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작품을 통하여 전쟁기의 일상생활을 복원해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서 작성하였다. 결론도 마땅히 없고, 중간 중간 확인하지 않은 것들도 꽤 많다. 그러나 작가의 사적 경험이 미친 영향, 소설 내에서의 표현 각각을 ‘역사적 사실’과 견주어 비교하겠다는 의도는 나름대로 소중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 6.25 전쟁을 다룬 박완서의 소설: 오빠에 대한 서사의 변화
- 우선 박완서의 작품 가운데 6.25 전쟁에서의 체험을 다룬 소설은 다음의 자료들로, 그 수가 적지 않다.
- 우선 장편 소설로는 『나목』(동아일보사, 1970), 『목마른 계절』(수문서관, 1978),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민음사, 1983),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웅진출판, 1995),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출판, 1992),『그 남자네 집』(현대문학, 2004)과 중편소설로는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일지사, 1976), 『엄마의 말뚝』(일월서각, 1982)이 있다. 단편소설로는「아저씨의 훈장」[『꽃을 찾아서』(창작사, 1986) 수록], 「겨울 나들이」[『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동아출판사, 1995) 수록],「세모」[『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틀니』(삼중당, 1979) 수록],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틀니』(삼중당, 1979) 수록], 「부처님 근처」[『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동아출판사, 1995) 수록] 등이 있다. 단편 소설의 경우는 일일이 다시 살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자료들의 수에 비해, 박완서의 전쟁경험과 소설의 관계에 관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그 중에서 조미숙(2007)의 연구는 『나목』(1970), 『목마른 계절』(1978), 『엄마의 말뚝』(1982),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나』(1992),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와 같은 1990년대 이후 작품을 살펴보며, 소설 속에 묘사되는 전쟁소설의 변화를 추적하며 작가 박완서의 자기검열과 작품의 왜곡을 밝힌다.
무엇보다 박완서의 소설 가운데 오빠에 대한 서사의 변화는 주목할 만하다. 오빠의 사상, 그리고 오빠의 죽음은 앞서 언급한 다섯 작품에서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로 오빠의 사상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나목』(1970)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에서처럼 오빠의 사상이 전혀 노출되지 않는다. 『목마른 계절』(1978)에서의 오빠는 ‘전향’을 한다. 『엄마의 말뚝 2』(1982)의 경우는 오빠의 사상을 비판하는 ‘나’는 오빠와 다른 길을 가려는 인물이다. 둘째로 오빠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서사다. 『나목』(1970)에서는 우연히 폭격을 맞아 사망했고, 『목마른 계절』(1978)과 『엄마의 말뚝 2』(1982)에서는 이웃의 고발로 의용군에 끌려갔다 와서 국군의 오발사고로 다리를 다치고, 인민군관에 의해 죽는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에서는 의용군에 자원했지만 도망쳐 나왔고, 부역과 사상의 색깔 여부에 시달리다 죽는다고 밝힌다. 앞서 작품들을 살피면 아래처럼 분류할 수 있다(조미숙, 2007: 249-250를 참조).
(1) 『나목』(1970)과 『목마른 계절』(1978)
(2) 『엄마의 말뚝 2』(1982)
(3)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
특히 (1)은 허구화의 전략[『나목』(1970)]을 취하고, 행위를 비판하는 전략[『목마른 계절』(1978)]을 취한다. (2)는 다시 허구화하며 담론을 약화하는 전략[『엄마의 말뚝 2』(1982)]을 취하며, 자신의 삶을 은폐한다. 사실에 가까운 (3)과 앞선 (1)과 (2)는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이러한 변화는 1987년의 국내 정세의 변화과 1991년 국제 정세의 변화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작가의 글쓰기가 일종의 자기검열에서 벗어난 시기로, 다시 말하자면, 1990년대에 들어서야 더 이상 자기검열을 하거나, 은폐를 시도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부터는 한국 사회에서 “반공주의에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는 시도로도 볼 수 있다지만, 사실상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쓰기, 곧 자신의 전쟁 경험을 소설에 담는 태도는 작가 자신이 내놓은 “탈냉전 시대의 대책”으로 볼 수 있다. 즉, 1990년대 이후에는 잊지 않기 위해 “망각을 강요하는 정치”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총동원하는 방식으로 소설을 썼던 것이다.
“한국전쟁이라는 이 역사적 격변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치른 희생은 근대 이후 한국의 역사가 지녀온 고통을 모두 합친 것만큼이나 큰 것이었다. 즉 이 전쟁의 이러한 규모와 성격, 그리고 그 피해는 …… 다른 나라들이 근대적 사회혁명과 내전을 통해 일국 수준에서 일정하게 치렀던 역사적 통과절차를 세계적 수준과 맞물린 채 모두 다 한꺼번에 치러야 했던 시간성과 공간성, 그리고 규모성의 반영이었다(박명림, 1994: 86-87)”
이처럼 6.25 전쟁은 굉장히 복잡한 경험이다. 박완서는 한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은 내 운명을 바꾸어 놨어요. … 내가 꿈꾸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했죠”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전쟁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박완서가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것들, 이길 수 없는 현실을 언젠가는 소설로 갚아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도 전개된다. 한편으로 “밑천인 체험의 축적인 기억(박완서, 2012: 191)”이기다. 박완서는 오빠의 일 뿐만 아니라 “6.25 때 학교에 나온 적도 있으니 저대로 … 고초를” 받았다. 게다가 서북청년단과 학교호국단, 한때는 보위사, 인민군 등의 세력을 번갈아 겪으며, “언젠가는 이 상황을 증언하리라”고 다짐하며 “복수의 꿈”을 꾼다. “나중에 나를 회상할 때”를 염두에 두며 말이다.
개인이 자의식 속에서 상징적인 타자를 의미있게 해석하는 과정과 사회적 질서가 형성되는 제도화의 과정이 동전의 양면과 같이 동시에 진행되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박완서란 소설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타자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로부터 형성”한 작가로 볼 수 있다.
소설의 거리로 삼아서는 안되는 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 속에, 버림받은 쓰레기 속에, 외면당한 남루 속에, 감추어진 추악한 것 속에서 소설의 거리는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우연히 얻어지는 건 아닐 겁니다. 삶에 대한 꾸준한 통찰력, 따뜻한 연민, 때로 열정적인 애정에 의해서만 그것을 볼 수 있고, 주워 올릴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주워 올린 다음입니다. 어떤 거리를 소설로 만들기 위해서는 주워 올릴 때와는 딴판으로 일단 뜨악하게 밀어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정이 앞서지 않는 냉혹한 마음으로 추리고 다듬고 지켜졌을 때만 비로소 명색이 소설이라 부를만한 것이 만들어졌지 않았나 싶습니다.
무엇보다 “평범한 일상”, “버림받은 쓰레기”, “외면당한 남루”, “감추어진 추악한 것” 속에서 그가 소설의 거리로 삼은 것들은 학계가 여지껏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써 불러오지 않은 것들이기도 하다. 일상사적 역사쓰기의 시도에서, 박완서의 구술과 소설은 그녀가 “주워 올린 것들”을 통해 일부라도 재복원의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는 자료군으로도 볼 수 있다. 물론 “얼마나 ”뜨악하게 밀어내고“ ”냉혹한 마음으로 추리고 다듬“어 ”소설이라 부를만한 것“으로 만들었는지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1차 자료와 2차 자료 어딘가의 구술과 분명히 2차 자료에 해당하는 소설과 당시 사회에 대한 거시적인 연구들을 교차적으로 비교/대조를 통해 역사적 재복원이 가능하다고 본다, 특히, 앞서 오빠의 사상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 비해서 반공이데올로기적 편견(bias)으로 인한 자기검열로부터 한결 자유로워보이는 일상에 대한 서술은 실재하는 (역사적) 자료로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즉, 작품으로써의 소설과 작가의 삶을 하나의 자료로써, 공식문서와 같은 자료와의 관계 등을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일부나마 재복원할 수 있다고 본다. 박완서(2012a; 2012b)를 통해 복원할 수 있는 (미시사적인 그리고) 일상사적인 주제들을 고민해보면 다음과 같다.
3장 「전쟁」
– 인민군 치하의 서울대학교의 상황, 전쟁기의 가족과 생계, 피난과 가족의 이산, 피난가지 못한 서울사람과 이방인, 전쟁기의 시장, 수복 전후의 서울에서의 일상생활, 일반인이 느낀 전쟁 풍경, 학살과 학살의 관찰자, 빨갱이라는 소문과 혐의
4장 「PX 시절의 만남」
– PX(Post Exchange)와 새로운 물건과 구호품 등을 통한 미군 중심의 경제 활동, PX와 남대문 시장과 밀반출, 영어를 쓰는 생활, 박수근을 비롯한 초상화부, PX의 구성
– 6.25 전쟁 시기의 서울
- 무얼 살펴볼 수 있을까?
1) 서울대학교
박완서는 “6.25때 웬만한 집에서는 학교도 안 나가는데” 자신은 서울대학교에 8월달까지 나갔다고 한다. 수업은 거의 안 했지만, 김일성대학교에서 왔다는 사람의 수업을 들었다고 기억한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학교를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서울대학교는 1950년 말부터 전시연합대학 형태로 학교를 운영하였고, 1951년 2월 18일에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전시연합대학은 1951년 5월에 ‘대학교육에관한전시특별조치령’이 공포되면서 그 법적인 근거를 갖추게 되었다.
이 기억은 사실 전쟁기 서울대학교에 대한 기억과 어긋난다. 『서울대학교 60년사』에 실린 연표(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1028)을 살펴보면, 박완서가 말하는 서울대학교의 풍경은 서울대학교의 역사로 기억되지 않는다. 즉, 1960년 6월 25일을 계기로 “제1학기 등록기간 중 한국전쟁 발발로 대학운영(이) 일시 중단”된 시기다. 9월 15일, 연합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전까지의 시기에도 사실상 학교는 조선인민군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문화선전부가 운영하는 서울대학교는 “신문을 온통 뒤덮은 김일성의 호소문을 읽고 해설하고 경각심을 높이는 일이라든가 등교 공작 따위, 특히 등교 공작에는 혈안이 되다시피 초조하게 서두르고 있었다.”
아침 조회의 수령을 예찬하는 노래로부터 차츰 열광하기 시작하여 그 날 발표되었다는 수령의 호소문을 다시 열광적으로 지지 호응함으로써 완전히 뜨거운 분위기가 조성된다. … 다음은 민청위원장의 훈시로 먼저 영용한 인민군대가 어제는 어디어디를 해방시키고 계속 물밀 듯이 남진한다는 전과 보도와 앞으로 한층 선전 선동 사업과 등교 공작에 창의성을 발휘하여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자는 장황한 연설은 중간중간에 열띤 갈채로 몇 번이고 중단되기까지 한다. 그리고 제국주의와 이승만 괴뢰 도당에 대한 증오의 대목에 가서 마침내 그 열기는 숨막힐 듯이 고조되고, 그 고조된 상태의 지속을 위해 그 날의 모든 과업이 있었다. … (진이가) 등교한 지 일주일이 넘었건만 아직 한 번의 강의도 없었거니와 교수들의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다. 학원은 완전히 학생들의 것이었다. … 교양 시간이란 것이 매일 있었지만 민청위원장과 문화선전부장이 교대로 교양을 맡고 있었고 교재는 신문이 주(主)였다.
[『목마른 계절』(세계사, 1994); 박완서(2012: 102 주88에서 인용]
사실 학교에 나가서 주로 한 일은 (1) 학교에 나오지 않는 학생 집에 찾아가 학교에 나오라고 동원하기, (2) 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궐기를 통해 의용군으로 내보내는 일 등을 했다. (1)의 일에 대한 기억에서 “나오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 결국 여학생만 꽤 많이 남았어요. 그 쪽 간부들하고요”라 밝힌다.
2) 서울 수복과 시민증
대학을 다시 다니게 될 것 같지도 않았거니와 공산 치하에서 학교에 나간 것은 명백한 부역이기 때문에 나는 처벌이 무서워 학교 앞에 얼씬도 못 하고 있는 중이었다. … 등교해서 등록 서류를 작성하는 걸 옆에서 보고 벌써 내가 누구라는 걸 알고 수군댈 만큼 나는 이미 부역한 학생 명단에 올라 있었다. 그런 형편이니 그 날로 등록증을 받을 수 없었지만 며칠 걸려 최종적으로 감찰부장이 신문을 하고 훈계를 하고 학생 등록증을 발급해 주었다. 천신만고 끝에 발급받은 등록증을 제시하니 시민증도 쉽게 나왔다. 지금까지도 그 때 문리대에서 받은 심사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데 … 처음으로 인간 대우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 … 부역의 혐의와 인간 대접의 양립은 두고두고 고마웠고 결과적으로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 믿음만은 잃지 않게 도와 주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05); 박완서(2012: 116 주111에서 인용]
한편으로는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한 후의 상황도 살펴볼 수 있다. 박완서는 서울대학교에 다시 나간 경험을 말한다. 그러나 “교육은 안 이루어지고”, “가서 등록하고 학교 나왔다는 걸로 교수들한테 너 왜 학교 나왔냐고 야단도 맞았다(박완서, 위의 글: 117).” 걱정한 것과 달리 무사히 학교 등록증을 받았고, 이를 통해 ‘시민증’을 받았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시는 시민의 신분을 보장하며, 적의 잠입을 방지하고 ‘오열’을 소탕해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시민증을 갱신 발행하였다. 특이한 점은 이전의 시민증을 무효로 처리하며 도강에 대한 단속하는 데 사용하며, 잔류 시민의 시민증을 갱신하며 부역자를 가려내기도 했다. 이때 시민증의 발행대상은 만 14세 이상의 남녀로서 시장의 명의로 각 동회에서 발행했는데, 시민증이 없는 사람은 ‘적색반동’으로 여기며 통행에 제한을 뒀다. 사실상 ‘공산당이 아님을 증명하는 딱지’였다. 1951년 11월까지 교부받은 시민의 수가 30만여 명이었는데, 당시 시민증을 발급받을 수 있는 사람의 수가 40여만명으로 10만여명이 갱신교부를 받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후에는 경찰로 이관되었고, 시민증을 신청했으나 교부받지 못한 자의 경우에는 합동심사위원회에서 자격조사를 받거나, 발급받지 못한 시민들의 명부가 수사기관에 넘겨져 ‘오열(惡熱) 여부를 확인받아야 했다(강혜경, 2013: 191-193) 이런 상황에서 박완서가 받은 시민증은 처음 겪은 “인간 대우”였고, 흉흉한 공포 분위기에서 “인간에 대한 최종적인 믿음”을 잃지 않은 계기였다.
3) 일상생활: 유통
그녀는 재빠르게 냉엄한 생활의 자세를 취했다. … 집안일을 야무지게 해 나갓다. 집안일이래야 결국 먹는 걸 마련하는 일이었지만. 식구들과 의논해서 당장 입고 벗을 것이 아닌 옷가지들을 시장에 내다가 중간 상인들을 통하지 않고 직접 버티고 앉아 팔아서 가장 실속 있고 분한 있는 양식거리를 사 온다든가, 뚝섬에 가서 열무 같은 푸성귀를 사다가 단을 지어서 말아 밑천만 빼고 나머지는 먹는다든가, 이런 일을 몸에 밴 일처럼 능숙하고 억척스럽게 해 나갔다.
[『목마른 계절』(세계사, 1994); 박완서(2012: 106)에서 재인용]
삶을 지속하기 위한 당연한 일상도 역시 지속됐다. “그 때 누구라도 밖에 나가려면 우리도 빨갱이다. 너희와 동조한다. 이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이 시기 민간인들은 “밀짚 모자에 빨간 리본”을 달았다(박완서, 위의 글: 107). 이후, 이 리본은 서울 수복을 가리키는 “9월 함포 사격 때 떼어” 버렸다고 말한다(박완서, 위의 글: 113).
아무리 공화국의 하늘 아래라 해도 사람 사는 세상인 이상 먹어야 사는 것 다음으로 참을 수 없는 것이 사고파는 일이라는 건 흥미 있는 일이었다. … 시장에서는 현금 거래보다는 물물교환이 훨씬 위험 부담이 덜하다고 하는데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웅진하우스, 2005); 박완서(2012: 113)에서 재인용]
인민군 치하와 유엔군 치하의 서울 사이가 다른 것은 도시에서의 물자 “유통” 문제다. “농촌은 괜찮아요. 쌀 생산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인민군 치하의 도시에서 “유통이 안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박완서, 위의 글: 115).
유엔군 치하에서는 “먹는 거 하나는” “배급이니 무상원조”가 많은 상황이었다. 이때의 “유통”된 물자는 “생산 공장”을 통한 신품은 아니었다. “구호 물자 빼돌리는 장사”의 성황이다(박완서, 위의 글: 115). “돈암시장 추녀 밑” 같은 곳에서 “물물교환”을 하는 것이고(박완서, 위의 글: 113), “뉴똥(치마)이나 양단 등 값비싼 본견으로 만든 한복이나 은수저, 그리고 팔목 시계부터 괘종 시계까지 각종 시계들[『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05); 박완서(위의 글: 112)에서 재인용]”이었다.
분하다 못해 생각할수록 억울한 것은 … 대구나 부산으로 멀찌가니 피난 가서 정부가 환도할 때까지는 … 자리 잡고 사는 이들은, 서울 쭉정이들이 북으로 남으로 끌려 다닌다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들의 피난살이 고생만 제일인 줄 알겠거니 싶은 거였다. 부산 대구 피난살이의 고달픔이 유행가 가락에 매달려 천 년을 읊어 댄대도 어찌 서울살이의 서러움에 미칠 수 있을 것인가? 그게 왜 그렇게 억울한지 몰랐다. 부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웅진지식하우스, 2005)]
그러나 중공군이 참전하며,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한다. 사실상, 1950년 12월 24일 서울시에는 공식 소개령이 내려졌다. 많은 사람들은 조영남의 노래 가사처럼 “(1.4 후퇴 때) 피난 내려”갔다. 그러나 박완서와 그녀의 가족들은 “남아 있었”다. 이때 박완서와 가족들은 이산한다. 박완서의 모와 오빠, 첫째 조카와 현저동의 집에 남고, 박완서와 올케와 둘째 조카는 북쪽으로 이동한다. 그 과정에서 트럭에 실어 단체로 이동시키기도 하고, 걸어서 이동하게끔도 한다. 박완서와 올케는 트럭 시간을 피해 “임진강 건너면 다시 못 만난다”는 말에 밤마다 “느릿느릿” 걸었다. 이 과정에서 인민군 측 역시 “걸어서 가는 사람들”에게 “피난증”을 발급받아 파주군 탄현면을 거쳐 교하로 이동한다(박완서, 2012: 121-127). 이후, 1951년 3월 16일 서울이 재수복된 후, 박완서와 올케는 돈암동의 집으로 돌아갔다.
4) PX라는 공간과 초상화부
이후, 박완서는 1951년 가족의 생계를 위해 PX에 취업한다. PX에의 취업은 “알음알음” 뽑기에 진입이 쉽지 않다. 그러나 “물건 빼돌려서 파는” 블랙마켓을 했다가 해고되는 사람의 수도 많았다. 이때 이뤄지는 선별은 타 부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과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지 등으로 여겨진. 이 과정에서 박완서에게 제안이 온다. (영문과라고 허위 대답을 한 후) 취업이 됐고, 일종의 통행증 “임시 패스”를 발급받는다(박완서, 2012: 139). PX에의 취업은 “이제 살겠 됐구나”며 가족과 축하했지만, ‘PX걸’이라는 비아냥을 의식하고 “나중에 시집갈 때 뭐 어쩔까 봐 걱정도 되고, 그냥 수치스러”워 “이웃에는 쉬쉬”하는 일이었다.
미군 PX라는 공간은 한국인들이 종업원으로 일하지만, 미국군에 의한 미국군을 위한 공간이었다. 앞선 예처럼 분명 미국의 질서에 의해 운영됐다. 이러한 공간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서울에 남아있는” “사오십된” “아이도 많이 낳은” “극빈한 사람들”(박완서, 위의 글: 147) 중 하나였다. 이들이 생활을 유지하는 방식 중 하나로 미군 부대 물품을 밖으로 빼돌려 파는 일이 있다. 안에서 “PX걸”들이 자신이 일하는 매장의 물건을 청소아줌마들에게 빼돌리는 경우도 있다. 처바깥으로 반출하는 것이 문제인데, 이때는 “화장실”이 “물건을 떼는” 작전 공간이었다. “부피가 적고도 값 나가는 양키 물건, 그 땐 치약, … 또 껌, 초콜렛, 담배.” 등을 “고무줄 매고 고 다음 쌓고”, 한복을 입고 집어넣는다. 하루에 한 번 정도가 아니라 “얼마든지 집어넣어” “점심 먹으러 나갈 때나, 차고 나간다”. 물론 입구에서 몸수색이 이뤄진다. 미 헌병(MP, Military Police)이 있고, 성(性)에 따라 동성(同性)이 몸수색을 한다. 그러나 “서로 나눠먹는” 사이기에 눈을 감아준다(박완서, 위의 글: 153-155).
초상화를 그리러 오는 주된 고객은 “계급 낮고 어린 병사들”이다. 박완서가 기억하는 질문은 “젊은 애가 쳐다보면 윙크도 하고”, “아, 너 참 잘 생겼다. 핸섬” 같은 말을 건넨다. “걸프렌드”는 일종의 방아쇠(trigger)다. “너 걸프렌드 얼마나 이쁘니, 요기 초상화 그려서 보내 주면 굉장히 좋아할 거라고 하면서 주문을 시작”한다. 주문은 군인들이 화가 앞에 앉고, 화가가 직접 보면서 그리는 방식이 아니다. 군인들이 “흑백사진”을 맡기고, 박완서와 같은 호객꾼이 “(머리색이나 눈색과 옷색 등을) 다 적어서 사진 뒤에다 붙여”서 준다(박완서, 위의 글: 149). 이후에 그림을 찾으러 오는 이를 맞아 완성된 그림을 전해주거나, 우편으로 받길 원하는 사람들은 (받은 송료로) 2층의 포장 센터에 가서 포장을 하고, 같은 층의 우체국에 가서 발송해야 했다(박완서, 위의 글: 147). 무엇보다 그림은 “캔버스”가 아니라 “스카프”에 그려졌다(박완서, 위의 글: 145). 수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잘못 그린 경우엔 “물어내야” 했다(박완서, 위의 글: 149). 이들 화가 가운데는 (담배를 감싼 껍질에 그림에 그린 걸로 유명한) 박수근도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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