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역 앞의 브로커: 1960-1970년대 쌀유통을 중심으로

[연구계획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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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포차

1.연구 목적 및 필요성

이 연구는 1960-1970년대에 “서울에의 쌀의 관문”으로 불렸던 용산역 하차장 부근에서 쌀의 유통에 개입한 “쌀 브로커”를 연구대상으로 한다. 브로커(Broker)란 “구입 혹은 판매를 중개하고 수수료를 받는 업자”를 말하는데, “쌀 브로커”란 당시에 용산역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쌀의 구입 혹은 판매를 중개한 업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서울이란 공간은 자급자족이 힘든 도시로써, 쌀을 포함한 농·수산품 일체를 외부에 위치한 농·어촌으로부터 들여와 거래해야만 한다. 도시에서 쌀의 유통을 추적한다는 것은 소비지와 생산지 사이의 농산물 유통과정을 밝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통사(通史)에 그친 시장 연구들의 한계를 넘어, 용산역 하차장 부근에서 쌀이 거래되는 모습과 이동하는 과정을 그려내고자 한다. 시기적으로는 단일한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1985년-현재)이 들어서기 이전인 근대화 과정에서의 상거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정부가 단일한 도매시장에 대한 규제가 아니라, 여러 시장에 대해 규제와 통제를 시도한 상황이다. 쌀유통에 있어 안정적인 가격 조절과 물량 조절의 실패를 거듭하는 상황(1963년과 1967년 등의 쌀파동)이었다는 점에서, 정부의 대처를 통한 정부와 시장,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재검토할 수 있다. 더욱이 이 시기는 정부 뿐 아니라 조합의 개입이 확인된 시기라는 점에서 ‘국가-민간조합-시장’의 이합집산과 관계망을 그려낼 수 있다.

당시 쌀 거래에 있어 가장 커다란 문제는 “사재기”였다. 바로 이 사재기의 주범이 “쌀 브로커”다. 쌀 브로커에 대한 당시의 인식은 정부미를 시민에게 공급하지 않고, 다른 도·소매상(싸전)에게 웃돈을 얹어 팔거나 매점매석을 하는 자들로 일컬어졌다. 그래서 쌀 시세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가격 폭등을 유발하는 원인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쌀 시세의 안정을 위해 “쌀 브로커”는 적발과 단속의 대상이었으며, 농산물 유통체계 뿐만 아니라 경제 근대화의 병리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쌀 브로커”에 대한 당시의 부정적인 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쌀 브로커”들은 당시 쌀유통에 있어 엄연한 행위자로 보고, 경제 활동의 주체로써 ‘쌀 브로커’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들 나름대로의 역할을 탐색할 것이다. 중앙정부 혹은 지방정부의 법이나 제도로부터 벗어나거나 때때로 이를 어기는 관행적인 상행위(商行爲)를 재현해내는 것을 최종의 목표로 삼는다.

  1. 연구 내용 및 방법

이 연구는 구술자료의 채집과 문헌자료의 조사를 병행하여 진행할 것이다.

우선, 문헌자료에 그치지 않고 구술자료의 채집을 시도하려는 이유를 밝히겠다. “쌀 브로커”는 당대에 음성적인 존재였다. 서울의 쌀유통에 관한 농림부, 서울시, 농업협동조합, 대한곡물협회 등의 공식적인 자료에는 “쌀 브로커”가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문제 대상으로써 제시될 뿐이다. 전적으로 공식적인 자료에 기댈 수 없는 상황에서 엄연히 “중개업자”로 활동한 “쌀 브로커”에 대한 면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1960-1970년대 당시 시장에서 쌀유통에 관계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구술채록을 필요로 한다. 당대 현장에서 쌀유통에 종사한 사람들이라면 “쌀 브로커”들과 지속적인 거래를 트거나, 응당 대면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헌자료 조사는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 조사를 실시할 것이다.

첫째, 용산 지역과 시장에 대한 조사이다. 용산 지역은 식민지기부터 전후까지 외지인들의 공간이었다. 특히, 용산역은 용산 지역에서의 삶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1960-1970년대에는 “서울에의 쌀의 관문”이며 쌀의 향방이 정해지는 농협 공판장이 존재하였다. 용산지역과 시장의 구성과 역할에 대한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맥락을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쌀 브로커”의 활동공간에 대한 이해이자, 향후 수집할 구술채록에 앞선 준비 작업이다.

둘째, 1960-1970년대의 시장에 관한 조사이다. “쌀 브로커”의 보편적인 역할이란 “산지(産地)에서 서울로 막 들어온 미곡을 수집하여, 서울 안에 있는 도·소매상에게 중개하는 것”이다. 즉, 1960-1970년데 서울에서 “쌀 브로커”들은 서울의 도매시장 뿐만 아니라 소매시장, 혹은 싸전과도 관계가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전체를 살펴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당시의 법과 제도를 기반으로 경제상황을 이해하고, 이를 기반으로 “쌀 거래”가 이루어진 서울의 시장과 유통 구조를 살펴볼 것이다.

셋째, 당시 사회의 쌀유통과 “쌀 브로커”에 관한 자료들이다. 쌀유통은 쌀을 거래하는 것을 가리킨다. 쌀이란 단일한 상품이지만, 정치·사회·문화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쌀이란 곡물은 한국 사회에서 단순한 식재료라는 의미를 넘어, 일상적인 삶의 양식과 직결되는 먹을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수량화된 자료를 통한 상거래의 추이라는 기존 연구의 방법은 제한적이라고 판단하고, 당시에 간행된 신문과 잡지, 출판된 단행본과 연구를 고루 살피고자 한다. 특히, “쌀 브로커”의 전모를 밝히는 과정은 “쌀유통”의 감춰진 면을 밝히는 일이므로, “쌀 브로커”의 역할과 상거래 관행을 세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하여 그들의 영향과 이후 시기에 처하게 된 상황을 정리할 것이다.

  1. 연구동향

용산지역은 19세기 말 일부가 일본에 수용되었고, 20세기 초 조선통감부와 조선총독부에 의해 대로와 철로가 놓이고, 주거지와 군사지역으로 개발된 지역이다. 서울역에서 한강대교까지의 대로를 중심으로 왼편과 오른편의 역할이 자명하게 달랐다. 왼편은 거주지역이며, 오른편은 군사기지의 부지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까지도 이같은 공간 배치가 이어지고 있다. 이 공간에 있어 가장 주목할 부분은 용산역이다. 용산역은 일본에서 중국 본토까지 이르는 제국주의적 진출을 위해 건설되었는데(신주백, 2007), 용산역은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통로이며, 이미 군부대의 물자를 실고 내리는데 필요한 시설이 설치되어있다는 점에서 시장이 자리잡기 용이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용산역은 군인을 비롯하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오가는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해방촌과 성매매집결지의 존재는 연구자들의 주목을 끌었다. 용산2가동의 해방촌은 용산지역 뿐 아니라 서울 전체에서 월남민 마을로 주목받았다. 1947년에 이미 월남민 마을이 구성되었고, 전후에 월남인들이 대거 유입되며 1960년대가 되면 다른 지역에 비해 보다 많은 인구이동을 보여주고 있다(이신철, 2000). 게다가 사람들의 이동과 왕래가 빈번한 용산역 일대에는 성매매집결지(집창촌)이 자리잡았다(김희식, 2008). 이 때문에 용산은 “성매매집결지”의 현장으로 재조명되었다. 초기에 강영수(1989)는 ‘사회악’으로써 성매매 실태를 고발하는 목적을 가진 연구에서 용산 지역을 재조명한 바 있으나, 이후에는 실태조사나 정책연구를 넘어 한국정부의 성매매 정책(김희식, 2008; 박정미, 2011)에서 용산지역과 성매매와 관련한 여성들의 경험을 살피는 연구(막달레나의 집, 2002; 막달레나 공동체 2007; 원미혜 2010; 이희영, 2014)로 이어졌다.

이같은 정치·사회적인 역사연구와 더불어, 도시의 변화 과정에서 지역 거주민들의 삶의 방식과 구성원의 변화를 주목할 만하다. “지역의 거대한 구조와 장기지속적인 추이, 혹은 수많은 통계 숫자에 대한 연구는 당시 이 지역에 살았던 인간을 소외시키거나 배재할(전경목, 2015)” 위험이 존재한다. “종교의례”를 밝히는 연구와 더불어 “지역의 생업과 공간적인 변화, 전승을 주도하는 집단과 같이 지역에서 ‘전승’되는 삶의 방식과 구성원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도 존재한다. 끊임없이 변화의 한복판으로 자리한 용산지역은 여전히 제당을 중심으로 지역 문화의 전승을 시도하고 있는 공간이다(한희숙, 2000; 정형호, 2005).

그러나 용산이 도시의 일부라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근대화 과정에서의 전형적인 도시의 인간관계와 업무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짐멜의 예측과 달리, 정확성과 계산 가능성과 치밀성이 곧바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짐멜, 2005: 39-40쪽 참조). 게다가 정확성과 치밀성이 가장 비인격적인 그 구조라고 설명하기도 힘들다. 1920년대 들어 들어서서 1980년대까지  이 지역에 있었던 시장은 대표적인 예이다. 시장의 경우에 ‘제도’와 ‘규칙’이 마련되지만, ‘위반’과 ‘회피’이 이루어지며, 이에 대한 역대응이 이어진다(뤼트케, 1994). 하나의 관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위반’과 ‘회피’는 근대화 과정에서 도시의 일상생활을 살필 수 있는 주요한 지점이다. 게다가 이 ‘위반’과 회피‘는 한 시점의 이야기라기보다, 나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연구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접경(接境)하는 시장은 ’위반‘과 ’회피‘의 역사성을 통하여 일상성을 재고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시각을 견지(堅持)할 것이다.
시장은 경제학적인 의미에서 상품으로서의 재화와 서비스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영역을 가리키지만, 시장의 일반적인 의미는 여러 가지 물품이 사고 팔리는 일정한 장소를 말한다. 이 연구에서 대상으로 삼는 접경지대로서의 시장을 명확히 드러내는 정의는 후자에 가깝다. 왜냐하면 인문·사회과학적 연구들이 밝히고 있듯이 서울은 조선시대 이후 현재까지 상품의 최대 소비지임과 동시에 물산이 모이고 다시 전국으로 유통시키는 지역이란 장소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지역 시장들을 다룬 연구들의 경향 중 하나는 역사적 기원과 변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다루었다는 점이다(이태진 편저, 1998; 고동환, 1998; 전우용, 2001; 박은숙, 2007; 고동환 ,2008 등). 서울지역 상인에 관한 연구들도 많이 이루어졌는데 한국 부르주아지의 상업적·도시적 기원에 대한 연구(홍성찬, 2003, 2012, 2014.), 개항기에서 식민지시기 사이 서울의 객주들의 변화 혹은 몰락에 대한 연구(유승렬, 1998; 전우용, 2005)와 19세기 말 ~ 20세기 초 행상(行商)의 활동를 통해 당대의 소비·생활을 살피고자 한 연구(전우용, 2007)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들은 대부분 해방 이전의 시기에 집중되어 있어 해방 이후 서울 지역의 시장을 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한 연구들은 매우 드문 실정이다.

위의 연구들이 주로 역사학 혹은 경제사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연구들이라면, 현지조사를 통해 서울지역 시장 내에서 일어나는 상관행과 시장이 가지고 있는 장소성 등을 다룬 조사·연구들도 있다(강신표, 1979; 안주영, 2007; 서울역사박물관, 2015). 현지조사를 통한 연구와 조사가 시장연구에서 중요한 이유는 시장이란 상품과 상품의 교환뿐 아니라 상품과 사람의 만남, 사람과 사람의 교류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이다(정승모, 2000, 32쪽). 하지만 앞선 연구들은 표면적이고 공식적인 영역의 것을 주로 다루었을 뿐 그 이면에 있는 비공식적 영역에 대한 연구는 부족했다고 여겨진다.

쌀브로커들이 행위자로 참여했던 쌀유통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두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당대의 쌀유통의 현실과 문제점을 밝히고 그 문제점을 해결할 정책적 방안을 제시하는 연구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김원배; 1971; 김상종, 1982; 성배영, 1985, 장덕기; 2001 등). 또 역사적 관점에서 쌀유통을 접근한 연구들도 있다(이홍락, 1995; 이욱, 1996, 2006; 오호성, 2007, 2013; 이송순, 2008; 임채성, 2008). 쌀유통에 대한 역사적 관점과 정책적 관점의 연구가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쌀 과 관련한 사항들은 전근대, 근대에 상관없이 국가의 존립과 관련한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책적 관점에서 쌀유통을 다룬 연구들의 경우 주로 제도나 정치적 사건을 중심에 두고 있다. 그래서 당대의 쌀유통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상거래관행과 당대인들의 생활세계에 대한 묘사와 관련성에 대한 탐구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리고 역사적 관점의 쌀유통 연구들은 시기적으로 해방 이전으로 집중된 경향을 보이는데 그런 점에서 이 연구는 이제는 시기적으로 보완해야 될 해방 이후의 서울의 쌀유통의 전모를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1. 공동연구의 필요성

이 연구는 민속학(도시민속학) 연구자와 사회학(사회사/역사사회학) 연구자의 공동연구이다. 이런 두 박사과정생이 탐정질을 하겠다고 나선 대상은 “1960-1970년대 용산지역에서 활동한 쌀 브로커”이다. 발단은 두 연구자의 변두리 습성 때문이다. 각자의 전공 분과에서도 중심에 서있지 못한 사람들이 선택한 주제어는 “일상생활, 생활세계, 맥락”과 같은 단어들이다. 기실 역사학의 “사실 찾기”를 하기에도 난감한 처지라서, “시공간을 맥락화”하는 방법을 통하여 “일상생활”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각자의 ‘무엇’과 ‘왜’를 갖고, 재현할 대상을 찾아 나섰다. “사라진/사라져 간” 대상 말이다. 사소해 보이지만, 일상성이란 지점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을 가지고 공조(共助)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 사회사/역사사회학의 기여란 ‘구조를 검토’하는데 있다. “개인의 의지와 동기, 목표는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공시적이거나 현재적인 것으로만 이해하지만, 이 역시도 역사성이 있으며, 의도와 상관없이 작동하는 기층의 구조(강성현 외, 2013: 136쪽)”가 존재한다. 개인과 구조가 (아무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만나는 공간이 ‘시장’이라는데 동의하였다. 시장에는 다양한 행위자가 존재한다. 생산자, 운송업자, 도매상, 중간도매상, 소매상, 지게꾼, 소비자, 구경꾼, 가끔 나오는 공무원, 감독관, 공판장 직원, 조합장, 조합원 등 말이다. 행위자들만 훑어보더라도 시장이란 공간이 정부와 민간, (더 세세히 나누어야겠지만) 공적이며 사적인 것들의 우연한 접경(接境)이란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민속학의 관점에서 접경지대인 시장의 상거래 관행이란 단순히 ‘이전부터 있던 것’ 혹은 ‘전승된 것’만은 아니다. 그 이유는 상거래 관행이 형성되고 통용되는 시장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접경지대로서 다층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상거래 관행도 다양한 요인들의 개입으로 변화하거나 소멸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상거래 관행이라는 것이 상거래 한 부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행하는 사람들의 삶과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소위 말하는 ‘총체적’관점에서 상거래 관행을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위의 두 관점을 동시에 인식하고 연구에 적용하고자 할 때 사회학을 중심으로 진행된  1960-1970년대의 연구를 재고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개발과 독재라는 각각의 상을 상정하는 연구들에 대해, 단순한 동의와 거부를 넘어 비판적으로 사유해야할 때에 접어들었다고 본다. 특히, 근대적인 통제/검열과 발전의 양상 그 어느 쪽을 수용하기보다, 시장의 “생활세계”를 중심으로 당시 시장에 영향을 미친 법적, 제도적, 경제적 요인들을 세세히 나누어 각각의 타당성을 검토해 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사건을 역사적 사회적 ‘상황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사건의 발생과 과정 그리고 결과를 ‘과학적 인과관계로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김동노, 2013: 92-93쪽)”는 선배 연구자의 지적은 이 연구를 통하여 체득해야할 방법이다.

  1. 연구자 소개

박사포차는 사라져가는 민속학을 전공하는 이민재(자칭 쌀 전공)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회학을 전공하는 소준철(자칭 책 전공)이 함께 이름붙여놓은 프로젝트 그룹이다. 아마, 학문이 사라지거나 내가 사라질지 몰라 포장마차계로 진입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둘의 처지를 대변하는지도 모른다. 이 두 변두리 연구자들은 2015년 봄, 함께 황학동 만물시장과 중앙시장을 답사하고난 후, 쪼마난 포장마차에서 만 원 짜리 회접시 하나에 맥주를 마시며 결의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최근에는 둘의 전공과 아무 상관도 없는 듯 보이는, 그렇지만 이 둘은 끊임없이 영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1896-1899년에 간행된 <독립신문> 독해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두것들이 할말이 없어서 만들어 낸 “공통 주제”는 일상/생활/세계 정도이고, 취미는 (촌스러운) 탐정놀음이다. 그런데 버거니 루크만이니 하는 작자들보다 형이하학적인 것들이라, 한 인간은 가서 앉아있다가 물어보고 듣고 떠들고 보고 쫓아다니는 걸, 다른 한 인간은 몰래 가서 엿보고 엿듣고 은근슬쩍 끼어들다 도망가는 걸 나름의 방법론으로 믿고, 쓰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알바동맹이다.)

그리고 연구거리의 ‘보고’, ‘시장’ 연구를 해야 한다는데 쿵짝이 맞아서 이런 연구계획서(를 빙자하나 연구노트)를 만들어냈다. (이건 사실 모기관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보기 위한 연구노트이다.) 한 놈은 서울에, 한 놈은 오사카에 있는 상황인데. 밤새도록 까똑을 붙잡고, 끊임없이 업뎃되는 드롭박스를 보며 한숨쉬다 적은 (부족한) 글적거림이다. 지원을 못 받아도, 박사포차는 이걸 쓸 것이다. 그럴 인간들이라고 (쓸데없이) 자부하니까.

이민재(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류학·민속학/민속학 전공 박사과정)는 인천 남동구에 위치한 남촌동을 현지조사지역으로 지난 100여 년간 인천 도시화에 따른 남촌동의 변화, 특히 농업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연구한 󰡔도시화에 따른 마을과 농업의 변화-인천 남동구 남촌동을 중심으로󰡕(2013)을 제출하였다. 이후 일본의 양파 도입과 확산을 다룬 「Onion’s Introduction and Adopted in Modern Japan」을 발표하고 석사학위논문을 수정·보완한 「도시화에 따른 주택지 개발과 마을의 변화-인천 남동구 남촌동의 사례를 중심으로」를 게재하였다.

소준철(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사회학 전공 박사과정)은 1970년대에 출간된 잡지 《뿌리깊은 나무》를 통하여 당시의 출판 상황과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을 기록하는 방식을 탐색한 『1970년대 전통적 생활세계와 생애사적 기록 – 《뿌리깊은 나무》를 중심으로』(2015)를 석사논문으로 제출하였고, 서울 북서부의 한 지역에서 『폐지수집 여성노인의 일과 삶』(서울연구원, 2015)을 공동작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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