이 모호한 개념을 버리고 ‘정치체계(political system)’라는 것으로 대치하자는 미국 정치학계의 다원론자(pluralists)의 입장이다. 무얼 가리키는지도 모르게 불분명한 ‘국가’ 대신에 (법테두리 바깥에 있거나 법적 제도에 준하는) 정당이나 이익집단, 언론매체 등에다가 사회제도로서의 가족과 학교와 교회 등을 포함하는 세계를 고안하고자 했다. 즉 정치의 과정적 성격과 (법적이며, 준법적이며, 비공식적인 것을 포함한) 여러 제도를 다루기를 바랐다. 19-20세기 서구에서의 정치적 동우너과 새로운 정치제도의 번성이 이들에게 국가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실패했다. 국가와 민간사회가 애매하다는 관찰을 보여주었으나, 사실상 국가를 자신들의 분석대상 목록에서나 지웠을 뿐이었다. 국가는 여전히 남았다. 다원론자들의 주장  이후, 네틀은 “국가성”에 대해 논하며, “모든 사회에서 정치의 성질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요인(위의 책: 30)”이라 말하였다.

그 다음 주류를 차지한 건 국가론자들(statists)의 국가중심적인 입장이다. 이들의 주장은 세 가지 관점이 뒤섞인 덩어리이다. 첫째는 힌츠적인 국가관인데, “국가를 행위자로 보는 견해”다. 국가가 직원들이나 관리들 고유의 이익을 구현한다는게 그 근거다. 둘째는 국가에 얽힌 구조적인 제약에 초점을 맞추는 제도적인 관점이다. 이때 국가는 ‘제도’를 통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능력과 구조와 담론적인 방법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국가가 사회를 ‘새긴다(shapes)’는 견해다. 국가론자들의 국가중심적인 입장은 국가행위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계급과 사회적 역동을 거부하는 강도’를 통하여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강경한 것과 온건한 것. 국가란 관리가 제도를 통하여 (국가의 사업을 통하여) ‘사회’를 “새기는” 것일텐데, 이때 (제도를 통한 국가의 사업에서 드러나는) 기업과 국가의 관계가 강경(자율)과 온건(의지)으로 구분지을 수 있는 기준이다. 1)강경한 국가론의 주장이란 국가는 자율적인 존재로, 관리들에 의해 사회의 이익과 압력과 관계없이/국내외 행위자의 저항에 맞서 국익을 위해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지적 안목에 의해) 행동한다는 주장이다. 반대로, 2)온건적인 국가론자들 국가의 역할을 지리적 경계를 방어하고 확장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전쟁도발이나 국제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산업자본가들의 도움으로 자본을 축적해야하며, 그 과정에서 민간사회의 자본가들과 (기술혁신과 같은 이익을 취득하기 위한) 협상을 해야 한다. 국가정책이란 국가만의 이익이 아닌, 민간사회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는 논리다. 특히, 온건한 국가주의자들은 국가와 민간사회의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보여준, 조금의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국가간의 경쟁 상황에서 생존을 전제로 구상한 것으로 기존의 국가관의 수정과 크게 다르지 않고, 제한적인 설명만을 보여줄 수 있다. 이념(다원론)이나 주의론(국가론)이 아닌 다른 시각(perspective)은 없을까?

국가를 하나의 조직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무엇보다 국가 자체의 구조적인 취약성이나 잠재력은 없을까? 테다 스카치폴(Theda Skocpol)의 『사회혁명론』(1979)는 살펴 볼 만한 시도이다. 우선 국가의 정의를 살펴보면, “세금을 통하여 자원을 추출하고, 특정영토와 주민들에 강제적인 통제와 정치적인 권위를 행사하려는 조직”(Skocpol and Amenta, 1986: 131; 위의 책, 2001: 33 재인용)이거나, “집행적 권위에 이끌어지고 다소 조정되는 행정, 경찰, 군대 조직(Skocpol, 1979: 29)”이다. 다원론자들이 말한 “정치체계”에 비해 좁게 설명하고 있으며, 국가적 요소와 비국가적 요소를 분리하고, 국가란 비국가적 요소가 침투할 수 없는 (자율적인) 정치기구 로 설정하였다. (필자는 설명에서의 문제가 여럿 발견된다고 하며) 근대 이전, 근대적 혁명 이전의 “국가”를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기든스 역시, 전통사회의 국가 행정력이라는게 주요한 도시너머까지 미치지 않아, 지역 토호가 지배하는 농촌지역은, (국가가) “통치하지 않는 통치”하에 있다고 본 것을 기억해두자. 게다가 혁명이 일어난 적 없는 국가, “위로부터의 혁명”이 이루어진 국가는 자율적인 국가로 볼 수 있을까 하는 질문도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가 자율적인 정치기구라는 주장은 여전히 빈약한 근거의 이상적인 주장이다.

무엇보다 국가와 사회, 둘 사이의 강한 벽을 세우려하다가는 ‘국가의 자율성’이라는 덫에 빠지게 된다. “국가를 개인(정부 관리들), 조직, 혹은 주관(이념, 국익, 취향 등이라는 세 방향 어디로 정의하더라도, 국가와 민간사회의 확연한 경계가 설정되지 않는다(위의 책: 35쪽).” 확연한 경계를 만들려는 시도 자체는 항상 국가와 사회의 배타적인 성질을 드러내려는데 불과하다. “국가≠사회”(국가론자, 스카치폴)이거나 “국가⊃사회”(다원론자)라는 구도를 달리 생각해보자. “사회⊃국가”라고 보자. “부분이면서도, 사회전체의 유지나 결속의 책임을 맡는 역설적인 존재(Jessop, 1990: 360; 위의 책: 36)”라고 말이다. 그러나 알튀세와 발리바르의 지적처럼 “유기적이고 위계적인 전체(organic hierarchized whole)이며, 그 부분들이 각자 다른 수준(level)과 경우(instance)로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것“일 테다(Althusser and Balibar, 1979; 98-99: 위의 책, 36쪽). 다시 말하자면, 국가와 사회는 (기존의 논의처럼) 배타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혹시, 국가가 없다거나, 어떤 실체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페리 앤더슨은 유럽 절대국가가 봉건적 지배계급이 권력을 재구성할 때 제시한 관념이라고 주장한다. 국가는 하나의 관념으로, “특별한 역사적 배경에서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지고 이용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위의 책, 36쪽). 필립 에이브람스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위장이며, “거짓 가공물(illusory artifact)라고 강한 의구심을 드러낸다. 에이브람스에게 있어 국가의 기능이란 복종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지배를 ”제대로 보이지 않게끔 하는(mis-represent)“ 것이다.

그러나 근대국가는 “그것이 사물이든, 관계이든 허구의 관념을 뛰어넘는 존재”이며 경우에 따라 “잔혹한 실체”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어떤 존재”인지, 시급한 일반화 보다 “역사적인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앤더슨의 지적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국가는 스스로를 알린다. 사회와의 외부적 경계가 불분명한 상황이기 때문에, 사회의 부분이면서도 전체를 통솔하려고 하기 때문에, 사회와의 차이를 의도적으로 과시한다. 이 상황에서 (미완의 개념이긴 하지만) 국가사업(state project) 국가효과(state effect)라는 개념은 이 문제에서 약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에 따르면 “국가의 현시성(국가의 효과)은 전략적 사업인 국가의 사업에서 나오며, 국가는 국가 기구 내부의 단결 뿐만 아니라 전체 계급들의 화합(unity)을 획득하기 위해(Jessop, 1990:8; 위의 책: 37쪽)” 스스로를 알린다고 볼 수 있다. 국가사업과 국가효과는 국가와 민간사회를 밀착시키는데까지는 성공하였으나, 내부의 역동을 설명하지는 못 한다. (뿌꼬가 훈육/discipline이라 부르는 것을 차용하여) 미첼은 구조적 효과(structural effect)가 있다며 이 한계를 넘어서려 시도한다. 국가에 있어서 “권력이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작동하는데, 특별한 과정이나 부분의 내부에서 움직여 효율과 정교함”을 증진하는데, 이에 따라 “국가가 사회의 여타 부분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기구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국가는 실재의 구조로서가 아니라, 국가라는 구조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강력하고 형이상학적인 효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문이 열린 셈이다.

  1. 만주국이란 ‘독립국’

필자는 식민국가인 만주국을 통하여 국가의 효과를 적용한다. “초기 만주국”은 (외세의 독립국이라는 형식을 통한) 독특한 지배 전략이 가동되었다. 만주국은 식민국가이다. 어떤 형태의 식민지인가? 유럽 제국의 식민통치는 크게 둘로 구분된다. 프랑스의 직접통치 방식과 영국의 간접통치 방식으로 나뉘는데, 이는 식민지의 경제적(인, 다시 말하자면 비용의) 문제와 직결된다. 조선의 경우는 일종의 직접통치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영국의 인도 지배가 그 예다. 가장 많은 비용이 투여되는 ‘식민지의 방위비’에 있어, 영국은 가능한한 토착자원에서 지출하는 방식으로 인도군을 운영하였다. 반면, 프랑스는 식민지의 방위비를 직접 제출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모든 경비를 식민지에서 얻어내기 위해, 무시무시한 세금을 징수하였다. 필연적으로 토착민들은 저항하였고, 프랑스군은 이들을 진압하는 일련의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만주국의 경우는, 두 상황과 다르다. 그러나 국가의 형태가 어떠하든 “국가는 그 신민의 생산력과 안전에 대한 관심에서 면제될 수가 없다(위의 글: 27쪽)”는 점을 함께 고민하여보자. 이 자리에서 그 만주국의 특수한 국가 형성을 살펴볼 수 있다.

만주국은 ‘독립국’이다. 만주국은 대개 ‘괴뢰국’, ‘꼭두각시(국가)’라는 수식어를 앞에 붙이는데, 필자는 2차대전 이후 “꼭두각시”(puppet)와 1930년대 만주국의 차이를 “국제사회의 인정”에 둔다. 어쨌거나 만주국은 스스로를 독립국으로 불렀다. 일본은 만주국을 세우기 이전부터, 이미 미쓰이물산(三井物産)과 ‘만철’을 통하여 만주 경제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만주국이 설립되고 나서도, 분명 일본 상품의 (수출) 시장이었다. 그러나 달리 볼 필요도 있다. 일본은 ‘독립국’인 만주에, 분명 많은 돈을 투여했다. (만주 입장에서 무역 역조가 뚜렷하지만, 관동군의 주둔으로 인하여 일제는 13억엔, 1931년부터 1937년까지 전체 만주 정부지출의 53%에 해당하는 돈을 낸 것 역시 사실이다.) 이런 상황은 영국의 간접통치와 프랑스의 직접통치와도 다르다. 그것은 만주국이 자체적인 국가사업을 실시하는 ‘독립국’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식민지 조선과 식민지 대만의 경우와는 다르다. 만주국이 독립국인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은 다른 식민지와 다르다. 우선, ‘건국정신’을 기초로 관료와 경찰조직이 만들어졌으며, ‘국군’ 역시 창설하였다. 영국이나 독일, 러시아, 심지어 일본의 ‘근대국가’의 형성에서 알 수 있듯이, “심대한 사회적 제도적 변화를 수반하는, 장구한 시간이 걸리는 과정(위의 책: 24쪽)”이 걸리지 않았다. “무력의 독점에서 사회를 침투하는 일까지 그 과정들이 기민하게 진행”되었다. 다른 식민지들과 달리, “만주제국 황제”가 있었고, 황실을 중심으로 “빈번한 궁정연회와 (일본의 천황과 마찬가지로) 황제의 순시와 관병식이 진행되었다. 무엇보다 ”새 국가, 새 시민, 새 민족의 기운 함양“이 추진되었는데, ”시민정신 함양의 선전“이 시도되었으며, 자연재해가 날 때에는 ”국민을 위한 구제사업“과 같은 ”온정적인 담화“가 이루어졌다. “국제사회의 인정”과 무관하게 만주국은 스스로 독립국 만들기를 진행하였다.

  1. 국가의 효과: 만주국을 통하여

국가는 여러 가지 형식과 방법을 통하여, 그 존재를 보이고자 한다. 특히, 국가의 힘을 다양한 방식으로 과시하는데, 그 방법들을 짚어보겠다. : 폭력 행사를 통해 반국가적 요소를 분쇄하고 격리하기. 경제·문화·사회적 관계를 끊임없이 규제하며, 인민들이 구체적인 촉감(가촉성, 可觸性)을 느기게 하기. 대규모의 기강잡힌 관료조직과 군대 만들기(여기에는 조직과 보수, 유니폼과 같은 외양도 포함된다). 이렇게 국가는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타국과 인민에게 가시화된다고 볼 수 있다.

이해하기 더 나은 방법은, 위의 방법들을 기초로, 국가의 말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필자가 국가 담론이라 이름붙인 국가의 말은 세 방향으로 향한다. 2) (본국本國이나 다른 나라 등) 외부를 향해, 1) (공식이념을 선전하고, 일상을 규제하고, 관리와 군인들을 단련시키는 등) 영토 내부를 향해,  3) (고유한 전통과 의식을 만드는 등) 스스로를 향해, 국가는 말을 한다. 만주국의 경우는 토오쿄오로, 그 ‘신민’에게, ‘독백’의 서로 다른 방향의 말을 한다.

우선 토오쿄오로 향하는 말을 살펴보자. 초기 만주국의 식민국가 형성은, 일본으로부터의 분리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1920년대 일본 군부의 위세가 떨어져, ‘사회적으로 봉쇄’된 상황인 것과 관련이 있다. 특히, 관동군은 “지역 전략”을 통해 “변방세력권”을 건설하기 위하여 만주지역을 선택하였다. 권력의 중심에서 소외된 집단이 자신들의 영토를 만든 셈이다. 특히, 조선이나 대만과 같은 식민지와 달리 “독립국”이란 지위는 본국과 대등한 관계를 취할 수 있다. 관동군이 토오쿄오에서 전해지는 명령을 거부할 법적(형식적) 지위를 가진 상황이다. 또한 전쟁을 통해 만주를 침식해 들어가, 기정사실(fait accompli)로써 지배를 인정받았으며, 산업화과정에서 경쟁적인 남만주철도회사를 자신들의 목적에 의해 쓰일 수 있게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만주국의 성립은, 관동군이 본국에 대한 저항으로, 만주라는 (이미 획득한) 기득권에 몰두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국가는 영토 내부를 향해 말을 한다. 만주국은 ‘독립국’이자, ‘식민국가(colonial state)’이다. 무엇보다 ‘식민국가’를 “불협화음이 일어날 수” 있는, “내부에서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나 돌발사태가 연속적으로 생길 수 있는” 상태로 본다(Thomas, 1994: 65; 한석정, 위의 책: 27 재인용). 다시말하자면, 식민국가를 “외래 정복자 혹은 거류민들의 이익을 위한 편파적인 기구”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외래 거류민과 토착인 사이의 조정자”이거나 “융합의 요소(factor of cohesion)”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국가, 주권국가, 혹은 식민국가이든) 국가가 신민(臣民)의 생산력과 안전에 대한 관심을 버릴 수는 없다. 권력의 주체로써 국가는 대상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속성도 있지만, 대상을 유지하는데 대한 관심 역시 있기 때문이다(위의 책: 27-28쪽). 이런 상황에서 만주국을 일제의 완전한 소유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일본에서 온 지배자들은, “독립국”의 “국민들” 사이에서 헤게모니(hegemony)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관심”을 베풀어야 하며, “어느 정도의 제약”을 가져야 한다. “지지를 얻기 위해 지적, 정신적 영역 뿐 아니라, 물질적인 면에서 투자나 양보를 해야 한다.” 단순히, “우리는 만주국인이라는 민족입니다”는 말로 “국민”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통치를 위한 실질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침략자가 아니라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민들이 그 감촉(感觸)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이 감촉이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 제도적으로 사회복지관과 정책을 만들고, (2) 공식이념으로써 왕도낙토(王道樂土)와 “민족협화(民族協和)를 제기하고, (3) 민간조직으로 협화회(協和會)를 만들어, 외곽단체로써 정부와 국민을 연결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4) 일종의 다민족 국가인 상황에서 ‘공존’을 위한 이념들을 통하여 소수 민족을 챙기며, 특별지방행정단위를 두어, 책임자를 해당 민족 내에서 마게 하였다. (5) 언어 역시 (다른 식민지와 달리) 현지어인 중국어를 공식언어로 선택하였다. (6) (형식적인 자리지만) 정부 고위직은 현지의 중국인들을 임명하였고, (7) 만주국 인민의 복지와 민족협화라는 이념을 우선으로 하는 처지라, 일본거류민들의 기업활동에 다소 제약을 가하기도 하였다. (8) (더군다나 조선과 대만과 달리 토착군으로써) 만주국군이라는 국군도 만들었다. 이들의 역할은 비적 진압을 돕는 것이었다. 지배자들이 불편을 감수하는 상황은, 만주국이 ”독립국“이라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정당성을 얻기 위해, 신민을 향해 담론을 펼쳤다.

이 감촉은 “사회보장”이거나 어떤 “사회적 권리” 중 하나를 부여 받은 상황일 것이다. 만주국에는 “국민”이 있었다. 시민적 권리(civil right)와 정치적(political right)가 아닌, 약간의 사회적 권리(social right)를 부여 받은 상황이었고 말이다. 독립국의 국민이기에, 다른 식민지 주민과는 다른 대우를 받았다. “국가에 의해 최소한의 대우를 받(위의 책: 226쪽)”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국가는 스스로를 향해 말하기도 한다. 국가의 효과란 국가 기구 내부와 모든 계급의 화합만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게다가 신민들로부터의 정당성과 지지가 필수적인 건 아니다. 사회 내부이든 외부에서든 정당성이 없다면? 혼자 떠들 수도 있다. 만주국의 경우, 새 국가의 상징으로 만주국 황제를 두었고, 황제는 (일본의 메이지 ‘천황’과 마찬가지로) 순시라는 형식을 통하여 인민에게 ‘황제’를 알렸다. “왕의 행렬이란 국가를 인민에게 드러내게 하는 것”인데, 인민의 눈에서는 황제라는 사회의 중심을 확인하고, ‘지배자’를 통하여 지배의 의식적 기호를 확인하여 “초월적인 것”, 다시 말하자면 국가와 연결시키는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가 스스로 전통을 만들었다.

  1. 나가면서

이런 사례를 두고 볼 때, 국가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첫째는 사물이다. 조직, 물리력, 민간사회를 새기는 힘이다. 그리고 둘째는 관계이다. 이는 사회적 관계로써, 민간사회의 계급적 이해와 동학이 반영되는 제도적인 총합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효과로 보아야 한다. 근대 국가들은 스스로를 알리려는, 그 존재를 나타내려는 내재적인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국가는 거대한 정책과 제도 뿐만 아니라, 미시적인 수준에서 질서 잡기를 통해 사회의 여타 부분과 떨어져 보이는 기구로 보이려 하는 속성도 있기 때문이다. (앞서, 그 목적은 부분이면서도 전체를 통솔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더욱이 (외부사회가 인정하지 않으려는) 주권과 관련된 노력이었다. 이처럼, 실제 구조로서 뿐만 아니라, “실제 구조”처럼 보이게 하는 시각적이며 언술적(言術的)인 실행으로 파악해볼 수 있다는 말이다.

2016/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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