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 시기에 쓴 일기

[계엄령 시기에 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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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4일 토요일, 오후 6시 15분.

지난 주 일요일부터 매일 밤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요일의 이른 여섯 시, 나는 짧은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외쳐댔다, “밖으로 나오시오.”라고 말이다. 나는 두려웠다. 나는 부랴부랴 옷을 입었다. 그 사람의 외침은 모두를 향한 부름이었는데, 나는 공포를 느꼈다. 시민군과 공수부대(paratroopers)가 ___ 벌어진 시내로 와서, 시민군에 합류해달라는 것이었다. 시내께 병원에서 위급한 일이 생겨난 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나는 여권을 챙기고, 속옷을 갈아 입고, 다음 기사를 위한 읽을거리 몇 개를 챙겨서 양림동[옮긴이: 광주광역시 소재]으로 걸어 갔다. 그 곳에는 택시와 버스와 차가 단 한 대도 없었다. 그저 트럭 한 대가 거리를 비잉 돌았는데, 그 트럭은 도심에서 온 모양이었고, 건물지역에서 돌들을 싣고 왔다. 운전자는 10대들이었다. 나는 가방을 메고 도심으로 가는 길에 무척 예민해졌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는 중인 것처럼 보이지 않길 바랐다. 모든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온 듯 보였다.

한 주 동안 밤낮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지만, 사실 하루가 지났을 뿐이다. 가장 무서운 공포는 군인들이 병원에 들어갈 수 있으며, 나이가 젊은 환자들과 의료진들뿐 아니라 다른 환자들까지 대량학살할지 모른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같은 대기 상태는 마치 고문과도 같았고, 가장 강력한 무기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은건지, 총격이나 피타(被打)가 이루어지긴 한건지, 구금되기라도 했을지 모르겠다. 분명히 가까운 날에 기자들이 뉴스를 내놓을 것이다. 그 사이에, 우리가 보고 기다려야 한다. 몇 천에 달하는 용감한 젊은 이들이 희생될지, 진실을 위해 필사적으로 거짓에 맞서는지를 알아야 한다. 거짓말들은 라디오 방송과 공습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 밤, 다시, 우리는 군인들이, 공부수대원들이 다시, 올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분명 학생들을 쫓을 것이다. 우리는 도망쳐야 할테다. 죽음을

어쩌면 말이다, 우리는 또 다른 새벽을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비가 내리고 있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은 삶이 찬란히 빛나는 새벽이 찾아 온 새벽과도 같다.

5월 27일

오늘 새벽 3시 50분부터 총격이 시작되었다. 단발의 소총 사격 후에 어마어마한 총알소리가 들려온게 기관총 사격이 이루어진 것 같다. 5시 쯤 되어서, 나는 무언가 도심을 관통하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다. 헬리콥터나 전투기 소리같다. 우리는 아이들의 요(매트리스)가 있는 ᄍᆃᆨ으로 옮겨가, 그걸로 창문을 가렸다. 총알이 들이칠지 몰라서 앉아 정지상태로 있었고, 대개의 사람들이 숨죽인채로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투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끝난 건 아니었다. 내가 확신한 것 보다, 일

칠백 내지 팔백의 사람들이 살았으며, 아마도 더 많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정의와 진실과 자유를 위하여 살아 갈 것이다. 공수부대의 잔혹함이 횃불을 끌어냈고, 점차 퍼져 나갔다.

9시나 10시 쯤까지, 몇 차례의 산발적인 조준 사격을 제외하면, 아주 적은 수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리고는 헬리콥터와 비행기에서 대민 방송을 끊임없이 내보냈다.

이후, 정부당국은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이 투쟁을 계속해 나갈건지 알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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